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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9번째 교향곡 ‘합창’

- 나무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ängler)라는 지휘자가 있다. 1886년에 태어나 1차, 2차 세계대전과 나치 하의 독일을 겪고 1954년에 죽었으며, 베토벤 이후의 독일 음악의 계보를 잇는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 ~1949)나 구스타프 말러와 동시대를 산 인물이다. 쇤베르크가 1899년에 현악 6중주 ‘정화된 밤’을 작곡한 것이 1899년이었으니 소위 말하는 현대음악 역시, 막 잉태되고 있던 시대였다.

그가 지휘자로서 인정을 받으며 베를린 필에 입성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나치가 세력을 얻게 되었다. 많은 유태인 음악가들은 여기저기로 망명을 했고, 유태인은 아니지만 나치에 동조하지 않는 음악가들도 자유로운 작품 활동을 위해 망명을 택했다. 하지만 푸르트벵글러는 남아있었다. 그는 자신이 독일 문화를 수호하고 나치에 반대하는 독일 국민에게 위로가 되고자 남아 있었다고 주장했다.

(푸르트벵글러가 베를린 필과 함께 베를린의 한 공장에서 점심시간에 바그너를 연주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푸르트벵글러는 순수아리아인이었고 이미 영향력이 상당한 유명인사였으므로, 나치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1934년에 동료 작곡가 힌데미트(Paul Hindemith)가 작곡한 “화가 마티스”라는 작품을 지지하다가 모든 공직에서 사임하게 되었고, 후에 다시 베를린 필로 복귀할 때는 이미 나치에 항거할 힘을 잃을 상태였다. 그는 자신의 음악활동은 정치와 별개라고 주장했지만, 그의 복직을 다시 추진한 괴벨스는 노골적인 문화선전대로 알려져 있다.

(1942년 히틀러의 생일 전야제 연주. 1분 27초쯤에 보이는 왼쪽에서 세 번째 남자가 괴벨스이다. 마지막에 푸르트벵글러와 악수하는 사람으로 추정)

전시에도 그의 공연에는 항상 많은 사람이 꽉꽉 들어찼다. 히틀러와 그의 관료들 뿐 아니라, 지하의 레지스탕스들 역시 나치에 정신적으로 대항하는 길로 공연장을 찾았다. 히틀러의 암살을 계획하던 사람들도 그의 공연장을 비밀 회합의 장소로 삼았다고 한다.

전쟁이란 극한 상황 속에서도 연주회 입장권은 발매되기가 무섭게 매진되었기 때문에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은 하루에 두 번을 연주하기도 했다. 그 당시의 실황 녹음이 음악에 대한 나치의 기이한 열정 덕분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나치는 포로수용소에서도 포로들끼리의 오케스트라를 조직했다) 복각된 그 연주들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집이 불타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폭격으로 눈앞에서 죽어 나가는 상황, 각종 물자 부족으로 끊어진 현을 살 수도 없는 상황’에도 아랑곳없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훌륭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1942년 전시 녹음. 합창 4악장 마지막 4분)

1942년경의 베를린 필과 푸르트벵글러의 합창 연주는 음울한 분위기를 풍긴다. 비평가들은 이 합창이 ‘진노의 날’(미사 음악 중 한 장르. 다가올 종말에 대한 예언이 내용이다)에 가깝다고 한다. 이런 식의 연주는 합창의 일반적 해석과는 많이 다를 뿐 아니라 푸르트벵글러의 전후 연주와도 전혀 다르다.


1951년 8월 31일 찰스부르크 연주

1942년 히틀러의 생일 전야제 연주 동영상은 그래서 놀랍다. 시쳇말로 예술이 정치의 시녀가 된 자리에 푸르트벵글러의 합창이 있었다. 연주를 기획한 주최측로서는 이 연주가 히틀러의 생일을 축하하고 그의 업적을 칭송하기를 원했겠지만 실상 연주는 우울하고 음울한 종말의 기운을 풍긴다. 이 연주는 연주자의 의도와도 어긋난다. 순수예술주의자였던 푸르트벵글러는 예술과 정치가 분리될 수 있다고, 전혀 별개일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나치 하에서도 국가대표급 지휘자로 남을 수 있었다.

목적을 배반하고 의도를 벗어난 그 날의 연주. 예술이 진리를 드러낸다면 바로 그런 순간이 아닐까. 나는 푸르트벵글러의 합창이 베토벤을 구원하고, 푸르트벵글러 그 자신을 구원한 연주라고 믿는다.

베토벤의 인류의 형제애와 진보에 대한 믿음이 가장 잘 표현되었다고 말해지는 합창 교향곡. 베토벤이 우리 인류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그릴 때, 그 메시지는 현실을 긍정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모두가 형제가 되는 환희의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고 바꿔버리면, 베토벤의 합창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찬미가가 된다. 히틀러가 그렇게 했다. 이길 거라고, 독일 민족이 전 세계를 정복할거라고. 온 인류가 지금, 행복하다고.

오늘날 점잖은 자리에서 멋지게 연주되는 이 익숙한 멜로디,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듣게 된다면, 그것이 원래는 자유의 송가였음을 기억하자. 합창의 가사의 토대가 된 쉴러의 원시 ’환희에‘에서 환희(Freude)는 Freiheit(자유)였다. 지금의 속박과 억압이, 미래의 환희와 동시에 이 노래에 자리하고 있다.  

응답 1개

  1. cman말하길

    한 음악인이 당대를 지내면서 겪을 수 있는 아픔을 알 수 있어서 의미있는 글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형태의 비극과 충돌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 산재되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준비가 많이 부족한 사회에 너무 빠른 변화로 초래된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몰상식과 부조화를 극복하는 길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하는 글 감사합니다. 작지만 의미있다고 또 옳다고 생각하는 일부터 하나하나 실행 할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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