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生命과 사랑의 참 의사, 張起呂박사.

- 김융희

부산의 복음병원 설립자로,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말보다는 실천의 중요성을 앞세워 사랑을 실천한 장기려 박사는, 한국 문학의 선구적 개척자인 춘원 이광수의 심령에 감동을 주어 구원의 명작인 “사랑”을 낳게한 주인공으로, 지극히 서민적이며 소박 겸손하여 평생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가난한 환자를 돌보며 삶을산 참 의사이다.
“욕심이라면 어떻게든지 남에게 좋은 일을 하려는 오직 하나의 욕심뿐, 그는 돈의 욕심도, 권세의 욕심도, 다른 어떤 욕심도 없는 분이다. 장기려 박사는, 최고 실력의 의사로써 병은 의사가 고치는 것이 아니라 제 속의 제 힘으로 낫는 것이라며, 환자를 대하면 먼저 전도부터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참으로 탄복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다. 내가 마음 놓고 친구라고 감히 부를수 있는, 그는 지극히 적은 수의 친구중의 한 분이다.”라고 함석헌 선생은 말한다.

장기려 박사가 평양의 산정현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였다. 아무런 내세울 것 없는데도 자신을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평생 그리스도의 뜻을 받들며 살겠다는 서원을 했다. 그 실천을 위해 그는 의사가 되었으며, 그때의 약속을 지키며 평생을 살았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당시 등록금이 세브란스는 100원인데 비해 경성은 35원인 1/3 수준의 학비가 싼 경성의전을 선택하여, 당시 최고 외과의사인 백인제 박사의 수제자로 의사 수업을 했다. 그는 평양의 기흘병원에 근무중 한국전쟁을 맞았으며, 공산치하에서 의사로 지내면서도 신앙생활을 계속하면서 장로직분에도 충실했으며, 1950년 12월 3일, 국군과 함께 월남하여 의사로써 피난시절을 부산에서 보냈다.

1953년에는 부산 영도에 창고를 빌려 무료 진료소를 만든다. 임시 천막을 치고 급증하는 환자들을 돌보았다. 몰려든 환자는 계속되고 의료비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서도 치료비가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환자가 한 사람이라도 없도록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돕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뚜렷한 재정의 뒷받침도 없이 몰려든 환자를 감당할 수 없어, 결국 등록비로 100환을 받기로 하였으며, 그것도 못내는 사람이 있어 모금함을 설치하기도 한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 지금의 복음병원이 된 것이다. 돈과 명예같은 건 전혀 관심 없는, 오직 평화만을 사랑하는 어진 사람, 사랑으로 치료하고 진리만을 가르치는 의사요 교수, 항상 예수님의 향기가 풍기는 크리스챤으로 공산치하에서도 성실한 장로로 활동했던 확고한 믿음의 그였다. 자기에게는 변함없는 사랑의 철저한 근검 절약을 실천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보면 결코 그냥 넘기질 못한다.

병의 고통으로 시달림도 슬프고 고달픈데, 과중한 치료비 때문에 수수방관해서야 쓰겠느냐며, 건강할 때 병자를 돕고, 병에 걸렸을 때 도움을 받는 선진국형 의료보험제도를 첫 도입한 “한국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결성 조직하여 많은 환자를 구제하기도 한다. 이런 시도가 생각처럼 그렇게 쉽지 않았지만, 역경에서도 동기와 방법이 좋은 것이라면 결과는 주님이 인도해 주신다는 확고한 믿음의 신앙이 그를 지킨 것이다. 그는 이와같이 철저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자선사업과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설립 육성 발전시킨 공로로 1979년에는 사회봉사부분의 막사이사이상을 받기도 했다.

그가 부산거리를 걸어가는데 거지가 앞에서 손을 내민다. 얼른 호주머니에 돈을 찾아보지만, 딱 한 장의 수표뿐 돈이 없다. 그는 수표를 거지에게 건냈다. 시큰둥 망설이는 거지에게 손수 수표에 싸인과 함께 전화번호를 적어주면서 은행에 가서 찾으라는 친절을 베푼다.
얼마 후 은행으로부터 수표를 지불해도 되느냐는 문의 전화가 왔다. 내 싸인이 있지 않느냐며 지불해 줄 것을 당부하는, 이처럼 그는 아낌없는 자비심을 보이며 몸소 실천한 분이다.
그러면서 당신은 편지 요금의 차이로 며누리까지도 물론 항상 엽서를 사용하는 분이다.
원장인 자부가 직원의 손을 거친 완전히 노출된 엽서를 받기가 난처하였다. 꼭 봉투를 사용한 편지를 받고 싶다는 내용과 함께, 봉투와 우표를 여럿 사서 보내드리는 며누리를 그는 나무라면서, 오히려 남에게 비밀이 뭐가 필요하느냐는 핀잔이었다고 한다.

그 며누리가 시집올 때의 일화이다. 시아버지의 낡은 이불을 보고 예물로 이불을 했었다.
그런데 주소를 적어주면서 어느 학생에게 이불을 전해 주라고 하셨다. 영문을 몰라 내력을 물으니, 이불이 허술해 학생이 몹시 고통을 겪더라며 갖다주라는 것이다. 황당한 며누리는 아버지를 위한 예물인데 아버지께서 쓰셔야지 남에게 줄 수 없다고 만류하였다. 그럼에도 주기를 바라는 아버지께 헌 이불과 바꿔 주자는 제의에도, 주는 것은 좋와야 한다며, 마음에 내킨 좋은 일을 할 수 있어 너에게 더욱 고마운 일이라면서, 한사코 시키는 일이라 뜻데로 해드렸지만, 서운한 마음은 오래도록 풀리지 않더란 며누리의 후일담이다.

복음병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입원 환자가 원장에게 찾아왔다. 퇴원을 할려는데 지불할 돈이 없다는 딱한 사정의 그에게 뒷문으로 빨리 도망을 가라고 했다. 반신반의 놀라는 환자에게 원장인 나도 병원 규정을 어쩔 수 없으니, 그 길밖에 방법이 없다며, 어서 가라며 독촉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는 돈이 없는 환자에게는 돈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병원 규칙을 어길 수가 없어 당신의 돈을 대신 쓰는 경우가 많지만, 돈이 수중에 없고보면 이런 극단적인 일도 서슴없이 저지른 것이다. 가난한 약자에게는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않고 인자하고 그토록 너그러우운 마음이란, 스스로 실천하며 십자가를 진 삶이 진정에서 울어나지 않음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부산의 복음병원에 근무하면서 서울의 경성의전과 카토릭의대 강의를 위해 오르내리는 바쁜 일과가 계속되었다. 돈없어 치료를 못받는 환자를 위해 받는 봉급마저도 거의 쓰는 그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외근으로 근무에 충실치 못하면서 복음병원에서 책정된 봉급을 다 받을 수 없다며 스스로 봉급을 깍아 받기도 했다. 그의 근검 절약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는 겸손하면서도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끝까지 소신을 지키는 신념의 사람이다. 그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며 마틴 루터 킹과, 순교자 주기철 목사에 대한 글을 남긴 것을 보면 간디와 킹, 그리고 주기철 목사를 가장 존경하면서 살지 않앗나 생각이 된다.

평생을 병원에서, 강단에서, 교회에서 쉬지 않고 일을 하는 그에게 외국여행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여행을 하면서도 안내원이 없을 때는 큰 병원에서 수술 견학을 부탁하여 선진 기술을 익혔고, 경비를 아끼느라 가능한 걷는 관광을 하였다. 미국에서 27불에 구입한 구두가 유럽의 독일에서 바닥에 구멍이 났다. 많이 걷는 것은 생각지 않고, 자동차가 발전한 나라는 구두도 약하다고 불평하면서, 독일에서는 튼튼한 학생화를 2불에 사서 스위스 이테리 카이로 아테네 뉴델리 방콕 홍콩을 거쳐 귀국후 1년을 더 신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하여 가난하게 지낸 것이 기쁨이라 생각했는데, 인도의 간디선생이 돌아가신 후 보니 물레밖에는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에 비하면 너무 많이 가진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살았다.

지금 시골에 있으면서도 최고의 명문고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거창고등학교도 그의 공덕이 크다. 설립 멤버인 이사로 있을 때, 미국의 유명한 로버트 슐러 목사가 한국을 방문했다. 장박사를 만났으며, 거창고등학교가 재정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차관으로 빌려 차차 갚을 수 있으면 10만달라를 주선하겠다고 했다. 이사회에서 무조건 수락하는 방향으로 결정이 나는 것을 보고, 그는 반대의 뜻을 밝혔다. 이유는 빌린 돈을 값을 수 있는 분명한 대책이 없고, 민간인 달러 소유가 불가능한 당시의 법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였다.
10만달라를 능력없는 약속과 법을 어기면서 감행하는 무모를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소신에 속수무책, 물론 다된 밥에 재 뿌린다며 깐깐한 성격을 탓하며 불평이 컸지만, 아쉬운 체념이었다. 결국 이사회는 아쉽지만 미국의 슐러 목사에게 내용을 사실데로 알리기로 했다.
그런데 정도를 걷는 결과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으니, 슐러 목사는 내용을 듣고 오히려 진실로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차관이 아닌 모금으로 3만 달러를 보너스로 더해, 13만 달러를 보내 왔다. 그 돈이 힘이 되어 오늘과 같은 거창고교가 탄생된 것이다. 절대 옳은 일에는 끝까지 소신을 지키는 신념은, 여린 자비심과 한없이 겸손한 그가 잘 믿기지 않는다.

그는 625인 한국전쟁을 평양의 기흘병원에 근무하면서 겪는다. 14후퇴에 부모와 처자를 남겨둔 채, 1950년 12월 3일 차남만 데리고 경황없이 월남했다. 그때 가족과 함께 오지 못한 죄책으로 평생을 후회하면서 지낸다. 모임에서 노래를 부를 기회가 있을 때면, 아내가 가르쳐준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보였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딸이 엄연히 있는데 재혼이란 있을 수 없다며 좋은 많은 구혼처를 두고도 일생을 독신으로 보냈다. 비몽사몽에 아버님이 오신다해 보니 낯익은 5 6명의 검은 복장을 한 사람들을 보고는, 그날을 아버님의 기일로, 삼촌들이 어머니의 영정사진을 들고 꿈에 나타난 1968년 10월 17일을 어머니의 돌아가신 날로 믿고 있다. 평소 얼마나 마음속에 품고 그리며 지냈으면, 이처럼 꿈속에서 만났겠는가!

자기 치유 기전에 의해 낫지 않는 병은 의사에게 속수무책이라며, 의사의 자만을 경고했고, 사람의 심리가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해 환자에게 사랑과 정성을 강조했다. 특히 당신의 경험에 의한, 의사는 항상 자신이 환자의 입장에서 신체 부위를 절제할 것인가, 아니면 더 경과를 본 후에 결정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옳바른 태도라며 의사는 환자를 자기와 동일시하면서 진단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춘원은 복음병원에 입원해 장기려 박사를 처음 만나 알게 되었지만, 그의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앙심, 의사로써 계속된 인술과 연구열에 감동되어 그를 주인공인 <안빈>으로한 작품 “사랑”을 통해 참다운 인간상을 표현했다. 그의 후배이며 인제의대 학장을 지낸 전종휘박사는 “여러 연구활동에 관한 지식, 깊은 신앙심,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자상하고 친절한 진실의 사랑을 몸소 실천했던 가장 존경하는 의사”라며 장기려 박사를 증언한다. 이 밖에도 그에 대한 일화는 많다. 그분께서 우리 곁을 떠난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고, 날로 각박해진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더욱 생각나고 그리워지는 분이기에, 문득 떠으른 것을 적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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