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3호] <앞산展>(김지현, 2009)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씨네꼼

<앞산展>(김지현, 2009)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에서, 2차선 도로로 40분을 달리면, 지르매재 넘어 내촌면이다.” 영화는 강원도 산골 마을의 한적한 모습과 그 위로 들려오는 감독의 푸근한 ‘이야기’로 이루어진, 짧은 프롤로그로 시작된다. 그곳엔 지어진지 50년이 넘었고, 언젠가부터(정확히 말하자면, 날아온 씨앗이 싹을 틔워 작은 나무가 되는 세월 동안) 마을의 비료창고로 쓰이고 있었으나, 이제 ‘아트플레이스 내촌창고’라는 미술관으로 살아가게 될 ‘내촌 농협창고’가 있다.

그곳에서 첫 전시회를 하게 된 작가는, 화가 이진경이다. 9년 만에 하게 된 화가 이진경의 개인전, 2007년 가을에 열린 그 전시회의 이름은 ‘앞산展’이다. 영화는 그곳에서 전시된 작품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은 또한 화가 이진경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녀의 삶과 작품들이 너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녀에게는 삶이 곧 예술이기 때문이다. 결국 <앞산展>은, 같은 운명을 살아온 작가와 작품, 그리고 그와 같은 운명을 함께 살아가게 될 공간에 대한 ‘이야기’다(앞산展 = 앞산傳 = 진경傳 = 창고傳).

화가 진경은 포천에서 12년을 살았는데, 2002년 봄 불이 나서 작업실을 모두 태웠다. 실의에 빠진 그녀가 다시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어느 날 “가진 게 뭐가 있나 생각해 봤어. 그랬더니, 탄 집을 갖고 있더라고. 다른 사람은 안 갖고 있는 탄 집을 갖고 있는 거잖아.”

그녀는 갖다 버렸던 타다 남은 물건들을 다시 줍고, 씻고, 말린 다음, 그것들로 작품을 만든다(‘불 탄 천’ 연작). 그녀는 타다 남은 물건들을 타고 남은 천 조각들로 둘둘 말아 ‘색동공’을 만들면서, 그 작업을 ‘장사(葬事)’라고 부른다(“이것들로 위로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녀는 살면서 버리는 게 하나도 없다. 타다 남은 책들은 ‘겹겹이’ 배접되어 ‘첩첩산’을 그리는 화판이 되고, 헌 양말과 라면 봉지는 ‘꽃’이 된다. ‘완전연소’가 그녀의 삶의 방식(윤리)이자 예술적 방법(미학)이라면(“똥이 없는 작업이 좋은 작업”), “꽃이 아닌 게 어디 있으랴”는 그런 윤리와 미학의 바탕을 이루는 그녀의 감각이다.

젊은 시절 우연히 찾은 묵호항 근처에서 우연히 마주 친 ‘바다횟집’의 간판(“생활하면서 필요해서 또박또박 쓴 글씨”), 그녀는 그곳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 이후로 지속된 그녀의 ‘글씨작업’은 그때 받은 선물에 대한 일종의 보답이다. 그녀의 ‘글씨작업’은 작업(예술)과 일(생활)의 경계를 넘나든다. 때론 필요한 사람들에게 직접 써주기도 하고(‘내촌 철물점’), 때론 필요한 사람들이 직접 쓰게 만듦으로써, 그 아름다움의 비밀을 그들에게 되돌려 준다(인사동 공예백화점 ‘쌈지길’에 입점한 가게들의 간판).

진경의 소망은 ‘일(노동)’ 안하고, ‘작업(활동)’만 하는 것이다. 그녀는 내촌에 새로운 작업실을 짓느라고 빚을 졌고, 그 빚을 갚기 위해 ‘쌈지길’ 아트디렉터로 ‘일’을 하게 된다. 그녀에게 그 기간은 ‘태어나서 가장 힘든 시기’였고, 실제로 몸에 ‘병’도 생긴다. 고된 ‘일’, 도와주지 않은 지인들에 대한 섭섭함, 계속 ‘작업’을 하면서 ‘전시’를 하고 있는 동료들에 대한 부러움. 이렇게 혹독한 시기를 거쳤지만, 그녀의 삶에 대한 태도와 예술 방법론에는 그다지 큰 변화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팔려고 노력을 안 해서 그렇지 팔려고만 들면 잘 팔릴 것’이라 믿었던 자신의 작품이 실제로 잘 안 팔린다는 사실을 새삼스러이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그녀는 그 뼈저린 깨달음을 “내 작품의 경쟁자가 벽걸이 평면 TV”라는 사실의 깨달음이라며, 그렇게 가볍게 웃어넘긴다. 그녀에게 ‘삶과 예술’이 하나라면(‘不二’), 그것은 그녀에게 ‘삶과 생활’이 이미 하나이기 때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몸이 ‘일(노동)’에 그렇게 심하게 저항한다면, 그것은 ‘생활과 예술’이 이미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이 냉엄한 ‘상품의 시대’에 적응하기 힘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모의 땅’에서 자신의 생활과 삶과 예술의 영토를 꿋꿋이 개척해 가고 있는, 어떤 하나의 ‘시뮬라크르’이고, ‘유목민’이다. 척도에 저항한다기보다는 그 척도를 유연하게 비껴가는 특이한 ‘시뮬라크르’, 버려진 땅에 달라붙어 삶과 예술을 개척해가는 진정한 ‘유목민’, 그렇기에 그녀는 진정 ‘반시대적 예술가’다.

척도를 비껴서있는 그녀의 ‘삶’, 버려진(또는 잊혀진) ‘사물들’, 그 사물들을 재료로 만들어진 그녀의 ‘작품들’은, 그렇게 하나다. 그녀의 버려진 것, 낡고 오래 되어 잊혀진 것에 대한 취향과 감각,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꿈꾸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오래된 미래’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화가 진경의 삶이 그렇게 그림이 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인 <앞산展>에는, 또 다른 많은 삶들(그녀의 예술적 동료들, 내촌면 주민들 등)과의 인연이 담겨있다. <앞산展>의 카메라 역시 그 소중한 인연들 중의 하나고, 그 만듦새 역시 화가 진경의 삶과 작품들을 많이 담아 있다.

감독 김지현은 타고난 ‘이야기꾼’인데, 그것은 그녀의 남다른 잘 ‘듣는 재능’에서 비롯된다(“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기 좋아한다.”). 그녀의 다큐는 언제나 주변의 일상에서 시작되는 데, 그 일상(생활) 속에서 그녀는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에서 새로운 이야기(작품)를 만들어낸다. <앞산展> 역시 그녀가 화가 진경과 함께 공유었던 ‘삶’을 ‘재활용’한 작품이다(실제로 이 영화에는 화가 진경이 찍어 두었던, 불에 타지 않고 남은 과거의 테이프가 ‘재활용’되고 있다). 이 영화는 2009 인디다큐페스티벌에서 ‘관객상’을 받았다. 물론, 상금은 없었다.

– 변성찬

응답 1개

  1. 사비말하길

    달팽이 공방 사람들에게 추천해주셨던 영화가 바로 이거였군요!!!!
    진경 작가도 삶을 재활용하여 작품으로 만들고,
    지현 감독은 그 작가의 삶(작품)을 재활용하여 또 다른 작품으로 만들고,
    변쌤은 다시 그 삶(작품)을 재활용하여 글을 만들고~
    이제 저도 그 글을 읽고 무언가 만들면 되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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