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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 아동문학평론가 – 인문학과 아동문학이 만났을 때

- 은유


# 0.

‘글 쓰는 사람’을 글로 알려야할 땐 꾀가 난다. 그냥 글 한 편 복사-붙여넣기 해서 보여주면 간단할 텐데 싶으니 말이다. 사실, 모든 글은 자기고백이다. 타자를 경유한 진실 드러내기 혹은 자기가 감각한 세계 잘라내기다. 단편적인 글에서도 ‘존재의 슬로건’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위클리수유너머의 더 리더: 동화책 읽어주는 여자, 달맞이 글이라면 이런 대목이다.

‘이런 게 바로 우리가 지향하는 삶이 아닌가! 누군가에 의해 촉발되고, 누군가를 촉발할 수 있는 생명력.’

파스텔 색감 몽글몽글한 그림동화에서 생의 이치를 콕 끄집어내는 달맞이. 그의 글엔 늘 뭔가 있다. 예리하고 공정하고 따뜻하고 총체적으로 웅숭깊다. 달맞이꽃이 피기까지, 삶의 행로가 궁금했다. 어찌 나 뿐이겠는가. 댓글 따윈 필요 없다는 차도녀 까도남 독자가 운집한 <위클리수유너머>에 일전에 의견이 달렸다. ‘달맞이님의 글, 늘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누구신지 궁금하고, 언제 기회가 되면 뵙고 싶네요.’ (뺑덕어멈)

이심전심, 독자를 대신하여 달맞이를 만났다. 본명 박혜숙. 직업 아동문학평론가. 그러니까 박완서 선생이 생전에 말씀하시길 몹시도 가난하니 부조금 받지 말라던 바로 그 직업군에 속한다. 이제는 거울 보기가 겁나는 마흔을 훌쩍 넘긴 글 쓰는 여자다.

# 1.

‘둘째 놈은 하루가 멀다 하고 해리포터를 찜 쪄 먹을 수 있는 대작을 터뜨려서 인생이 한 방이라는 걸 보여주라고 성화지만, 그건 너무나 먼 세상의 이야기라……. 그냥 산다. 설렁설렁 건들건들. 마흔을 훌쩍 넘겨 깨달은 건, 살아 보니 내 욕심껏 세상은 살아지는 게 아니라는 것. 그러니 그저 오늘을 열심히 사는 게 제일이라는 거.’

별일 없이 산다지만 그것은 삶의 오랜 쟁투 끝에 이룬 평형(남창훈)상태다. 달맞이는 만화방 집 딸이었다. 만화로 한글을 깨쳤다. 유년시절 윗목에서 엄마를 기다리며(기형도) ‘나는 글 쓰는 사람이 되어야지’ 막연히 꿈꿨다. 스무 살 무렵 그가 살던 시흥동 달동네엔 헌책방이 많았다. 노동자, 시인 지망생, 연탄배달부, 대학생 등 하나둘 헌책방 난롯가로 모여들었다. 책모임이 꾸려졌다. 거기서 달맞이는 카잔차키스의 조르바를 만나고 박노해를 깊이 읽었다. 소식지를 만들고 동인지도 발간했다. ‘사람들이 품고 온 갖가지 사연과, 낡은 책에서 폴폴 떨어지던 먼지와, 낯익은 얼굴들이 있어 그곳은 늘 다복했다.’

책을 향한 짝사랑이 길었다. 매달 삼천 원이면 무한정 책을 빌려주는 동네 책방에서 눈치 보고 웃돈 얹혀줘 가며 책을 봤다. “스물아홉 이전까지 출간된 문학작품을 거의 다 읽었다.” 책과 책 사이 그는 결혼, 출산, 육아, 대학을 마치고 잡지사에 취직했다. 아동문학 관련 잡지를 만들었는데 기획 취재 편집까지 1인 출판을 책임졌다. 배 아파가며 책을 낳았다. 그것들이 자식처럼 좋았다. 물 만난 고기처럼 일했다. 그러길 3년. 새해부터 나오지 말라는 해고통보를 12월 30일에 받았다. 달맞이는 네온불빛 번지는 연말 밤거리를 울며 떠돌았다. “갈 곳이 없었다.”

# 2.

누구말대로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 갈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어디든지 길이 될 수 있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낯선 세계로 내디딜 가능성이 열린다. 달맞이 역시 그랬다. 혹독한 실수-방황을 거치며 잠재된 다른 삶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는 경제적 독립을 위해 독서지도사 과정을 준비했다. 아동문학의 세계로 마음이 쏠렸다. 동화작가로 등단했으나 책 읽고 글 쓰는 것이 좋아 조심스레 아동문학평론가를 꿈꿨다. 한평생 책에 파묻혀 산 그가 책 냄새에 끌려 찾아 곳은 원남동 수유+너머다.

‘오랜 망설임 끝에 ‘수유 너머’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어. 전철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가면 탑골공원이 나오고, 탑골공원을 가로질러 가다 보면 ‘수유 너머’가 나왔지…반찬 냄새가 빠지기도 전에 서둘러 세팅을 하고 모여 앉으면, 좁은 식당 안에 모기들은 왜 그렇지 윙윙거리던지. 그런데 참 이상해. 원남동 시절이 가장 기억에 남아. 생전 처음 니체를 만난 곳, 내게 앎이 무엇인지, 내가 누군지 되물어 보게 한 곳, 내 삶에 배짱이라는 쌈짓돈을 건네준 곳…….’

삶에 지친 자는 니체가 달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먼 존재’라는 콧수염 철학자의 폭포 같은 일갈에 정신이 번쩍 든다. 날 선 통찰과 시크한 농담에서 자기 삶을 긍정하는 운명애를 배운다. 니체의 강을 건넌 달맞이는 이론학교에서 들뢰즈를 접하고 고전학교에서 열하일기를 공부했다. 노자 세미나를 일 년 반 진행했다. 대중지성1기 44주 동안 동서양철학의 알찬 종합선물세트를 말끔히 비웠다. 채운, 고미숙, 고병권, 박정수, 김영진 등은 암울한 시기에 빛이 되어준 스승이다.

“수유너머는 내 생애 가장 치열하게 공부한 시기다.”라는 그. 한문은 몰라도 된다, 엉덩이만 질기면 된다는 말에 “속아서” 덜컥 시작했으나 고됐다. 기존의 사유 문법과 관습에서 벗어나 인식의 회로를 재구축하는 작업이 만만할 리 없다. 달맞이는 순전히 깡으로 버텼다. 원형탈모증이 생겼다. 결국 신체가 바뀌었다! 머리카락은 잃었고 자긍심은 얻었다. 강좌를 듣고 후기를 쓰면 칭찬댓글이 주렁주렁 달렸다. ‘달맞이님 글이 마음을 흔든다’는 감응에, 그도 마음 설렜다. 공부와 글에 자신감이 붙었다. ‘아, 글을 써도 되겠다. 돈을 많이 못 벌어도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야지’

촉발의 힘이란 얼마나 위대한가. 마음 담은‘해보고 싶다’가 앎과 삶의 풍요를 일궈냈다. 달맞이는 소망대로 작년 봄 독서전문잡지 추천등단으로 아동문학평론가가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쌓은 문학적 소양과 풍부한 인문학적 성찰로 길어낸 고유의 작품세계를 인정받은 것이다. 작은 꿈을 이룬 그는 이제‘아동문학 하는 사람’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잘 가꿔가면서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할머니로 늙어가는 노후를 상상한다.

# 3.

생은 요동치고 인연은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수유너머에서 한 시절 생의 양식을 허기지게 빨아들였던 그는 지금 저만치 떨어져있다. 꼭 수유너머에 와야만 공부가 된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두 아들이 중고생이 되었다. 작년엔 아버지가 급작스레 돌아가셨다. 집채 만 한 허무함이 덮치고 지나갔다. 8월의 태양만큼 뜨거웠던 생의 여열을 식히면서 그는 요즘 숨을 고르는 중이다. “친정 같은 수유너머에 행여나 누가 될까, 나의 글로 인해 아동문학의 위상이 낮아질까” 공들여서 동화책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수유너머와 느슨하게 교통하고 있다.

‘달맞이’ 필명은 꽃이름에서 따왔다. 20여 년 전, 파란화면에 삐익~ 접속신호 요란하던 PC통신시절부터 사용한 아이디다. 주변에서는 오래됐다, 궁상맞다며 바꾸라고 성화지만 한번 맺은 인연 쉬이 끊지 못하는 성정 탓에 아직도 달맞이란다. 낮에는 꽃잎을 오므렸다가 달빛을 받으면 활짝 피어나는 달맞이꽃. 그는 “달맞이꽃이 번식력이 강해서 거친 황무지에서도 잘 자라고, 또 누군가를 향해 활짝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느낌을 주어서 좋다”고 한다.

고백대로 ‘달맞이’에는 그의 삶의 존재양식과 윤리적 추구가 담겼다. 어떻게 살아야 하고 살고 싶은가 존재물음이 던져지는 곳, 지속적으로 왕복운동이 일어나는 사건의 장소다. ‘누군가에 의해 촉발되고, 누군가를 촉발할 수 있는 생명력’ 가득한 달맞이는 지금 노오란 꽃잎을 오므리고서, 다시 한 번 마음 가득 담은 ‘해보고 싶다’를 왼다.

“아동문학 하는 동료들 중에 인문학 공부를 원하는 사람이 많다. 수유너머에 가고 싶어 하면서도 지레 겁먹고 안 가더라. 아동문학과 인문학의 만남의 길잡이를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책임감이 든다. 꼭 해보고 싶다.”

응답 4개

  1. 둥근머리말하길

    달맞이샘.. 쫌 아는 분이다.ㅋㅋ

  2. cman말하길

    아! 이렇게 글쓰는 분들은 치열하게 사시는군요. 일견 부럽습니다. 멋지게 살아가시는 달맞이꽃님이나 한 개인을 덤덤하게 그리고 깔끔하게 정리하시는 은유님이나 어휴! 부럽습니다. 저도 힘내서 살아야겠습니다.

  3. 강물처럼말하길

    달맞이님, 궁금했던 그동안이 그랬군요.

    힘 내세요. 그리고, 한 번 만나요.

    은유님이 나서고, 자리는 내가 펼터니,

    셋도 더도 좋으니 함께

  4. 달맞이말하길

    은유샘, 넘 멋지게 잘 써줘서 감사하고 부끄럽네요.
    글쓰기 강의 응원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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