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3호] 기묘한, 그래서 더 매혹적인 가족 판타지

- 기픈옹달(수유너머 R)

달맞이의 책꽂이

기묘한, 그래서 더 매혹적인 가족 판타지
<배고픈 여우 콘라트> 크리스티안 두다 글/ 율리아 프리제 그림 / 하늘파란상상

<배고픈 여우 콘라트>는 너무 다른 두 ‘날 것’의 이야기다. 크나큰 배고픔 하나밖에 없는 여우 씨는 숲속 호숫가에 홀로 앉아 있는 엄마 오리를 보자, 전략적으로 접근한다. 친구가 되어야겠다는 그럴듯한 허울을 붙이기는 하지만, 속이야 뻔하지 않은가! 대책 없는 엄마 오리는 자기만 살겠다고 제 새끼(알)를 남겨둔 채 줄행랑을 치고, 여우 씨는 알과 친구가 된다.

헌데 여우 씨 운명도 참 얄궂다. 집에 도착하면 오리 알 볶음이라도 해 먹으려고 잔뜩 벼르고 있었는데, 아기오리가 알에서 깨어난다. 여우 씨 뱃속에서 나는 “꾸르륵!” 소리에 반한 아기오리가 “엄마, 엄마!”라며 달겨들자, 당황한 여우 씨는 “아니야! 아빠야!”라고 응대한다. 그렇게 둘의 동거는 시작된다. 수컷 여우 씨를 아빠라고 철썩 같이 믿는 아기 오리와, 배고픔밖에 모르는 가짜 아빠 여우 씨의 희한 야릇한 동거.

오해와 실수, 그리고 사랑

둘의 관계는 오해로부터 시작된다. 새들은 알에서 깨어나 처음 보는 존재를 엄마라고 생각한단다. 그러니 아기 오리가 여우 씨를 엄마라고 생각한 건, 아기 오리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보면 착각이요, 오해다. 그런데 그 오해가 그들을 가족으로 묶는 끈이 된다. 여우 씨가 “아빠!”라고 자인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실수 때문이다. “너를 잡아먹겠다!”라는 말이 “아빠!”로 잘못 튀어나와 버렸으니. 더욱 기가 막히는 건 여우 씨의 요동치는 뱃속 외침(“꾸르륵” 소리)을 듣고 아기 오리가 행복해 한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그야말로 적과의 동침이다. ‘지금 잡아먹기엔 너무 작아!’ 여우 씨는 자진해서 배고픔을 유예시킨다. 풍선처럼 키워서 잡아먹겠다던 결심은, 아들 로렌츠가 여자 친구까지 데려오자 더욱 난관에 빠진다. 여우 씨는 이제 아들의 사랑이 시들해지기만을 기다린다. 혹여 아들이 상처받을까 봐 당장 여자 친구를 쓱싹할 수는 없고, 둘의 사이가 벌어져 아들이 여자 친구를 지겨워하기만을 기다린다.

이쯤 되면 여우 씨의 착각도 중증이다. 질투심에 눈이 멀어 아들의 연인을 떼어버리고 아들과 단 둘이 될 날을 꿈꾸는데다가, 은근슬쩍 효심까지 기대하니 말이다! 하지만 일은 점점 꼬여 간다. 여우 씨 뱃속에서 끊임없이 들리는 꾸르륵 소리를 불편해 하던 예비 며느리와의 간극이 단번에 좁혀지는 이상한 사건이 일어난 것. 그 날 이후 여우 씨는 아들과 며느리 사이를 중재까지 한다. 일은 점점 더 커져, 손주들이 태어나 식구는 여덟으로 늘었건만, 여우 씨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이 이야기는 ‘운명적인 만남’ 에 대한 판타지를 한 방에 날려버린다. 예기치 않은 만남, 아니 오해와 실수로 점철된 만남이 어떤 과정을 거쳐 사랑에 이르게 되는지, 이질적인 만남이 서로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잘 보여준다. 배고픔을 채울 생각밖에 없었던 여우 콘라트는 얼토당토않게 아빠가 된다.

그럼에도 아빠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멋지게 해낸다. 아니, 며느리에 수많은 손자와 손녀까지 거느린 대가족의 수장이 된다! 그런가 하면 어떻게 아이를 낳는지, 그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손톱만큼도 모르는 채 사랑 타령만 하던 로렌츠와 엠마는 여우 씨의 도움으로 아이들이 알에서 깨어나는 황홀한 순간을 경험한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 생뚱맞고 기이한 야생 오리와 배고픈 여우의 만남을 통해 살을 부비고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일깨워주는 것이다.

잘못된 만남, 그러나 기막히게 멋진 하모니

아기 오리들(손주와 손녀)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여우 씨의 몸은 점점 쪼그라든다. 그리고 머지않아 숲은 오리들로 가득 찬다.
무지무지 배고픈 여우 씨, 바싹 쪼그라든 여우 씨 콘라트는 이렇게 해서 수많은 오리들의 어른이 된다. 꽥꽥거리는 아기 오리들에게 둘러싸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삶의 지혜들을 물려주기까지 한다. 자기가 알려준 대로 사냥놀이를 하는 아기 오리들을 보면서 “역시 내 아이들이야!”라는 감탄사까지 절로 흘리는 경지에 이르는 것.

아기 오리들 역시 여우 씨의 목소리를 닮아간다. 해서 때로는 우렁차게, 때로는 낮게 으르렁댄다. 여우 씨 뱃속에서 흘러나오는 “꾸르륵”의 秘技까지 터득한다. 때론 높고 낮게, 때론 짧고 길게! 때론 쉼표를 찍은 듯 간헐적으로! 그렇게 무리가 된 그들은 즐겁게 숲을 거닌다 (이 장면은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힌다! 이보다 멋진 하모니가 어디 또 있을까?). 그러던 어느 날 한쪽 구석에서 아기 오리들이 뛰노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여우 씨는 조용히 눈을 감는다.

여우 씨는 정말 행복했을까? 평생 배고픔이라는 욕망을 억제하고 살았는데, 혹여 허망하지 않았을까? 자신을 땅 속에 묻어주고, 자신의 목소리를 닮은 아이들이 숲속을 지키고 있다는 것만으로 과연 위안이 될까?

아기 오리를 만났던 것은 배고픈 여우 씨로서는 정말 우연이었다. 아니, 잘못된 만남(먹이와 사냥꾼의 만남이었으니)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건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라캉에 의하면 투케(운명과 짝하는 우연)는 그냥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운명을 기다리는 주체의 의지와 욕망이 있어야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배고픔이 자기 욕망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여우 씨 속에도 뭔가 다른 욕망(사랑을 하고픈 욕망, 가족을 이루고픈 욕망. 누군가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삶의 지혜를 나누고픈 욕망 등등)이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본인도 모르고 있었던 그 간절한 바람이 아이 오리와의 만남을 적극적으로 주선한 것은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왜 이리 지질이도 운이 없는지, 왜 이리 내겐 잘못된 만남만 이루어지는지 조금도 불평할 이유가 없다. 잘못된 만남이건, 잘된 만남이건 그걸 이루어내는 건 내 욕망 탓이다. 그러니 내 욕망의 결을 세밀히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어쨌건 이 이야기는 발칙한 상상력, 유머러스한 이야기, 간결하고 코믹한 그림을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가족에 대한, 만남에 대한, 사랑에 대한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부순다. 무엇보다 변화무쌍한 여우 씨의 표정이 압권이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등을 보이고 홀로 앉아 있는 여우 씨, 퍼덕거리는 오리를 잡아먹느라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무지막지한 여우 씨, 배가 고파 눈이 축 쳐진 짠한 여우 씨, 발등에 아기 오리를 얹고 행복한 꿈나라에 든 귀여운 여우 씨, 아기 오리들에 파묻혀 귀와 눈만 보이는 어정쩡한 여우 씨……. 우리네 삶에 대한 기막힌 은유가 아닌가!

– 달맞이

응답 7개

  1. 부우말하길

    가족,만남,사랑에 대한 고정 관념을 여지 없이 깨부순다는 글 공감입니다. 구입해 꼼꼼히 봐야겠어요.. 좋은 책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박혜숙말하길

      유쾌하고 재미있는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 같습니다. 읽어주셔서 저도 감사합니다.

  2. 둥근머리말하길

    삶에 대한 기막힌 은유를 잘 풀어준 글을 읽느라 잠깐 행복했더랬어요.. 고맙습니다.

    • 박혜숙말하길

      제가 고맙지요. 연주 샘, 오랜만이에요. 한번 봐요.

  3. 박혜숙말하길

    쿠라라차님 감사합니다. 혹 R에 잘 들르시거든 책 사지 마세요. 서평에 올린 책들은 R에 가져다 두고 같이 읽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담주에 갈 때 가져다 놓을게요.

    • 쿠카라차말하길

      감솨 감솨. 앞으로도 좋은 책, 좋은 글 계속 보여주세요.

  4. 쿠라라차말하길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특히 이번 책은 꼭 사서 읽고 싶네요. 워낙에 샘이 재미있게 잘 소개해 줘서 그런 거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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