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의 이미지올로기

파괴의 ‘순간’을 사유하라!

- 유정아(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이미지 제작과 혁명의 도래

혁명의 시대가 도래했다. 각 방송 매체와 인터넷을 타고 이집트 시위 현장이 전하는 갖가지 모습이 세계 각국으로 실시간 전해지고 있다. 소식을 접한 개인들도 역시 개인 트위터와 블로그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재잘twit’거리면서 재빠르게 소식을 전한다. 우리는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실시간 생방으로 보면서 모니터 너머로 함께 호흡하며 전율한다. 이 과정에서 이미지의 생산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퍼져나간다.

생각해보면 혁명은 늘 이미지를 동반하는 것 같다. 혁명의 이미지들은 시위를 알리는 중심 기표가 되어 시위대들의 요구를 외부에 전달하거나, 혹은 다소 침체된 혁명의 열기가 다시 불타오르도록 하는 선전 선동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후세들은 그림과 사진 기념조각상 등을 통해 역사의 한 페이지에 자리매김된 그 혁명을 기억한다.

들어보라! 1917년 레닌의 연설은 그 이미지를 통해 더욱 생생하게 그날의 함성을 들려주지 않는가!

“동지들이여, 볼세비키가 끊임없이 그 필연성을 역설해온 노동자 농민의 혁명이 실현되었습니다. 이 노동자 농민의 혁명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는 우리 모두의 권력, 소비에트 정부를 갖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부르주아지의 참여도 없을 것입니다. 억압받는 대중들 스스로가 정권을 창조할 것입니다. 과거의 국가 기구는 근본적으로 파괴될 것이며, 소비에트의 조직들 속에서 새로운 지도체계가 창조될 것입니다. 러시아의 역사에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이 세번째 혁명은 종국적으로 사회주의의 승리로 이어질 것입니다.” – 레닌 1917년 10월 25일, 제2차 소비에트 회의를 앞두고.

‘혁명’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은 역시 들라크루아의 그림이다. 이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1830년 혁명으로 알려지게 되는 7월 27~29일의 파리 시민봉기를 묘사한 것으로, 이후에 회화나 석고상, 동상 등으로 만들어지며 ‘자유’의 이미지 중에서 지금까지도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

들라크루아는 절반은 여신으로(이는 그리스 승리의 여신상에서 본을 뜬 것이다), 절반은 하층계급의 여자로 ‘자유’를 의인화했다. 또 한 손에는 삼색기를, 다른 손에는 구식 소총을 들고 가슴을 드러낸 채 자유를 상징하는 프리지아 모자(이 역시 고대 전통을 따르고 있다)를 쓴 모습으로도 혁명의 열기와 자유에 대한 구원을 묘사하고 있다. 왼편의 실크해트를 쓴 남자는 이 모자 대문에 가끔씩 부르주아 계급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실크해트는 이 무렵 프랑스 노동계급 일부에서도 쓰고 다니던 모자였다. 이 그림에서는 새 ‘시민왕’ 루이 필리프가 프랑스의 상징으로서 삼색기의 사용을 부활시키면서 그 명예를 인정한 1789년 혁명의 이상들과 1830년의 사건을 한 연장선상에서 바라봤던 당대의 역사 해석을 읽을 수 있다.

이 들라크루아의 ‘자유의 여신’의 모티프는 역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국의 ‘자유의 여신’에게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 조각가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티(Frederic Auguste Bartholdi, 1834-1904)가 설계해 1886년 제막식을 가진 자유의 여신상은 지금 우리들에게 훨씬 더 친숙한 이미지이다. 이 안에는 뉴욕항을 지키고 있는 현대판 로도스 거상의 이미지와 이데올로기적인 메시지가 뒤섞여 있다. 여신의 발목 부근에 끊어진 쇠사슬은 전통적으로 자유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 조각상의 정체를 말해주고 있으며, 손에 든 횃불은 ‘세상을 밝히는 자유’라는 조각가의 원래 구상을 보여주고 있다. 여신이 들고 있는 명판에 새겨진 ‘1776년 7월 4일’이라는 글귀는 미국 독립전쟁을 기념하는 정치적 메시지이다.

이미지 파괴와 혁명의 순간

이미지는 역사적 사건과 어떻게 만나게 될까? 물론 위에서 보았던 것처럼, 충실하게 그 사건을 전달하는 이미지 표출이 그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조심할 것. 이미지는 수천 마디 말보다 더한 감동을 더해주지만 그만큼 많은 유혹과 미혹의 함정 또한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이미지의 순수성에 속은 수많은 대중들은 독재자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발터 벤야민은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그것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인식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것은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어떤 영원하고 고정된 이미지에 집착하고 매달릴 때 축출되었던 독재자의 망령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과 다름없다. 여기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이미지, 파괴된 자유의 여신상을 살펴보자.

1989년 5월 30일, 시위대가 중국 천안문 광장을 점거한지 45일이 된 그 날, 천안문 광장에는 10m가 넘는 새로운 모뉴먼트가 등장했다. 횃불을 든 여인의 모습을 한 이 조각상은 ‘자유의 여신(Goddess of Liberty, 自由女神)’으로 알려져 있다. 이 상은 북경의 대표적인 미술 대학이라 할 수 있는 북경중앙미술학원생들에 의해 3일만에 제작되어 광장으로 옮겨졌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북경의 천안문 광장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모택동의 초상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 초상은 굳건하게 천안문 광장을 지키며 모든 국가행사의 중심 표상이 되어왔으며, 이 때문에 수많은 관광수입을 거두어들이는 경제효과도 톡톡히 보았다.

그러나 1989년의 봄, 이 초상화 앞에서는 성난 인민들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79년의 개혁개방 경제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민주화의 길은 요원했으며, 오히려 더 거세어져가는 억압적 상황에 분노한 중국의 학생과 시민들이 후야오방의 죽음을 계기로 당국에 맞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국 당국은 이들의 요구에 귀를 막았다. 6월 4일의 짧은 시간 동안 군대는 천안문 광장을 완전히 봉쇄하고, 그곳의 모든 조명을 꺼버렸다. 길고 고뇌에 찬 논의 끝에 남아있는 학생과 시위자들은 해산하기로 결정했지만, 군인들이 광장 주변과 시내의 다른 지역에서 학생과 시민을 사살하면서 베이징에는 소름끼치고 무시무시한 시간이 이어졌다. 밤새 비명이 울렸고 파편더미나 사제 폭탄을 맞은 군대의 트럭과 탱크에서 화염이 치솟았다. 수백 명이 죽었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 정부 당국은 가볍게 텐트를 부수고 자유의 여신상을 탱크로 밀어버렸다. 그들은 확성기를 통해 ‘이 조각상은 불법입니다. 이 조각은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조각상을 세우려면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경고하고는 인민들 위에 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주 간단하게 증명해 주었다.

부서지기 위해서 세우는 것! 혹은 세우기 위해 부수는 것!

그러면 이들 미대학생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 것일까? NO!! 이들 시위에 나선 인민들, 당시 미대 학생들은 스티로폼과 회반죽으로 만들어진 이 조각상이 당에 의해 곧 파괴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작업을 목격한 학생의 증언에 따르면, 이 상은 다시 분해되거나 옮겨질 수 없으며, 제거하려면 오직 부서져야만 되게끔, 크고 공고하게 조립되었다고 한다.

“민주의 여신상은 석고로 만들어졌고, 이는 물론 여기에 영원히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녀는 인민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사실 이 조각상 자체는 미술사적 감식안으로 볼 때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모습이다. 민주의 여신상은 형태상으로 대안적일만한 요소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도상은 자유의 여신상에서, 그리고 그 양식은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양식에서 빌어온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미술사적인 양식분석이 아니다.

이 혁명의 시기에 세워진 <자유 여신> 조각상은 상을 세움으로써 혁명의 이미지를 집결시키려는 그간의 상식적인 혁명 이미지와는 다른 기억을 남겨준다. 이것은 ‘파괴되기 위한’ 조각상이었다. 이들은 상이 곧 파괴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왜 파괴될 상을 제작한 것일까? 이건 무엇을 뜻하는가?

다르게 질문해보자. 역사적 현장을 어떻게 ‘정확하게’ 전할 것인가? 그 사건을 어떻게 ‘정확하게’ 보여줄 것인가? 이미지의 이중성을 다시 상기해보자. 이미지는 분명 진실을 전하지만, 그러나 때로 그 진실은 너무나 모호하며, 많은 경우 왜곡되기 쉽고, 사람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제멋대로 해석하고, 이미지는 역사를 통해 재맥락화된다. 이미지는 시간이 흐르며 딱딱하게 굳어간다. 마찬가지로 혁명 또한 시간의 흐름과 함께 고정된 텍스트로 이해되고 정리되며 견고해질 것이다.

당장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급박한 혁명의 순간에 이들은 상을 제작하고 지키려고 애쓰는 대신, 거대 조각상이 부수어지도록 (오히려) 의도하면서 역사가 고정된 이미지로 자신들의 혁명을 기억하지 않고, 새롭게 구성하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미지들이 순간적으로 와해되면서 벽력처럼 나타나는 성현으로서의 이미지는 구원의 징표가 될 것이기에… 한편에는 환상들의, 가상들의, 몽상들의 꺼짐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그 꺼진 자리의 잔해를 뚫고 나타나는 새로운 영상의 밝힘을 예시하는 것이 아닐까? ‘보이지 않는 상’이 역사의 시간을 통과하며 더 분명한 이미지로 인민의 가슴에 남을 것을 그들은 간파하지 않았을까? 관광객들이 찾는 박물관 안의 기념비가 아니라, (아마도 미완으로 끝날 당시의) 혁명의 순간이 언젠가 다시 오리라 믿어의심치 않는 소망을 드러낸 것은 아닐까? 바로 지금이 그 ‘순간’일지 모른다.

응답 4개

  1. 러블리형말하길

    고급한 글이군요. 너무 유익했습니다!

    • hermes말하길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파괴의 순간’은 저의 화두이지요.

  2. 말하길

    파괴되기 위한 조각상, 기념비로 남아 있는 기억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반복되는 봉기의 기억….중국에서 자유의 여신상은 그런 거였군요. 잘 들을 수 없는 소중한 이야기, 감사합니다

    • hermes말하길

      ㅋㅋ 왠지 의무방어 같은데요? ㅋ 그래도 읽어주셔서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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