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경계의 논리를 사고할 시간

- 윤여일(수유너머R)

1.

고위인사의 평판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도 있는 편지 한 장이 고급 아파트에서 도난당했다. 도둑이 지목되었다. 그는 장관이다. 그가 편지를 가로채는 장면이 목격된 것이다. 편지는 여전히 그의 수중에 있다. 파리 경찰청이 수사를 맡았다. 경찰청은 장관의 아파트를 샅샅이 뒤졌지만 편지를 찾아내지 못했다. 단지 사설탐정 한 사람만이 경찰청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수수께끼를 간파했다. 그처럼 정교하게 숨겨놓으려면 단순한 방법을 사용했으리라 추측한 것이다.

“장관은 편지를 감추려고 세상에서 가장 교묘하고 가장 일반적인 수단을 사용했다. 그것은 편지를 감추려고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장관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그래서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식탁 위에 놓아둔 것이다.

2.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도둑맞은 편지≫의 이야기 구조는 고통을 대하는 현대인의 태도와 훌륭히 포개진다. 타인의 고통은 텔레비전 화면에서 매일같이 신물나게 접할 수 있다. 그런데 너무나 자주 보면 서서히 보이지 않게 된다. 뉴스들의 경쟁적인 보도 앞에서 충격적 사건은 점차 짤막한 일화로 격이 낮아지고, 처참한 광경은 새로 등장하는 광경에 자리를 내준다.

연일 사건의 다발이 투하되니, 각각의 비극을 상념하고 있을 여유는 없으며, 감정은 점차 휘발성이 짙어진다. 자주 분노하면 분노가 묽어지고, 참담한 일도 일상적이 되면 비극성이 옅어진다. 급기야 피로감마저 느낀다. 그 피로는 불행을 막으려고 노력한 자의 피로가 아니라, 불행의 반복 속에서 질려 버린 자의 피로이다. 타인의 고통을 정보로서 폭식하는 현대인은 그 포만감에 통각이 무뎌진다.

3.

지난 세기에 인간이 저지른 거대한 살육은 인간의 고통에 관해서도 커다란 숫자여야 반응하는 정신의 퇴폐를 낳았다.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킬링필드, 베트남전 등은 우리의 감성을 움직이는 데 치러야 할 대가를 엄청나게 높여 놓았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어떤 사건의 희생자 수를 다른 학살의 수치와 비교하고 있는지 모른다. 죽음의 계산인 것이다. 오늘도 중동의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는 민주화 시위에 관해 뉴스는 죽음의 양을 비교하여 전달해준다. 숫자가 승리를 거두는 곳에서 윤리는 항복하고 있다.

3.

350만의 학살이 있었다. 이번에는 또 어디의 누구인가. 저 가늠하기 힘든 수치는 한국에서 나왔으며,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인간에 관한 수치가 아니다. 구제역이 발생해 3개월간 동물이 그만큼 학살되었다. 저 늘어나는 수치는 불과 한 두 달 전까지는 희생된 동물에 관한 슬픔과 사죄의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이 늘어나 수백, 수천의 학살이 저 거대한 수치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게 될 즈음, 저 수치는 매몰지의 거대한 면적과 침술수의 엄청난 양으로 환산되어 공포의 수치가 되고 있다.

3개월간 매일처럼 행정의 언어로 전장이 묘사되었다. 의심신고, 방역선, 전염속도. 그리고 살처분. 정부는 이번 구제역 사태를 거치면서 처음으로 위기단계를 경계(警戒)로까지 격상하였다. 그리고 구제역 확산을 막기 위해 땅의 이곳저곳에 경계(境界)를 긋고 통제소를 설치해 인간과 동물의 이동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방역선은 뚫리고 매일의 뉴스에서 국토는 점차 빨갛게 물들어갔다. 빨갛게 물든 땅에서는 행정적인 숫자인 반경 500미터 안의 가축들이 살처분되었다.

4.

오늘(3월 7일) 한나라당 정운천은 살처분 돼지 매몰 농장에서 구제역 매몰지 침술수를 퇴비로 만드는 과정을 선보였다. 그는 퇴비의 냄새를 맡고 나서는 “전혀 비린내가 없고 고소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침출수를 퇴비 원료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며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동물은 가축으로 죽어서까지 식량이라는 족쇄를 벗어나지 못했다.

오늘 한겨레신문에는 저러한 행정당국의 안이한 대처를 비판하며 <생매장당한 짐승들의 핏빛 복수>라는 기사를 보도했다. 그러나 거기서 사용된 메타포는 본질적으로 정운천의 감각에서 멀지 않았다. 인간의 아군(자원)이거나 적군(재앙)인 것이다.

5.

구제역 사태는 경계의 논리로 발생했고 진행되었고 묘사되었다. <인간의 소실, 동물의 소실>에서 나온 발상을 빌린다면 동물 중의 일부는 가축으로 분류되었고, 병에 걸린 가축의 일부는 죽여야 할 대상이 되었고, 구제역이 발생한 농장 반경 500미터 안에 있는 가축들도 함께 죽여야 할 대상이 되었다. 경계의 논리는 살생의 기준이었다.

그렇다. 경계의 논리는 중요하다. 따라서 구제역 사태를 성찰하려면, 그 숱한 희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면 경계의 논리를 사고해야 한다. 그리고 경계에 대한 사고는 행정당국이 땅 위에 그어놓은 방역선을 넘어 더 깊은 경계에까지 닿아야 한다.

<구제역 사태와 방역의 생명정치학>에서 필자는 말한다. 경계의 논리는 군사주의적 방역체계를 논리적으로 뒷받침하였고, 그것이 생명정치의 중심적인 배치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공존의 법칙>의 필자도 지적하고 있다. 인간과 바이러스의 경계를 근본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바이러스는 인간 바깥에서 침입해오지 않는다. 종의 경계를 넘어 바이러스의 변이가 일어나는 것은 도시화와 대량 사육 체제 탓이다. 인간은 바이러스의 배양기 노릇을 하고 있다.

6.

방역선이라는 경계가 무너졌다. 그 동안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의 논리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그어놓은 경계가 효력을 상실하고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경계의 논리가 빚어내는 폭력은 가공해지고 있다.

이번호는 ‘구제역, 마지막 경계가 무너진다’를 제목으로 정했다. 굳이 ‘마지막’ 경계라고 명명한 것은 이번 구제역 사태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제 근본적으로 사고할 시간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구제역 사태에 관해서는 분명 생태학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제 ‘생태학적 성찰’이란 말은 너무나 정신적인 여유를 부리는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인간적인 것의 어떤 종말론을 사고해야 할 시간인지도 모른다. 경계가 무너지는 자리에서 그 진실이 공공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자주 목격하기에 간과하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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