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노동잔혹사

개팔자

- 김민수(청년유니온)

상어연골, 소고기 등심, 참치 뱃살 등을 곱게 다지고, 각 재료별 레시피에 따라 조리공정을 거쳐 배합한다. 이 때 배합의 비율이 굉장히 중요하다. 사소해 보이는 배합의 실수가 크나 큰 맛의 차이로 드러난다. 역시, 맛의 세계는 깊고 오묘하다.

특급 호텔 레스토랑 주방장의 중얼거림이 아니다. 서울에 위치 한 어느 ‘Dog-Rice-Factory’, 다시 말해 ‘개밥 공장’에서 근무하는 파트타이머의 중얼거림이다. 인류로 태어 난 나조차 연중행사로 시식하는 소고기와 참치. 뿐만 아니라, 그런 게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상어의 연골 요리를 부잣집에서 길러지는 견(犬)들은 수제 간식으로 드신단다. 밥도 아니고, 간식으로. 인간의 세계나, 견공의 세계나 별 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길바닥에서 떠도는 유기견들은 ‘개새끼’가 되고, 운 좋게 부잣집 도련님에게 간택 된 순종 애완견은 ‘개님’이 된다.

삼신할머니 랜덤은, 인간 뿐 아니라 견(犬)들의 삶 또한 결정적으로 좌지우지한다.

한국사회에서 삼신할머니 랜덤이 가지는 영향력은 너무도 막강하다. 금 숟가락 물고 태어 난 인간이 그들의 행운에 근거하여 실존과 생존을 손쉽게 가꾸어 나가는 동안, 그렇지 못한 하등 인류들은 남은 밥과 김치가 없어서 생존을 빼앗기거나, 남은 꿈이 없어 실존을 빼앗긴다. 인간만 그러한가? 금 숟가락 물고 태어난 견공이 그들의 안락한 생존과 문화생활을 가꾸어 나가는 동안, 그렇지 못한 하등 유기견들은 ‘몇 마리’가 아닌 ‘몇 인분’으로 계산 되어 버리는 비극 속에 다음 생을 준비한다.

개들의 운명에 대한 사회과학적 고찰은 잠시 미루고, 순종 애완견의 수제간식 제조 공정을 진행하고 있는 파트타이머에게 눈길을 잠시 돌려보자. 올 해로 28세를 맞이 한 그는 청년유니온 조합원이다. 재기넘치는 유머와, 일상 속에서 구사하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순식간에 유니온의 스타로 도약한 위인이랄까. 누님들의 아이돌이 되겠다는 선언은 괜한 소리가 아니다. 넘치는 유머감각 만큼이나 삶도 유머러스하고 즐거운 전개였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학자금 대출과 가계부채에 동시에 책임을 진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저당 잡혔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사실, 누구에게 저당 잡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 은행? 자본? 대학? 신자유주의? 이명박? 누구든 중요한 건 아니다. 아무튼 그가 누려야 할 삶은, 그의 지향과 통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개 같이 번 돈을, 개 같이 갚는다. 이렇게 몇 년. 나같이 나약한 존재는, 필히 절망하고 헤어 나오지 못 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절망까지 품어 안으며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에게는 꿈이 있다.

‘공부를 다시 하여, 교육을 전공하고, 아이들을 가르친다.’

단 한 줄로 요약되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꿈이다. 사막의 실존이 오아시스라면, 상처 입은 그의 실존은 찬란한 꿈이다. 애석하게도, 이 절망스러운 세상은 그의 실존을 용납하지 않는다. 학업과 생계의 병행이라는 극한의 조건에서 자기 자신에게 승리하고, 함께 전공하는 동생들과의 경쟁에서 또 한 번 승리하고, 아이들을 사랑으로 품어 안는 참 된 스승의 존재를 전적으로 차단하는 이 더러운 세상과의 경쟁에서 다시 한 번 승리해야 한다. 승리하고, 승리하고, 또 승리해야 한다. 단 한 번의 패배는 탈락과 낙오로 직결 된다. 중도에 낙오한 이들에게는, 다시 꿈 꾸고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지 않는다. 그의 소박한 실존은, 이렇게 험난하다. -학업과 생계를 병행하기 위한 그의 수 많은 노력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호흡 가다듬고 실존이라는 오락실에 동전을 넣었는데, 1탄에서 패배한 것이다.

실존을 빼앗긴 그는 지금 이 순간, 순종 애완견을 위한 수제 간식을 만들고 있다.

실존의 상실에 절망하였다가는, 생존마저 빼앗기고 만다.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에휴.

꿈과 밥, 실존과 생존이 양립할 수 있는 세상을 만나고 싶다.

생존을 잃은 상태가 죽음이라면, 실존을 잃은 상태 또한 인류에게는 죽음이 아니던가…

p.s_

거대한 상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실존은 유효하다.

그가 새로운 용기를 내어 고용지원센터에 방문한 것이다.

내가 틀렸다.

응답 1개

  1. cman말하길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인간들이 불공평하게 살도록 정해진 것을 우리가 너무 욕심내는 것은 아닐까요?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한데 정신을 차려보면 제가 모두가 같은 생활, 같은 대접 받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을 봅니다. 그저 상식을 원하고 있을 뿐입니다. 재기있는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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