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무한독전

알랭바디우, 사랑예찬

- 박카스(수유너머R)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예찬』에서 하나의 정체성을 숭배하며 사는 개인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리고 그는 사랑이라 불리고 있는 여러 관계들과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이 어떻게 다른지 밝히며, 사람들에게 둘의 관점에서 행하는 세계에 대한 탐색의 시도를 권한다.

바디우에게 사랑이라 불릴 수 없는 첫 번째 관계는 ‘조건부 만남’이다. 프랑스 파리의 만남 알선 사이트 ‘미틱’은 “위험 없는 사랑을 당신에게”라는 광고로 사람들에게 조건부만남을 주선해왔다. 바디우는 이 회사의 광고를 보고 사랑에서 위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며, 이런 조건부 만남에서 개인이 원하는 것은 타자와의 사랑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이 소유하고 싶어하는 무엇(조건)에 대한 쾌락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조건부만남을 원하는 개인은 타자에게서 비롯되는 시련이나 심오하고 진실된 온갖 경험들에 대해서는 완전히 회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에서는 상대가 자신의 편의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 타인을 쉽게 포기하게 된다고 말한다.

바디우는 이러한 조건부만남이 추구하는 ‘위험 없는 사랑’이 ‘전사자 제로의 전쟁’을 외치는 제국주의 군대의 프로파간다와 유사하다고 말한다. 제국주의 군대는 세계의 안전과 평화를 위한다는 빌미로 그들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국가들에 대해 폭격을 가한다. 그러나 그들이 내거는 세계의 안전과 평화는 실상 자신들의 이권에 불과하다. 제국주의 군대는 그들의 이권을 가져오는 국가들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들의 이권에 반하는 국가들에게는 폭격을 가한다. 그리고는 전사자를 내지 않는 안전한 전쟁을 치루었다고 자축하기까지한다. 조건부 만남 역시 위험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타자에게서 자신의 쾌락만을 찾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조건부 만남에서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조건에 대한 쾌락을 가져다주지 못할 경우 그 관계는 제국주의 군대가 자신들의 이권에 어긋나는 국가를 처리하듯이 폐기처분된다.

한편, 바디우는 희생을 통한 종교적 도약에 대해서도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바디우는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들과 상이한 특성이 아닌 차이라는 특성 그 자체를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에 공감하지 않는다. 그는 레비나스가 말하는 차이의 경험은 특정한 타자와 연관이 없는 환원 불가능한 경험을 말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타성의 경험은 종교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바디우는 둘을 부정하는 하나를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는 사랑을 신학적 성찰과 구분한다.
바디우는 둘을 부정하는 하나의 관계는 초월적인 것에 대한 믿음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이러한 초월적인 것에 대한 믿음은 개인을 명령과 복종 관계에 놓이게 하며 “우리들만의 가치”라고 말하는 반동적인 제안으로 흐르게 한다고 덧붙여 말한다. 그는 우연을 긍정하며 생겨나는 사건들에서 나타나는 사랑을 특정 집단이나 초월적인 대상으로 회귀하게 할 경우 그 집단 외부는 적으로 간주됨을 강조하여 말한다.

바디우는 라깡이 ‘성관계에는 오직 성적 판타지만 있을 뿐 실은 성관계는 나르시시즘에 해당한다.’ 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도 이는 자신의 사랑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바디우는 라깡이 나르시시즘을 위한 성관계를 말할 때조차 여기서 타자는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는 ‘비-관계’를 대신하여 도래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에 주목한다. 이에 바디우는 성관계에 있어 타자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를 있는 그대로 당신과 함께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 당신은 타자를 공략하러 간다.” 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남은 전적으로 불투명한 상태로 존재하는 하나의 사건일 뿐이며, 실제세계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결과들을 통해서만 오로지 현실성을 갖게 될 뿐입니다. 사랑은 나를 높은 곳으로 인도하지 않으며, 더구나 그 나머지 것들을 낮은 곳으로 데려가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실존적인 제안일 뿐입니다.”

바디우는 개인이 하나의 정체성에 대한 숭배를 벗어날 수 있는 진리의 절차로 연인들 간의 사랑에 대해 말한다. 바디우가 말하는 사랑은 초월적인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닌 우연에서 비롯하는 사건들을 지속하는 주체들의 충실함을 말한다. 나와 타자가 충실함을 통해 세계를 구축해나갈 때 생겨나는 것들에 대한 긍정이다. 바디우는 자신의 사랑론이 차이의 경험과는 달리 차이에서 시작된 세계의 구축에 있음을 명확히 한다.

“그녀와 나는 이러한 유일한 주체, 사랑의 주체로 체화되며, 사랑의 주체는 우리 양자의 차이의 프리즘을 거쳐 세상에 전개된다. 사랑은 나의 개인적인 시선을 가득 채우는 무엇에 국한되는 대신, 이 세계가 이루어지고 탄생한 결과 존재하게 되는 무엇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세계의 탄생을 목격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한편 바디우의 논리에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것은 사랑이 진리 그 자체가 아닌 진리의 절차 중 하나로 이야기된다는 점이다. 바디우는 여러 관계에서 동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사랑을 ‘둘에 관한 진리’로 구분지어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그에 의해 ‘둘의 진리’로 한정지어진 사랑개념은 수많은 우연의 관계가 만들어낼 수 있는 다양한 사건의 지속들을 단지 연인간의 관계로만 축소시킨다. 따라서 그가 책에서 사랑과 정치는 구분지어질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도 그가 사랑을 진리의 절차로 연인과의 관계로 한정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게한다.

(사랑에서는) 만남,선언,충실성이 차이를 창조적인 존재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에서 매우 본질적인 반론들과 관련된 경우 이런 유형의 것들은 전혀 생산될 수 없으며, 이러한 사실은 정치에서 실상 지명된 적들만을 존재하게 하는 원인 되기도 합니다. …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정치에는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요.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서로를 사랑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우리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동안에도 그러한 진리를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스스로 정치와는 무관하다고 말하는 동안에도 그러한 정치적 입장을 내고 있으며, 사랑을 하지 않는 동안에도 다른 무엇에 대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말해야하지 않을까. 바디우의 사랑과 정치, 진리에 대한 구분은 명확히 무엇을 대상으로 쓰여졌는지를 보이게 하면서도 여전히 불편한 이유는 사랑과 정치가 예술 모두 진리의 하위범주로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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