동시대반시대

아랍인들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개척자들이다

- Michael Hardt & Antonio Negri

 

 * 이글은 지난 2월 24일 가디언지에 실린 글을 번역한 글입니다. 원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번역: 고병권)

지도자가 없는 중동의 봉기들은 과거 라틴아메리카가 그랬던 것처럼 자유 운동들에 어떤 영감을 북돋울 것이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가로질러 확산되고 있는 봉기들을 지켜보는 이들은 이 봉기들의 독해와 관련된 하나의 과제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봉기들을 과거의 수많은 반복들로서가 아니라 독창적인 실험들로서, 다시 말해 지역을 뛰어넘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들을 열어젖힌 그런 실험들로 읽어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진실로 우리는 이번 투쟁의 순환을 통해 아랍 세계가, 지난 십 년 동안 라틴 아메리카가 가졌던 의미를, 다가올 십 년에 대해 갖기를 소망한다. 아르헨티나에서 베네수엘라까지 그리고 브라질에서 볼리비아까지, 라틴 아메리카는 강력한 사회 운동들과 진보적 정부들 간의 정치적 실험이 이루어지는 실험실이었다.

이번 봉기는 곧바로 아랍 정치를 과거에 묶어두던 문명충돌 같은 인종주의적 개념들을 일소한,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대청소를 수행했다. 튀니지, 카이로 그리고 벵가지의 다중들은, 아랍인들은 세속적 독재와 광적인 신정체제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한다거나, 무슬림들은 어떻게든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릴 수 없다는 식의 정치적 고정관념들을 박살내 버렸다. 사실 이번 투쟁들을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사람들을 오도할지 모른다. 마치 사건들의 전개가 1789년이나 1917년, 혹은 왕이나 차르에 맞섰던 유럽의 과거 다른 봉기들의 논리를 따르는 것처럼 생각하는 주석가들에게 그럴 위험이 있다.

이번 아랍 봉기는 실업 문제 주변에서 점화되었고, 또 봉기의 중심에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지만 꿈을 잃은 젊은이들이 있다. 이들은 런던과 로마에서 시위를 벌인 학생들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 ( <위클리 수유너머> 작년 12월호 ‘들썩이는 세계’ 참조). 비록 아랍 세계의 일차적 요구가 독재자와 권위주의 정부를 끝장내는 것에 있다고 하더라도, 이 단일한 외침의 이면에는 예속과 빈곤을 끝내고 지적이며(intelligent) 대단한 능력을 가진 대중들에게 권력과 자치를 부여하려는, 삶과 일에 대한 일련의 사회적 요구들이 존재한다. 지네 알-아비디네 벤 알리, 호스니 무바라크, 무아마르 가다피를 권력에서 몰아내는 것은 단지 첫 걸음에 불과하다.

봉기의 조직화 방식을 보면 세계의 다른 지역들, 즉 시에틀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 그리고 제노바와 볼리비아의 코차밤바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들에서 우리가 지난 십여 년간 보아온 것들과 닮아있다. 단일한 중심 지도자가 없는 수평적 네트워크 말이다. 전통적 야당들이나 단체들도 이 네트워크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지도할 수는 없다. 외부의 관찰자들은 이집트 봉기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봉기의 지도자를 지목하기 위해 애써왔다. 무하메드 엘바라데이라든가, 구글의 마케팅 책임자였던 와엘 고님 같은 이들을 그렇게 지목했다. 그들은 무슬림 형제단이나 다른 단체가 사건을 장악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런데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다중이 어떤 중심 없이도 스스로를 조직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지도자나 전통적인 조직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중심은 봉기의 힘을 갉아먹고 말 것이다. 이번 봉기에서 페이스북이나 유튜브, 트위터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 수단들이 광범위하게 통용된 것은 이 같은 조직화 구조의 증상이지 원인이 아니다. 이것들은 자율적인 조직화를 위해 도구들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지적인 대중들의 표현 양태들(modes)일 뿐이다.

비록 이 같은 조직화된 네트워크 운동들이 중앙의 지도를 거부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들은 반란의 가장 적극적인 선분들(가장 활동적인 집단들)과 다수 대중의 욕구를 연결시키는 새로운 구성적(제헌적, constitutional) 과정 속에서 자신들의 요구를 공고히 해야 할 것이다. 아랍 젊은이들의 봉기는 확실히 전통적인 자유주의적 헌정(liberal constitution), 즉 단지 권력 분립과 정기적인 선거 시스템을 보장할 뿐인 그런 자유주의적 헌정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다중이 지닌 표현과 욕구의 새로운 형식에 적합한 민주주의의 형식을 향하고 있다. 이것은 우선적으로 표현의 자유에 대한 헌법적 승인을 포함해야만 한다. 여기서 말하는 표현의 자유란 정부와 경제 엘리트들의 부패에 항상 취약한, 그런 전통적인 주류 미디어들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 관계의 공통경험(common experience, 공동작용의 체험)을 통해 나타나는 그런 것을 말한다.  

또한 이번 봉기가 광범위한 실업뿐만 아니라 특히 젊은이들 사이의 좌절된 생산적이고 표현적인 역량에서 기인했다고 하더라도, 급진적인 구성적(헌정적) 대응은 반드시 자연 자원과 사회적 생산을 운용할 공동의 평면(common plan)을 창출해야만 할 것이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통과할 수 없고 자본주의가 의문에 부쳐지는 그런 문턱이다. 이슬람의 지배는 이런 욕구들을 충족시키는 데 완전히 부적합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번 봉기는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균형만이 아니라 지구적 경제 거버넌스 체계를 건드린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아랍 세계에서 확산되고 있는 투쟁의 순환이 라틴 아메리카처럼 되기를, 정치적 운동들에 영감을 주고, 지역을 넘어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고취시킬 수 있기를 희망한다. 물론 각각의 봉기는 실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재자들이 피의 진압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군부가 권좌를 차지하려 할지도 모른다. 전통적 야당이나 반대 그룹들이 운동을 자기 것으로 낚아채려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여러 종교적 분파들이 주도권을 행사하려 경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코 죽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미 쏟아져 나온 정치적 요구들과 욕망들이고, 또다른 삶을 살고 싶은, 자기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그런 다른 삶을 향한 지적인 젊은 세대의 표현들이다.

그런 요구들과 욕망들이 살아있는 한 투쟁의 순환은 계속될 것이다. 관건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 새로운 실험들이 다음 십 년 동안 세계를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이다.

응답 3개

  1. […] 실린 하트와 네그리의 칼럼을 번역해서 올려 놓았다. (http://suyunomo.jinbo.net/?p=7044)  이 링크를 다른 사람들도 함께 보기를 바란다. 개인적으로 이 글을 읽고 […]

  2. […] “수유너머”가  2월 24일 ‘가디언’지에 실린 하트와 네그리의 칼럼을 번역해서 올려 놓았다. http://suyunomo.jinbo.net/?p=7044 […]

  3. […] “수유너머”가  2월 24일 ‘가디언’지에 실린 하트와 네그리의 칼럼을 번역해서 올려 놓았다. http://suyunomo.jinbo.net/?p=70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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