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밤바다에서 만난 아버지

- 풍경지기 박혜숙

『밤바다 건너기』, 강미 지음, 문학과지성사

한 소녀가 바다를 보고 있다. 푸른 바다가 아니다. 어두컴컴한 바다다. 그 위로 초승달이 떠있다. 달빛이 희미하게 비친다. 소녀는 까치발을 하고 한쪽 팔꿈치를 창틀에 올린 채 어두컴컴한 밤바다를 바라본다. 뭔가 간절함이 묻어난다. 그리고 책 표지를 가로질러 붉은 연이 날아올랐다. 소녀의 간절한 바람이 하늘에 걸려있다.
어느 순간 나 자신도 까치발을 한 채 창밖을 바라본다. 어두컴컴한 바다 위로 작은 배가 떠있다. 스무살이 된 여자가 슬픈 표정으로 노를 젓는다. 무척 힘겨워 보인다.
‘도중에 실패한다고 할지라도 왜 시도조차 해보지 않으실까, 아버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그리고 나는 왜 다른 친구들은 겪지 않는, 힘든 과정을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대학을 진학할 때마다 겪어야 해.’ 스무살 여자는 울음을 삼킨다.

연우는 쌍둥이다. 동우라는 남동생이 있다. 둘다 고등학교 3학년이지만 생활은 무척 다르다. 연우는 성적이 우수하다. 부모처럼 살고 싶지 않은 연우는 열심히 공부한다.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하지만 ‘학교장추천전형’은 스펙이 두툼한 친구에게 빼앗기고 만다.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럽다. 그리고 자신을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부모가 원망스럽다. 동우는 공부에 관심이 없다. 하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 해결책은 충동적이어서 난감한 상황들이 발생한다. 그러나 자기만의 이익 때문에 친구를, 가족을 저버리지는 않는다. 어머니는 몇 년 전에 사고로 죽은 연우의 오빠, 동세를 부여안고 살아간다. 밤바다의 심연에 빠져들듯이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 빠져있다. 오랜 시간 봉급을 받아오지 못하는 아버지는 버스를 운전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다. 노동조합문제로 고민하지만 회사의 회유에 흔들린다. 그 흔들림 속에는 가족이 있다. 아버지가 탄 배는 밤바다의 높은 파도에 마구 흔들린다. 그런데 아버지의 배를 흔드는 파도는 어머니이고 연우고 동우이다.
이 작품은 연우네 가족이 밤바다를 건너는 이야기이다. 작가는 말한다. ‘누구에게나 밤바다는 있습니다. 인간은 각자의 몫으로 주어진 밤바다를 건널 뿐입니다. 때로는 어두운 물밑으로 빠지기도 하고 간신히 다시 올라서기도 하겠지요. 어리다고 봐주는 법 없고 어른이라고 수월한 게 아닙니다. 삶이란 그렇게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엄중하고 냉혹한가 봅니다.’

자신을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부모를 원망하는 연우를 보며 재수, 삼수하던 시절의 나를 만났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대학 입학에 실패했다. 그래서 재수를 했다. 어려운 집안형편에도 불구하고 한번의 기회를 더 가지게 되어 행복했다. 그해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 볼 것을 권하셨다. 오빠도 그 몇 해 전 재수를 할 때 집안 형편을 생각해서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자는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오빠는 교육행정직 시험에 합격을 했고 역시 아버지의 권유로 야간대학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그런 오빠처럼 나에게도 공무원 시험에 응시할 것을 제안하셨다. 그래서 나도 교육행정직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을 했다. 언제 발령이 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더 열심히 공부했지만 그해도 역시 대학 입학에 실패했다. 삼수하던 해에 발령이 났다. 작은 시골 초등학교에서 근무했다.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내가 맡은 업무보다는 종이 울리면 교실에 수업하러 들어가는 선생님들을 부러워하며 지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입시 공부를 했다.
대학 원서를 써야 할 날이 다가왔다.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학력고사 시절이라 원하는 학교에 원서를 넣고 그 학교에 가서 시험을 쳐야 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오빠처럼 공무원 생활을 하며 야간대학에 진학할 것을 권하셨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교단에 서는 일이었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 일을 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와 대화를 하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남편과 딸의 갈등으로 인해 어머니는 무척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원서를 쓰는 날, 내가 졸업한 학교에 다니고 있던 동생에게 부탁을 해서 원서를 써왔다. 물론 아버지와는 상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내가 원하는 학교에 가서 원서를 넣었다. 아버지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되셨다. 잠든 척 하고 있던 나에게 아버지는 “그렇게 하고 싶었나? 그래, 한번 해보자.”하고 힘없이 말씀하셨다. 그때 아버지의 표정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 음성은 보였다.

밤바다를 힘겹게 건너는 스무살의 나를 조용히 바라보는, 어른이 된 나가 있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때 아버지는 이런 마음이셨구나. 공장에서 대량으로 멋진 기성복이 나오는 시대, 더 이상 양복 짓는 일은 희망이 없어보였다. 양복점은 가게세만 부담하고 있었다. 생활은 점점 힘들어지고 아이들 교육비로 돈이 많이 필요한 시기였다. 어머니께서 포장마차일, 전화기 소독하는 노동일로 생활비를 벌었다. 하지만 점점 빚은 늘어갔다. 다행히 첫째인 아들은 아버지가 들려주는 집안 상황 이야기를 듣고 진로를 바꿨다. 공무원이 되었고 이 일을 계속하며 야간대에 진학하기로 했다. 그러나 둘째인 딸아이는 막무가내였다. 재수할 때는 서울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결국 아버지는 손을 들었다. 대학 등록금도 막막한 상황에, 서울 생활에 필요한 돈은 도대체 어떻게 마련을 해야 한단 말인가. 결국 딸아이는 중간에 대학생활을 포기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리고 삼수하던 때에는 좋은 직장을 버리고 교사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도전을 하겠단다. 집안 상황을 고려해서 진로를 바꾼 아들과 의학 공부를 하고 싶지만 집안 형편을 생각해서 간호사관학교로 진학하려는 동생과는 다른 선택이 아버지에게는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 시절 아버지가 되뇌었을 고민들이 어른이 된 나에게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밤바다를 바라본다. 오래 전 내 기억 속에 있던 밤바다에는 홀로 파도와 싸우며 노를 젓고 있는 내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보인다. 내가 올라탄 파도보다 훨씬 높은 파도 위에 아버지의 배가 떠있었다. 그 배 위에서 아버지는 있는 힘을 다해 노를 붙들고 버티고 계셨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때의 격렬한 파도는 사라졌지만 아버지께서는 아직까지 검은 밤바다를 묵묵히 건너고 계신다.

응답 1개

  1. 고영희말하길

    고통이 없는 듯 살아가기도 했어요.
    고통과 싸우려고도 했어요.
    고통을 피하려고도 했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고통에 직면하고 견뎌내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보게 되었어요.
    저에겐 아직도 풀어야할 과제이지만…
    박선생님에게서 그런 아름다움을 봅니다.
    우연히 접어든 골목길에서 눈길을 끄는 집들의 담장을 넘겨보다
    지난 겨울을 견딘 목련의 꽃눈을 보며 뭉클하고도 반가웠던 것처럼
    저는 요즘 흐뭇함을 느낍니다.
    세상이 좀 살만하다고도 느낍니다.
    고통이 나에게 상처만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간절하던 평온한 자유를 준다는 것도 어렴풋이 느낍니다.
    모두 현장에서 묵묵히 견디며 세상의 저항에도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않는 박선생님과 같은 고마운 분들 덕분입니다.
    오늘도 선생님의 담담한 말씀들 가슴에 담아가며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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