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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역 사태와 방역의 생명정치학

-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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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역이 발생하여 “가축들의 보호를 위한” 대대적 학살처분을 시작한지 100일이 되었다. 2010년 11월 29일 안동에서 발생한 이래 2011년 3월 7일까지 소 15만9백 마리 이상, 돼지 330만9천5백 마리, 염소 7천5백 마리, 사슴 3천2백 마리 등 350만 마리의 가축이 구제역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죽어야 했다. 아직도 학살처분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래도 매일 5만~10만마리씩 죽이다가 이제는 매일 1만 마리 정도 죽이는 수준으로 감소했다고 하며, 그래서 어느 정도 진정되어 가고 있다고 보는 모양이다. 여기에 조류독감 때문에, 역시 “가금류의 보호를 위해” 학살한 가금류 550만 마리를 더하면, 3개월 사이에 900만 마리의 가축들이 학살된 것이다.

조류독감과 구별하여 구제역만으로 계산을 해 보아도, 당시 백신접종 대상이 되었던 가축, 즉 한국에 있던 소 돼지 등의 가축 수가 1300만이었다고 하니, 구제역 방역을 위해 학살한 소 돼지 등의 비율은 전체 가축의 약 27% 정도가 된다. 4마리 중 한 마리를 죽인 것이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숫자인가! 이 어이없는 엄청난 학살이 학살로 인식되지 않을 뿐 아니라, ‘어이없음’ 또한 인식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사람 아닌 가축, 사람들에게 ‘고기를 대주기 위한 것’들의 숫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피해의 거대함과 심각함을 오직 축산업의 기반파괴나 3조에 달하는 세금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은, 이 거대한 피해조차 그 학살로 인해 ‘인간’들이 입은 피해로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계산 아닌가!

만약 이 정도의 규모로 사람이 죽었다면 어땠을까? 아직 ‘원인균’이 발견되기 이전의 거대 전염병들을 여기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의 가장 끔찍한 전염병이었던 콜레라의 경우, 가령 1831년의 프랑스 파리시민의 사망율은 16% 정도였다고 한다. 이번 구제역으로 인해 죽은 가축의 비율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작은’ 비율이다. 인간들의 전염병 가운데 이번의 구제역으로 인해 죽은 가축의 비율과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이었다고 하는 중세 유럽의 페스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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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0년 유럽에서 페스트가 처음 창궐했을 때 페스트로 인한 사망률은 약 30%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지역에 따라 달라서 북부독일이나 잉글랜드는 20% 정도였던 반면, 이탈리아나 프랑스 남부 지역 등에선 80%에 이르는 곳도 있었다고 한다. 40만마리를 더 죽여서 390만 마리를 죽이게 된다면, 30%의 사망률이라는 이 페스트와 맞먹는 비율에 이르게 된다. 모를 일이다, 아직도 매일 1만 마리 이상의 계속 학살되고 있으니, 이 비율에 정말 근접하게 될 지도.

그러나 이번 구제역 사태가 페스트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페스트가 세균에 의해 인간이 죽어간 것과 달리, 이번 구제역 사태는 세균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 그 거대한 수의 동물들이 죽어갔다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페스트가 세균의 직접적인 ‘공격’에 의해 죽어갔다면, 이번 구제역에서는 세균에 의한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죽어갔다는 점 또한 덧붙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전자가 자연적인 사태였음에 반해 후자는 ‘인간적인’ 사태였고, 전자가 의학적 지식의 부재로 인해 죽음이 그처럼 거대하게 확대되어 간 것이라면, 후자는 바로 의학적 지식에 인해 죽음이 그렇게 거대하게 확대되어 간 것이다.

‘방역’을 위한 조치 또한 페스트의 경우와 비교할 만하다. 페스트의 경우 전염을 저지하기 위해, 무엇보다 감염자인 인간을 집에 가두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이는 감염자가 있는 마을 전체를 가두고 감시하는 체제를 통해 가동되었다. 마을의 출입을 금지한 것을 물론, 감염자가 있는 마을은 각자를 집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고, 감시자가 집의 창문으로 얼굴을 드러나게 하여 ‘점호’를 하면서 사망가가 있는지, 새로운 감염자가 있는지 여부를 아침저녁으로 확인했다. 즉 전염의 이유는 모르는 채 오직 ‘전염되는 것 같다’는 추측만이 있었기에, 출입이나 이동을 차단하고 살아남을 때까지, 아니 죽을 때까지 가두어 두고 감시하는 통제의 방식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구제역 또한 기본적으로 가축은 물론 사람들의 이동이나 출입을 차단하는 방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는 페스트의 통제체제와 유사했다. 물론 병원균에 대한 의학적 지식이 있었기에, 소독과 백신 등 의학적 조치들이 더해지긴 했지만, 백신은 ‘경제적 이유’(수출에 유리한 ‘청정국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제 때에 사용하지 않았고, 소독은 전염의 실질적인 매개자인 인간이었기에 대강했을 뿐이다. 대신에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가축들을 방역조치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가축은 어차피 사람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반면 사람과 달리 감염된 것은 물론 아직 감염되지 않은 것도 죽이는 것을 포함한 모든 ‘처분’을 행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전염을 막기 위해 감염체가 있는 곳의 ‘인근’에 있는, 즉 감염의 위험이 있는 모든 가축들을 죽이는 것으로 전염을 저지하고자 했다. 하여, 처음에는 감염체의 주변 반경 3km에 있는 모든 가축을 살해함으로써 바이러스의 이동을 저지하려 했다. 반경 3km,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지점에서 반경 300m 정도의 원을 그리면 내가 있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전체가 그 안에 들어온다. 가축을 사람으로 치환해서 말하면, 내가 감염되었다는 게 알려지는 즉시, 이 대학 안에 있는 사람은 전부 죽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3km가 아니라 300m다. 반경이 10배로 늘면 면적은 100배 늘어난다. 아마도 노원구 전체가 그 반경 안에 들어가게 될 것 같다. 내가 감염자임이 판명된 순간, 노원구 전체 주민이 이른바 ‘살처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서울의 각 구 마다 두세 명의 감염자가 발견되었다면, 서울 시민 전체를 ‘살처분’하게 되는 방식, 그것이 초기에 방역당국이 구제역을 ‘저지’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죽이는 가축의 수가 너무 많아지면서 “이러다간 가축 다 죽이겠다”는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자, 나중에 그 반경을 500m로 줄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도 반경 500m다! 한 사람의 감염자가 한 두개 동에 있는 사람들 전체를 죽이기에 충분한 거리인 것이다! 결과는 페스트와 동일했다. 전염은 저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또 다른 것은 페스트가 환자들만 죽었다면, 구제역은 실제로 감염되지 않았지만 죽어야 했던 것이 감염된 가축의 몇 천, 몇 만 배에 이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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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역을 그냥 전염되도록 방치했다면 어땠을까? 사실 구제역에 감염된 가축들 대부분은 죽지 않는다. 어린 새끼들의 경우에는 죽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성체는 대부분 죽지 않고 회복된다. 체중감소를 겪기도 하지만 그것도 몇 달후면 회복된다. 따라서 구제역을 그대로 방치했다고 해도, 350만 마리가 감염되었을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감염되었다고 해도 실제로 죽는 가축의 수는 35만, 아니 3만5천 마리도 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번에 구제역으로 인해 죽은 가축은 대부분이 ‘방역’으로 인해 죽은 것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방역이야말로 구제역으로 인한 대대적인 죽음의 가장 중요한 이유였던 것이다!!

그대로 두었다면 구제역은 아마도 전국으로 확산되었을 거고, 많은 가축들이 병을 앓았을 것이며, 와중에 죽는 것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몇 달, 시간이 지나고 나면 대부분은 병이 나앗을 것이고, 줄어든 체중도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왔을 것이며, 부었던 고환도 멀쩡해졌을 것이며, 줄었던 젖소의 젖도 다시 되돌아왔을 것이다. ‘구제역에 감염된 적 있는 고기’라는 딱지 붙은 것 말고는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을 것이다. 가축을 팔아먹는데는 손해를 야기하지만, 소 돼지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는 딱지 하나. 사실 병에 걸리지 않았던 인간이 어디 있으며, 병에 걸리지 않았던 가축이, 생물이 어디 있던가. 병에 걸린다는 것이야말로 생명체의 본질적인 특징 아닌가? 또한 병 없는 세상이 어디 있단 말인가? 구제역이든 무엇이든 병은 다시 발생하게 마련이다. 문제는 있기 마련인 그 병과 함께 살아가는 것일 게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병에 걸리는 것은 역으로 다시 그 병이 돌아왔을 때 살아남는 길일 것이다. 병에, 구제역에 걸렸다 나으면, 거꾸로 그 병에 대해 면역력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 식으로 생명체들은 자신의 생명을 강화하고 지속해가는 것 아닌가?

그러고 보면 병을 ‘막는다’는 방역이란 미명 아래 이처럼 병에 걸린 것, 걸리지 않은 것을 대대적으로 학살하는 것처럼 어이없고 반어적인 것도 없다. 이는 마치 병고를 견디며 자신의 생명력을 키워가는 생명체와 반대로, 병고를 방지하고 막겠다는 목적으로 생명 아닌 죽음을 선고하는 심술궂은 죽음의 신 같다. 그렇지만 우리는 방역이라는 말에 아무런 반감도 갖지 않고 있다. 방역의 실패, 방역의 부재에 대해 비판할망정 방역이란 관념에 대해서는 어떤 근본적 이견도 갖고 있지 않다. 이는 구제역이나 조류독감 같은 동물들의 전염병만이 아니라 ‘신종 인플루엔자’나 최근 되돌아온 결핵 등과 같은 인간들의 질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방치되었을 때 이상으로 대대적인 학살과 죽음을 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역에 대한 발상이나 방역을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아니 오히려 제대로 된 방역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좌우를 막론하고 어디서나 하는 비판적 주문이다. 방역을 위해 가축을 죽이는 것, 즉 ‘살처분’이란 방법 자체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하는 일은 일어날 것 같지 않다. 이미 대만이나 영국 등에서 처참한 동물들의 살처분이 있었음에도 이번에 다시 반복되었던 것처럼. 살기 위해, 혹은 살리기 위해 방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방역을 위해 대대적인 죽음(죽임!)마저 불사하는 이런 태도를 보면, 우리는 마치 ‘방역’이란 조치에 홀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방역이란 이름에 현혹되어 생명과 죽음을 농단하는 어이없는 조치들에 대해서조차 근본적으로 의문을 던지는 법조차 잊어버린 것 같다.

방역을 수행하는 ‘위생당국’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더더욱 그렇다. 예전에 중국에 사스가 유행했을 때, 누군가 북경의 한 유학생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북경대 기숙사에 살던 그 유학생은 어느날 저녁 친구와 만나 저녁을 먹기 위해 운동복에 슬리퍼 차림으로 외출을 했다고 한다.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고 나서 귀가를 했는데, 바로 그 때 사스에 대한 경보가 발령되어 대학을 비롯한 모든 공공장소의 출입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유학생은 그날 기숙사에 들어갈 수 없었고, 이후 사스가 진정되어 경보가 해제될 때까지 이주일 가량을 운동복에 슬리퍼차림으로 친구집에서 기숙해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 황당한 상황의 자신이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기숙사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꼬박 이주일 동안 밖에 나오지 못하고 갇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얘길 들으면서, 그 동안 항의한 사람은 없었는지 물었다. 짐작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지만, 역시 어리석은 물음이었다. 이유를 불문하고 모든 출입을 중단시킨 그 조치에 대해 단 한 사람도 항의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경찰이나 군대가 출입을 그처럼 봉쇄했다면, 항의와 저항이 없었을 리 없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의 항의는 늘어갈 것이고, 저항적인 행동이 시작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위생당국이 방역의 목적을 위해 취한 조치에 대해선 아마 어디서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건 ‘나’의 생명, ‘나’의 건강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위생권력은 군대나 경찰 이상으로 사람들을 지배하고 복종시키는 권력을 갖고 있음이 틀림없다. 저항조차 생각하지 못할 그런 권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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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방역이란 말 앞에 이처럼 무력하고 의존적이게 만들었던 것일까? 푸코가 보여주었던 것 같은, 근대의 의학적 권력에 대한 사람들의 복종과 별도로, 방역이란 배치에 사람들이 저항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보다 파스퇴르나 코흐에 의해 이루어진 ‘병균’의 발견이었다고 해야 한다. 오염된 대기 등(‘미아즈마’)에 의한 것인지, 전염에 의한 것인지를 둘러싸고 벌어지던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 알다시피 그 발견이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세균이 있으며, 그것이 ‘나’에게 치명적인 어떤 병을 옮긴다는 것은 너무도 두려운 일이었다. 파스퇴르 자신 또한 타인과의 악수조차 꺼려할 만큼 두려워했다. 이는 지저분한 슬럼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와 콜레라를, 더불어 성병까지 하나로 묶어 다루고자 했던 이른바 ‘위생개혁가’들의 운동에 더할 수 없는 이론적 원군을 제공했다.

그것은 좀더 나아가 질병에 대해 군사주의적인 형태의 일반적 모델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보이지 않는 병균들이 우리의 신체에 침입하고, 면역세포들이 그것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이는 것이 우리의 면역체계라는 관념이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 약화된 병균을 투입하여 적에 대항하는 아군(항체)의 수를 늘리고 전쟁연습을 적절히 수행하면, 그 병을 퇴치할 수 있다는 해결책까지 더해지고, 그러한 병의 예방과 관리가 국가권력의 중요한 과제로 자리잡게 되면서, 위생은 경찰의 또 하나의 축이 되었고, 방역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 권력을 획득하게 된다. 그것은 근대권력의 요체를 구성하는 생명정치의 중심적인 배치를 형성하게 된다.

사실 수많은 반증들이 있었다. 백신이란 방법을 발견한 후에도, 백신이 실제로 질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한 효과는 통계적으로 무의미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위생경찰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20세기초 독감으로 인해 이전에 콜레라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방역을 위한 조치들은 무효하거나 무력했다. 하지만 방역과 위생권력에 관한 한, ‘반증가능성’의 원리는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문제는 언제나 ‘제대로 된 방역’이었을 뿐이다. 사실 제대로 된 방법이 없다고 해도, 병의 확산이나 감염을 저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반박할 순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희생을 치른다고 해도, ‘나’와 나의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에 대해 방어하고 대항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반박할 수 없는 자명한 관념이었던 것일 게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느끼는 공포감,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는 물에 빠진 사람의 심정 같은 것이었을 게다. “그럼 어쩌자는 거야!” 지금의 구제역처럼 어이없는 방역에 대해 의문이라도 제기하려 할 때, 그 모든 의문을 막는데는 이 한마디로 충분하다.

그러나 가축들에겐 마치 ‘감기 같은 질병’인 구제역을 막기 위해, ‘방역’이란 이름으로 350만의 가축들을 학살한 사태 앞에서 우리가 정작 던져야 할 질문은 ‘방역’ 자체를 향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 방역보다는 그냥 병을 앓는 것이 낫지 않을까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 병을 통해 우리 자신의 능력을 확장하는 길도 있지 않은가 물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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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군사주의적 모델에서 벗어나 ‘면역’이란 개념을 생각해본다면, 면역능력이란 외부에서 침투해오는 병균과의 대결이라기보다는 그것들과 공존하고 공생하는 능력이라고 해야 한다. 면역능력은 외부적인 균의 부재에 의해 정의되는 게 아니라, 외부적인 균과 공존하는 능력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외부적인 균이 없는 신체처럼 면역력이 약한 것은 없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반대로 외부에서 침투했지만 나의 신체와 공존하면서 역으로 면역기능을 제공하는 세균 등을 지칭하는 ‘노말 플로라(normal flora)’는 유기체의 면역체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일부분이다.

이런 점에서 면역체계와 면역능력을 구별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능력으로서의 면역이 이질적인 외부와 공생하는 능력이라면, 그런 능력의 한계지점에서 구성되는 것이, 다시 말해 무능력한 지점에서 외부의 이질성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는 메커니즘을 면역체계라고 정의해야 한다. 역으로 내게 침투하여 ‘기생’하려는 세균이나 외부자들 역시, 나라는 숙주를 공격하여 죽이기 위해서 아니라 나의 신체를 이용하여 살기 위하여 침투하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기에 그것들이 야기하는 치명성은 그것들이 아직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시간이 지나고 적응하게 됨에 따라 독성이 완화되어 간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병이란 상이한 생명체들이 만나 죽고 죽이며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서로를 이용하며 함께 살기 위해 서로 적응해가는 과정 속의 한 국면임을 이해해야 한다.

군사주의적 관념에서 벗어나 본다면, ‘백신’이란 현상이 가르쳐주는 것은, 전쟁연습을 통해 우리가 적을 이기는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적절하게 조절된 만남은 이른바 ‘병원균’과도 공존가능하게 해 준다는 것, 병원균조차 피하고 배제하려 하기보다는 공생가능한 만남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 아닐까? 그렇기에 병을 막고 차단하려는 방역과는 다르게, 병과 만나는 적절한 방식, 병을 겪으며 살고 병에서 좀 더 나은 생명의 기술을 찾아내는 방법을 배우려는 그런 태도의 전환 같은 게 필요한 게 아닐까? 그게 지금 구제역 사태가, 방역이란 이름의 거대한 학살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응답 3개

  1. 기역말하길

    볼온한것들의 존재론을 읽으며 이 시대에 태어나 하루에 수십명씩 자살하는 죽음에 대하여 자살을 꿈꾸며 자살사이트를 헤매는 존재들에 대해 교수님이라면 할 말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들의 죽음을 붙드는 끈이 될 것 같아서요. 사회학자로서 책무가 아닐까 하면서요.

  2. 비니말하길

    위생권력, 방역, 병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 잘못된 상식과
    뒤집어진 상식, 그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였습니다.

  3. 은유말하길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방역;; 정말 몹쓸 위생권력입니다. 병에서 더 나은 생명의 기술을 찾는 태도의 전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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