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우리는 몇 번째 국민인가?

- 맹찬형(연합뉴스 제네바 특파원)

리비아의 민주화 시위가 내전으로 비화되면서 외국인의 탈출 러시가 한창이던 지난 2월25일부터 3월1일까지 이집트 카이로에서 사지를 빠져나오는 우리 근로자들을 취재하면서 가장 인상깊게 내 머리 속에 남은 단어는 `제3국인’이었다. 리비아 현지에서 공사 중인 한국을 비롯한 부자나라 기업들에 고용된 방글라데시와 필리핀, 인도, 파키스탄, 태국,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 출신 단순 일용직 노동자들을 뜻하는 말이다. 아마 계약 당사자인 리비아와 한국 같은 나라들을 각각 1국과 2국이라 하고, 당사국 국적이 아닌 사람들을 제3국인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수많은 생목숨이 죽어나가는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목숨 값은 같지 않았다. 우리나라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경제력이 있는 나라들은 전세기와 여객선 등 온갖 수송수단을 동원해 자국민들을 귀국시켰지만, 이른바 제3국인들의 조국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번 내전이 발생하기 직전 리비아 건설 현장에는 방글라데시인 5만명, 파키스탄인 1만8천명, 인도인 1만8천명, 네팔인 2천여명 등 약 10만 명의 아시아 출신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처한 상황은 비참했다. 리비아를 빠져나가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 트리폴리 공항에서 리비아 경찰들은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길바닥에서 노숙 중인 아시아 출신 노동자들을 곤봉과 쇠파이프, 철제 체인 등으로 마구 때렸다고 한다. 서양사람들과 중국인, 한국인은 맞지 않았다.

자신들을 고용한 기업에서 제공한 트럭을 타고 천신만고 끝에 이집트와 튀니지 국경까지 도착한 제3국인들은 그곳에서도 가난한 조국을 뒀다는 이유로 차별을 당해야 했다. 자국 대사관에서 제때 영사를 파견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아 국경을 통과할 수 없었고, 통과한 후에도 갈 곳과 잠잘 곳이 없었다. 미숙련 노동자인 이들은 뜨거운 사막의 건설 현장에서 일한 대가로 월 400~500 달러 정도를 받았다.

하지만, 인력알선업체에 1년치 월급에 해당하는 수수료를 미리 낸 탓에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도 빚더미에 앉게 된다. 그러니 설사 자신들의 조국이 귀국 항공편이나 선박을 제공한다 해도 마음 편히 돌아갈 형편이 아니다. 리비아에서 선박을 이용해 철수한 대우건설 소속 방글라데시 노동자 49명이 지난 6일 그리스의 항구에서 차가운 바다로 뛰어들어 탈출을 시도하다 3명이 익사하고 15명이 행방불명됐다. 유럽땅에서 일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다. 이들의 절박한 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국가간 빈부 격차는 엄연한 현실이다. 하지만, 보편적 인류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과 존중에서 비롯된 제도적 안전망을 마련하는 것도 피할 수 없는 과제라는 생각이다.

우리나라 원건설의 장명천 현장소장님이나 두산중공업의 임광재 소장님처럼 함께 일하던 제3국 근로자들을 이집트 국경까지 사명감을 갖고 피신시킨 분들을 인터뷰했을 때는 정말 존경스러웠다. 그러나 개별기업의 현장 책임자들의 판단과 양심에 노동자들의 안전을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지구적 차원에서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이 대규모로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저개발국 출신 노동자들을 위한 최저임금 규정을 만들고, 리비아와 같은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신변 안전과 수송 대책을 보장하는 장치를 마련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때가 왔다.

물론 저개발국은 자국 내에서조차 최저임금 규정이 없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 현실과는 너무 거리가 먼 얘기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만, 많은 개발도상국이나 저개발국에서 유선전화 인프라를 건설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휴대폰 시대로 곧바로 간 것처럼 발상을 달리 해볼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제네바로 돌아와 `제3국인’이란 단어를 놓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 참으로 참기 어려운 언론보도를 봤다.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을 휩쓸고 있는 민주화 시위의 배후에 일자리를 아시아 노동자들에게 빼앗긴 현지인 실직자들의 생활고가 자리잡고 있다는 월스트리트의 지난 4일자 `분석’ 기사다. 근거로 든 통계자료는 세계은행에서 나왔다 한다. 이 기사는 자국의 부패한 권위주의 정부에 대항해 거리로 나선 튀니지와 이집트, 리비아, 바레인 등 수많은 아랍권 국민들의 분노의 화살을 아시아 출신 노동자에게 돌리려는 의도이거나, 설사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런 효과를 갖는다는 점에 치명적인 해악이 있다.

오히려 이들의 저임금 노동이 있어서 우리 기업과 서방 선진국 기업들의 공사 수주와 시행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리비아와 같은 나라들 역시 상대적으로 싼 가격에 원하는 공사를 발주할 수 있었으니, `제3국’ 노동자들의 보이지 않는 희생의 수혜자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아시아 노동자들이 저임금의 3D 업종에 종사함으로써 해당 국가와 기업이 얻는 이익은 자국의 산업구조를 고도화하고 더 나은 일자리를 자국민에게 제공하는 데 쓰이는 것이 마땅하지만, 쫓겨난 권력자와 그 가족, 측근들이 그 돈을 어떻게 썼고 어디에 숨겼는지는 환하게 드러나있다. `카다피 주식회사’의 회장 격인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를 예로 들면 그 일가의 자산이 800억 달러(90조원)에서 1천500억 달러(147조원)에 달한다고 하고, 셋째 아들은 자가용과 전용 제트기 구매, 스트립댄서 고용, 초호화 호텔 예약 등에 1년 동안 3천억원을 썼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보편적 인류애라는 가치를 부정하는 일은 리비아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사상 최악의 지진으로 수많은 일본국민들이 목숨을 잃은 참극을 앞에 두고 `하나님의 심판’ 운운한 서울의 어느 대형교회 목사님과 `일본침몰’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주저없이 뽑아내는 한국 신문에서 같은 종류의 비정함과 차별을 보고 있다.

이를 두고 아시아 분쟁지역에서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이유경씨는 페이스북에 `국격의 침몰’이라고 썼다. 물론 침몰한 건 일본이 아닌 대한민국의 국격이다. 우리는 과연 언제쯤에나 보편적 인류애와 진정한 국격의 소중함을 알게 될까?

응답 1개

  1. 서재에서말하길

    알면 알수록 비참하군요. 죽어가는 목숨까지 등급이 매겨지다니. 인격의 침몰. 국격의 침몰. 지구의 침몰까지 불러올까 걱정스런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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