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인간의 소실, 동물의 소실

- 고이즈미 요시유키(小泉義之)씀, 남효진 옮김

보르헤스의 동물분류표

푸코는 ≪말과 사물≫ <서문>에서 “이 책이 탄생하는 장(lieu)은 보르헤스의 어느 텍스트에 있다”고 썼다. “같음과 다름에 관해 천 년간 내려온 관행을 뒤흔들어 잠시 불안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한 그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동물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a)황제에 속하는 동물, (b)향료로 처리하여 박제로 보존된 동물, (c)사육동물, (d)젖을 빠는 돼지, (e)인어, (f)전설상의 동물, (g)주인 없는 개, (h)이 분류에 포함되는 동물, (i)광폭한 동물, (j)셀 수 없는 동물, (k)낙타털과 같이 미세한 털로 된 붓으로 그릴 수 있는 동물, (l)기타, (m)물 주전자를 깨뜨린 동물, (n)멀리서 볼 때 파리 같이 보이는 동물.

이 분류는 뭐가 뭔지 영문을 알 수가 없다. 동물에 대해 뭘 하고 있는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따라서 이 분류표는 ‘사고의 불가능성’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을 사고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인가, 어떤 불가능성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그렇지만 보르헤스의 분류표를 들여다보면 전혀 영문을 모를 것만은 아니다. 사실 실재의 동물과 가공의 동물을 사려 깊게 구별하고 있다. 가공의 동물은 실재의 동물과 다른 장소(place)에 부여되고, 전자가 후자에게 미칠지도 모를 ‘전염력’이 국소화되어 있으며, 양자가 뒤섞이는 것을 배척하고 있다. 따라서 이 분류표에서 ‘기형성=괴물성(monstruosite)’은 그것대로 장소를 부여받고 있기 때문에 “기형성은 실재의 신체를 변질시키지도 상상 속의 동물지를 변모시키지도 않는다.” 어쨌든 기형성은 분류표의 여백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고, 그런 한도 내에서 일정한 장소를 점할 수 있기 때문에 기형성이 “심층의 이상한 힘 안에 숨어있다”는 식으로 생각되지도 않는다. 보르헤스의 분류표에서 기형성이 사고의 불가능성을 가리키지는 않기에 우리는 오히려 ‘천 년 전부터 내려온 관행’을 따라 기형성을 그 이상으로 사고할 수 있다. 가공의 동물을 상상할 수 있듯이 기형의 동물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고 사고할 수 있다. 게다가 지금은 제작까지 할 수 있다. 푸코가 보르헤스의 분류표에서 알아낸 사고의 불가능성이란 무엇일까.

‘전설’의 동물이 사육동물이나 멀리서 볼 때 파리처럼 보이는 동물과 함께 놓여있다. 이런 양자 사이에 있는 약간의 거리(etroite distance)가 불가능한 것이다. 모든 상상과 가능한 모든 사고를 침범하고 있는 것은 바로, 각 카테고리를 다른 카테고리와 묶어버리는 알파벳계열(a, b, c, d)이다.

그런데 알파벳계열이 뭘 하고 있는지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보르헤스의 분류표는 이미 성립된 분류를 순서대로 배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알파벳계열은 단지 배열되어 있다. 열거되어 있는 동물들 사이에는 어떤 관계성도 성립되어 있지 않고 그저 배열되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영문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보르헤스가 그것을 일일이 열거함으로써 순환시키고 있는 기형성이란, (각항의:인용자) 만남의 공통공간이 거기서 붕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가능한 것은 사물들의 근접성이 아닌 사물들이 근접하는 것이 가능한 지형=자리(site) 자체이다.

사물들이 배열되어야 할 공통공간은 불가능하게 된다. 사물들이 배열되는 순서가 더듬어갈 지형도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알파벳계열이 미리 설정되어 있던 공통공간에서 지형을 따를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공통공간도 지형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파벳계열이 지면 위에 동물들을 배열해낼 수 있다는 것이 사고불가능한 것이다. 푸코는 거기서 기형성=괴물성을 감지한다.

이쯤에서 염색체지도 내지 유전자지도를 끌어내보자. 노랑초파리의 제1염색체에서는 일련의 유전자가 황색체, 강모부족, 소안이상……의 순서로 유전자지도가 작성된다. 이 형질들과 유전자는 공통공간에 배분되어 있는 것도, 공통공간에서 지형에 맞춰 차례차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배열되어 있다. 황색체의 유전자자리와 강모부족의 유전자자리는 근접해있는데, 그 근접을 유지시킬지도 모르는 공통공간에서 지형=자리가 해당 염색체에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 노랑초파리 개체에 내재되어 있는가 하면, 교배실험 등을 통한 지도작성의 과정을 볼 때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결국 유전자 형질은 염기수를 지표로 해서 지면에 단지 배열되어 있다. 그리고 사람의 18번째 염색체에서는 형질유전자와 구조유전자가 라미닌, 암 유전자, 부신피질호르몬 수용체, N카드헤린, 다발성경화증……으로 유전자지도가 작성되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다. 유전자배열이나 염기수배열의 ‘같음’이나 ‘다름’을 가지고, 혹은 마스터유전자의 ‘같음’이나 ‘다름’을 가지고 동물들의 원근이나 이동(異同)이나 계통을 말하는 최근의 관행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가 감지된다.

실어증의 경험, 치매의 경험

보르헤스의 분류표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싶을 수도 있다. 단지 순서대로 a, b, c, d 하고 생각나는 대로 배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자의적으로 배열된 말에 지나지 않는다, 혹은 글자 순서만 맞춘 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 말대로이다. 그렇긴 한데, 귀찮게도 그런 말들이 “사고불가능한 공간”을 열어버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르헤스의 분류표와 비슷한 방법을 써서 순번에 맞춰 천황가가 계통을 조사한 닭,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어 죽은 새, 돼지P짱(《돼지P짱과 초등학생32명》에 나오는 돼지:역주), 포뇨, 머리없는 쥐, 화이트가족의 아버지(일본의 소프트방크 광고에 나오는 개:역주)……같은 식으로, 길모퉁이에 서서 말하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아니 그러기는 힘들다. 티비프로그램을 순서대로 보거나 잡지를 순서대로 뒤적이다 보면 바로 깨달을 수 있듯이, 우리 자신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을 집단적으로 협동해서 중얼거리고 있다. 그럼 그때 어떤 영문을 알 수 없는 것이 열려버린 것일까? 푸코는 그것을 묻고 있다.

푸코가 거듭 지적하는 것인데, 보르헤스의 분류표에는 “(h)이 분류에 포함되는 동물”이라는 항이 포함되어있다. 이것은 러셀의 패러독스를 상기시킨다. 분류표에 모인 동물의 집합은 자기 안에 자기를 포함하는 집합이 되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인데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일일이 열거된 사물들이 분배된 곳의 ‘안에서’를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일일이 열거하는 ‘와’를 붕괴시킨다”는 것이다. 즉 보르헤스의 분류표는 동물들이 그 안에 끼어들어갈 공통공간은 없다는 것, 동물들이 그 안에 정렬할 장소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푸코는 이 상황을 ‘혼재향’이라고 부른다. “혼재향은 비밀리에 언어를 잠식해 들어가 이것‘과’ 저것을 명명할 수 없게 하며, 공통명칭을 분쇄하거나 혼란시켜” ‘말과 사물’을 결합시키는 ‘통사법’을 붕괴시킨다는 것을 재확인한다. 그리고 실어증 환자의 경험을 인용한다.

보르헤스를 읽을 때 금할 수 없는 당혹스러운 웃음은 말이 붕괴된 자들이 아마도 품고 있을 어떤 깊은 불안과 무관하지 않다

동물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동물을 분류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모든 동물을 배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동물뿐만 아니라 과거의 동물도 일일이 열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에는 가능했던 동물도, 미래에는 가능할 동물도 열거해야 한다. 나아가 현재 가능한 동물도 열거해야 한다. 그것들 중 얼마는 현실적인 양상을 띠는 동시에 또 얼마는 상상적ㆍ공상적인 양상을 띠지 않을 수 없다. 동물의 표상도 일일이 열거하지 않는다면 동물을 사고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가능한 동물을 모두 일일이 열거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너무 혼란스럽기 때문에 이번엔 대분류나 중분류나 소분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동물 집단과 교과서에 기재되는 동물 집단이 함께 배열된다. 보르헤스적인 분류표가 불가피하다. 그러면 동물을 진지하게 사고하려하면 할수록 개별 자연과학이나 개별 인문사회과학보다 더 진지하게 사고하려하면 할수록 동물들이 분류되어 순서대로 잘 배열된 공통공간은 불가능하다는 것, 동물들은 혼재향으로 흩어질 뿐이라는 것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이 경험은 말의 경험으로, 말이 붕괴된 자들의 경험과 통한다. 실어증의 경험, 혹은 치매의 경험, 인지증의 경험과 통한다. 오히려 ‘천년 전부터 내려온 관행’에서 탈락한 실어증 환자나 치매노인이야말로 동물에 관해 진지하게 사고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동물/식물

그런데 보르헤스는 그 분류표를 중국백과사전의 일부로 제시하고 있다. 즉 보르헤스는 혼재향을 가공의 중국이라는 비재향(유토피아) 안에 수장가능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런 것을 허용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반성적인 분류를 설계할 때, 요컨대 고양이와 개가 설령 둘 다 사육동물이거나 향료처리하여 박제로 보존된 동물임과 동시에 광폭하고, 물주전자를 깨는 동물이라 해도, 두 마리의 그레이하운드만큼 유사하지는 않다고 말할 때, 우리는 어떤 지반(sol)에서 출발하여 그 분류를 확실한 것으로 세울 수 있을까.

우리는 동물을 분류한다. 어떤 시대든지 어떤 문화든지 우리 인간은 동물을 분류한다. 그 분류의 지반은 무엇인가. 그 지반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존재하는가. 우리는 경험적으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동일성ㆍ상사성ㆍ유사성에 따라 동물에 순서나 질서를 주는데, 그때 일관성=간섭성은 있는가. 있다면 그 일관성=간섭성은 어떤 것인가.

분명 우리는 동물을 분류한다. 모눈종이의 칸 안에 동물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거기서 ‘경험적 질서’를 인지하는데, 그 경험적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란 무엇일까. 그것을 동물을 집어넣는 모눈에 미리 선을 그어놓는 것에 해당하는 ‘문화적 코드’라고 하면 좋을까. 혹은 경험적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가능적 모눈이라 하면 좋을까. 요컨대 초월론적 철학을 문화론으로 축소시키거나 문화론을 초월론적 철학으로 확장시켜 답하면 좋을 것인가.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런 방식은 동물에 따라다니는 불안도 동물의 사고에 따라다니는 불안도 증발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피커 싱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싱어는 인간을 특권화하는 분할법을 계속 고발해왔다. 인간의 특권성이 계산능력에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인간 중에는 계산을 전혀 할 수 없는 자가 존재한다. 그리고 동물 중에는 훈련만 잘 받으면 간단한 계산은 할 수 있는 동물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해 동등하게 특권성을 부여한다면 그것은 종차별주의다. 그러면 인간과 동물 사이에 그어져있는 선을 다른 곳에 다시 그어야만 한다. 그래서 싱어는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능력을 분할기준으로 채용한다. 아무런 비판 없이 공통공간을 전제로 하는 싱어의 평범한 분할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싱어적 분류표는 이런 모양새가 될 것이다. (a)즐거움과 고통을 느끼는 동물, (그 가운데) (b)인격, (c)정상인 건강한 고양이, (d)의식이 있는 말기 환자, (e)실험동물 중 일부, (f)다운증후군 아동, (g)쾌락과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동물, (그 가운데) (h)뇌사자, (i)(아마도)랍스터, (j)(아마도) 모든 식물, (k)식물인간상태인 사람, (l)수정란, (m)무뇌아, (n)일부 태아, (o)기타, (p)애매하지만 그 때문에 뇌신경계 계측을 요하는 동물, (q)유전자조작의 영향을 받은 동물……. 이런 종류의 분류표에 대해 그것도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능력의 유무를 분류기준으로 했다거나 공리주의를 분류원리로 했다고 해봤자, 혹은 어떤 종류의 전통문화나 서양생명윤리에 의해 규정되었다고 해봤자 이미 아무 것도 사고하지 않은 것이 된다. 먼저 우리는 이런 종류의 분류표를 보고 웃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분류표로 혼재향을 인식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싱어가 바로 “언어가 붕괴되어버린 자” 중 한 사람이며, 치매노인과 공통된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 자신도 불안을 느껴야 한다.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는 점에서 다시 인간으로서의 특이성 내지 특권성을 손에 넣게 되는 모양새가 될 것인가. ‘싱어의 분류에 포함되는 동물’ 같은 분류항목을 분류표에 넣거나 유전자 개념이 자기를 포함한 경우의 개체 자체를 자기 안에 포함하도록 설정되어 있다는 것을 상기하면 그 길은 닫혀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푸코에 의하면, 경험적 질서의 영역(region)과 (준)초월론적 영역 사이에는 어떤 領野(domaine)가 펼쳐져있다. 그 곳에서 경험적 질서는 그것이 가능하게 되지만 그 때문에 현실적이라는 양상을 잃고, 그것은 확실한 것도 가장 좋은 것도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런데 바로 그로 인해 해당 질서가 존재한다는 자연적 사실(fait brut)이 드러나게 된다. “이미 코드화된 시선과 반성적인 인식 사이에는 질서 자체를 해방시키는 중간영역이 실재한다.”

그렇다면 동물이나 사물의 사고에 관한 문제는 분류질서를 긍정하는 것도 부정하는 것도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공통공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동물들이 나란히 존재하는 중간영역에 관한 ‘노출의 경험’을 사고하는 것이다. 이 경험에 입각하면, 뇌사자가 최근에 발명된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나 동물도 최근에 발명되었다는 것이 ‘깊은 불안’과 함께 명확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진통제의 효과와는 다른 진정(apaisement)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최근에 발명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200년도 되지 않은 형상에 불과하다. 우리지식 안에 있는 단순한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 지식이 새로운 형태를 찾아내기만 하면 바로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깊은 위로이며 진정인가.

인간/동물/식물에 관해 치매노인처럼 사고하고 경험하는 것, 그렇게 해서 “침묵한 부동의 지반에 분열, 불안정성, 균열을 회복시키는” 것, 그리고 나서 “지반을 새로이 불안하게 뒤흔드는” 것…….

현대사상(現代思想) 2009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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