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여치와 떠난 여행

2화 카페 <고장난 기억>

- 배문희

오늘 점심때 친척들이 온다고 해서 장장 육개월만에 외출을 감행하기로 했다. 친척들과 마주하는 것은 가족에게도 나에게도 상처가 되는 일이다. 옷을 챙겨 입고 가방을 매고 현관문을 열자 싸늘한 삼월의 공기가 이마를 탁 친다.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한다. 어디로 가지?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다. 하지만 밤 늦게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때워야 한다!

꼬깃꼬깃한 내 모습과는 달리 어쨌든 아주 근사한 봄날이었다. 갓난아이의 발바닥처럼 부드러운 바람이 머리칼을 가만가만 흔들고 머리 위로는 돌을 던지면 와장창 깨질 것 같은 투명한 하늘이 걸려 있다.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하지만 나는 봄 햇살을 피해 그늘로만, 그늘로만 숨어 다녔다. 봄 햇살과 가을 햇살은 언뜻 보면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입자를 가지고 있다. 가을 햇살엔 어딘지 모를 음울함이 묻어 있지만 봄 햇살은 순수와 기쁨 그 자체다. 깨끗하고 순수하기만 한 봄 햇살에 나를 담그기가 미안하고 부끄럽다. 마치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 위를 디딜 때 조심스러운 것처럼. 나는 자꾸만 자꾸만 봄 햇살을 피해 도망다녔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터벅터벅 걷다보니 벌써 집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우리 동네는 아파트 단지를 조금만 벗어나도 시골이다. 도로 옆으로 논과 밭이 펼쳐져 있다. 꾸불꾸불한 논두렁을 따라 걸으면 호수도 나오고 공동묘지도 나오고 라이브 카페촌도 나온다. 나는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졸라매고 동산 위 공동묘지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그곳은 우리 동네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다. 공동묘지는 산비탈의 양지바른 곳에 있어 언제나 햇빛을 담뿍 받고 있다. 공동묘지를 보고 무섭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삶과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틀림없다. 죽은 사람들만큼 고요하고 평화로운 사람들은 없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동산에 올라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마침표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동산 위에 올라가기도 전에 벌써 지쳐버렸다. 맨날 방안에만 처박혀 있다 보니 체력이 바닥으로 떨어진 모양이다. 너럭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주위에는 산수유꽃이 만발해있고 바위 아래에는 꽃다지, 벼둑이자리, 민들레꽃이 옹기종기 피어있다. 나는 꽃을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노란색 꽃을 가장 좋아한다. 희망이라는 것에 빛깔이 있다면 노란색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노란색 꽃만 보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노란색 꽃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꽃은 산수유꽃이다. 개나리나 민들레, 꽃다지 같은 것들은 물감으로 콩콩 찍어 놓은 듯 흐드러진 노란색이지만 산수유꽃의 노란색엔 어딘지 모르게 희붐한 안개 같은 것이 어려 있다. 게다가 이파리 하나 없는 메마른 겨울가지에 아스레한 노란색 꽃이 피어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

나는 꽃들을 꺾어 한 무더기의 꽃다발을 만들고 있었다. 이리저리 꺾다보니 벌써 한아름이나 되었다. 그 중에서 못나고 시들한 꽃들은 하나씩 골라내 휙휙 던져버렸다.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 버리면 안돼.”

나는 깜짝 놀라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웬 백발의 할머니가 커다랗게 부풀린 머리모양을 하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꼭 거대한 팝콘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 같았다. 옷은 또 어떻고. 마녀가 입을 법한 검정색 프록코트에 알록달록한 천을 덧댄 긴 바지를 입고 있었고 팔에는 가죽팔찌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히피 할머니다!’라고 외쳤다. 언젠가 영화에서 히피족들의 옷차림을 본 적이 있었는데 딱 저런 차림이었다.
“그 꽃… 버리지 말라구. 시든 꽃도 아름다운 법이거든.”

나는 그 말에 또 한번 놀라 히피 할머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지껏 나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건넨 사람은 처음이었다. 시든 꽃도 아름다운 법이라니… 나는 그 말에 그만 감동하고 말았다. 무언가 대꾸를 하려고 할머니를 올려다 본 순간 할머니의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온통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맑게 빛나는 눈빛. 나는 할머니가 시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시인보다 더 시인일 거라고.

히피 할머니는 너럭바위 옆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내가 뽑아서 버린 꽃들을 주어다 망태기에 주워 담았다. 망태기 안에는 약초 같은 것이 잔뜩 들어있었다. 이것들을 말려 향기로운 차를 만든다고 했다. 할머니는 꽃 이파리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다.

“자, 향기를 맡아봐라. 어떠니?”

“킁킁킁… 와. 향기가 정말 끝내주네요”

“시든 꽃은 활짝 핀 꽃만큼 아름답진 않지만 더 깊고 진한 향기를 풍기는 법이란다. 인간도 마찬가지지. 한번도 절망해보지 않은 사람에게선 진정한 인간의 향기를 맡을 수가 없단다.

할머니는 삼백살도 더 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열아홉 소녀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상한 할머니였다. 원래 나는 노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노인을 보고 있으면 미래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거기엔 무서운 진실이 담겨 있다. 나의 피부도 언젠간 저렇게 쭈글쭈글하고 검검누리하게 변해갈 거라는 진실. 누구든 불편한 진실은 피하고 싶기 마련이다. 하지만 히피 할머니와 함께 있는 건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눈빛은 맑게 빛났고 아코디온처럼 퍼졌다 접혔다하는 주름살에선 음악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내 미래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배낭 속에서 물통과 주먹밥 두개를 꺼내 할머니께 하나를 건넸다. 집에서 싸갖고 온 오늘의 식량이다. 우리는 너럭바위에 나란히 앉아 주먹밥을 오물오물 씹었다.

“너 이제 보니 아주 재미있는 아이구나.”

할머니는 내 배낭 속에 들어있는 도시락과 수첩, 반으로 접은 스케치북, 색연필 같은 것들을 들여다보더니 푸푸푸 웃었다. 나도 따라서 크크크 웃었다.

“자, 맛있는 점심을 얻어 먹었으니 나도 뭔가 보답을 해야겠구나. 차를 마시러 우리 집에 가지 않으련?”

“할머니 집이 어딘데요?”

“가보면 안다.”

나는 할머니를 따라가기로 했다. 어차피 갈 곳도 없었고 만날 사람도 없었으니까 뭐. 게다가 밤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다. 할머니는 동산을 내려가더니 웬 오토바이 위에 올라탔다.

“자, 헬멧을 쓰렴. 나는 운전을 아주 난폭하게 하거든.”

나는 이제 할머니가 무슨 행동을 해도 놀라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냥 할머니가 아니라 히피 할머니이니까.

할머니 말대로 오토바이는 무척 빨랐다. 나는 할머니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양옆으로 논이 펼쳐진 도로를 달리다보니 호수가 나왔다. 여기까지는 내가 자주 다녔던 길이다. 오토바이는 호수에서 왼쪽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이 오솔길은 한번도 본 적이 없는데… 여기가 어딜까. 오솔길에 들어서니 자그마한 굴이 보였다. 털털털털 요란한 소리를 내며 오토바이는 굴을 통과했다. 굴을 지나니 갑자기 사차원의 세계에 들어선 것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자,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한다.”

할머니는 굴 앞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앞장서서 걸었다. 키 큰 미루나무들이 파수병처럼 길 양옆에 서 있고 그 뒤에는 갈참나무, 떡갈나무, 은행나무 등 갖가지 나무들이 늠름하게 서 있었다. 나무들은 가지마다 푸르디 푸른 새잎을 피워내며 봄 햇살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발밑에는 갖가지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고 색색의 나비들은 꽃과 나무 사이를 바쁘게 왔다갔다했다.

“자, 다 왔다.”

할머니가 가리킨 곳에는 아담한 오두막집 한 채가 서 있었다. 지붕 아래에는 나뭇판을 얼기설기 이어붙인 간판이 붙어 있었는데 걸어가면서 자세히 보니 ‘cafe 고장난 기억’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대체 여기는 어디일까.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고장난 기억의 문을 열었다. (3화에서 계속)

응답 4개

  1. cman말하길

    여기는 연해주 시골구석인데 가끔은 히피할머니스러운 할머니도 지나가시구요(한데 항상 지쳐보이시네요. 러시아 서민들이 요즘 경제가 좋지 않거든요!). 도처에 기억(더 정확하게는 시간)이 멈춰버린 건물들이 많이 있답니다. 아직 쌀쌀하기는 하지만 공기는 아주 맑고 좋습니다. 하!하!하!

    • 말하길

      와, 연해주 분이 저희 위클리를 보고 계시다니, 반갑고 뿌듯합니다. 앞으로 연해주 소식 자주 들려 주세요

  2. 태양말하길

    히피 할머니 나도 만나보고 싶다.
    고장난 기억 카페에서 무슨일이 생길지…
    다음이 정말 기다려지내요

  3. 말하길

    카페, 지금도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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