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카페

난세의 개, 주인을 물다

- 안티고네

-드라마 <최강칠우>에서 배울 점-

“난세에 사람으로 태어나느니

태평성대의 개로 태어나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난세의 개로 태어난 자들이 있다.

이것은 그들의 이야기다.”

드라마 <최강칠우>는 위와 같은 말로 시작한다. 연기자로도 꽤 탄탄한 입지를 다진 신화의 에릭이 군대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찍은 드라마. 그리고 <천하장사 마돈나>와 <커피프린스>를 통해 서서히 연기자로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언의 마지막 작품. 2008년 여름에 방영된 이 드라마를 2011년 겨울에 꺼내보게 된 건 순전히 유아인이란 배우 때문이었다. <성균관스캔들> 걸오앓이 열풍의 주인공이 나오는 사극이니까, 그것도 같은 장르인 퓨전 사극. 하지만 <최강칠우>는 <성균관스캔들>처럼 보송보송하고 화사한 드라마가 아니었다.

때는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난 뒤인 인조 시대. 주인공 칠우의 아버지는 서자도 사람답게 살게 해 달라며 서자들을 모아 신문고를 울리지만, 억울함이 풀리긴 커녕 관아에 끌려가 물고만 당한다. 정치적으로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달은 칠우의 아버지는 사람들을 모아 산으로 들어가 ‘무륜당’을 세운다. 그 곳은 적자와 서자, 양반과 서민과 노비, 남자와 여자를 구별짓는 법도가 없는 새로운 마을이다. 무륜당에서의 평화로운 시절도 잠시 뿐. 어느 날 관군들이 토벌하러 몰려오고 아버지는 아들 칠우와 딸 우영, 그리고 자기 노비였고 검술 스승이자 무륜당에서는 친구로 지낸 진무영의 아들 흑산이를 지키다가 죽고 만다. 아버지가 올망졸망한 아이들에게 남긴 유언은 단 두 마디 뿐이다. “살아 남아라, 그리고 세상을 바꿔라.”

무륜당에서 도망쳐 나온 칠우는 어린 여동생 우영을 가난한 동네 훈장님인 김홍조 어르신네 양녀로 들여보내고, 자신은 의금부 최나장(졸개)네 양자로 살아간다. 양부를 따라 시전 상인들에게 푼돈을 뜯어내며 사는 칠우는 생부가 남긴 유언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진작에 깨달았다. 전쟁으로 민초들의 삶은 팍팍하기만 하지만, 이런 세상을 바꾸려 드는 자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되는 데로 세파에 몸을 맡기며 살아가리라고 결심한 칠우에게 여동생 우영이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다. 의금부에서 일하는 동안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절실하게 느낀 칠우는, 법으로 이 문제를 풀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여동생의 원한을 풀기 위해 자객이 된다. 그런데 그가 자객으로 나서는 순간 또다른 의문의 백의자객(사관 민승국)을 만나게 되고, 이때부터 오합지졸들이 모인 이상한 자객단이 탄생한다. 낮에는 의금부 나장이자 밤이면 자객이 되는 칠우, 그가 움직이면 성균관도 유림도 움직일 수 밖에 없다는 대쪽 민승국 사관, 소현세자의 친위대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자(고 이언), 칠우의 양부로 자객 의뢰를 받는 최나장, 방물전 주인 홍일점 연두, 시장에서 칼갈이를 하는 똘똘이 꼬마녀석 철석이.

신분도 성장배경도 다른 이들이 모여 의뢰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은 험난하게 짝이 없다. 그건 이들이 자객이기에, 자기 목숨을 걸고 누군가를 해쳐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 자객단이 나서야 할 의뢰란 어떤 것일지 판단하는 것부터가 늘 문제였기 때문이다. 자객단 초기 사관 민승국은 의기양양하게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제 자객 민승국 조선의 사대부/선비/양반으로서의 모든 예우를 포기하오. 그동안 난 조선의 사대부로서 책에 파뭍혀 살아왔소 그러나 몇 번의 자객 경험으로 현실은 책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소. 그렇소. 내가 바로 간서치(책만 읽는 바보)요 백면서생(글만 읽고 세상 물정에는 어두운 사람)이오.”

그러나 간서치이자 백면서생인 그는 이내 자객단에는 엄격한 기준과 강령이 필요하다며, 우리 자객단이 맡을 의뢰는 ‘극악무도한 살인죄, 국법에 호소해도 해결할 수 없는 시급한 범죄, 강상을 저버린 패륜죄 등으로 제한’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이 얘기는 그를 제외한 서민들에게 즉시 제지당한다. 최강칠우가 내세우는 자객당의 강령은 심플하다. “자객은 자객일 뿐 잘난 척하지 말자.” 의뢰를 받을지 말지는 모두가 함께 매번 의논해서 결정하면 되고, 받은 의뢰금은 모두 공평하게 나누자. <최강칠우>에 나오는 대사처럼, 의리는 끼리끼리 생기는 법이다. 사대부는 사대부들끼리, 천한 것들은 천한 것들끼리. 양반이라고는 민사관 한명 뿐이니, 당연히 자객당의 강령 및 법도는 무식한 칠우가 내세운 데로 결정된다. 하지만 의뢰를 받을 때마다 칠우와 민사관은 사사건건 다툰다. 시전상인들을 못살게 구는 조폭들을 처리해 달라는 의뢰에서, 청나라 공녀로 끌려가는 여자들을 구출해 달라는 의뢰에서, 청나라 황제가 하사한 코끼리를 죽여달라는 의뢰에서. 민사관은 번번이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거나 혹은 자신은 자객이지만 명분없는 살인은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칠우는 나라의 체면이나 대의명분 ‘따위’보다 양민의 삶과 목숨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맞선다.

그렇게 티격태격 다투면서도 사이좋게(?) 자객질을 하던 이들. 정략에 희생된 아버지와 무륜당의 꿈, 우영이의 죽음을 기억하며 절대 대의명분 따위에 휘둘리지 않겠다던 칠우에게 엄청난 일이 일어난다. 칠우의 첫사랑 그녀, 청나라 공녀로 끌려갔다 지금은 의금부 관노가 된 소윤아씨가 데리고 다니던 동생 철석이가 알고보니 소현세자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철썩이의 신분이 드러나자마자 민승국과 일부 의로운(?) 선비들은 갑자기 반정 모드로 돌아선다. 자객질로는 한계가 있다, 자객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서 말이다. 드라마 속의 인조는 청나라에 무릎꿇은 비겁한 왕이자, 부국강병을 주장하는 아들 소현세자 일가를 몰살시킨 나쁜 왕이다. 그리고 소현세자는 낙후된 조선에 한 줄기 빛을 가져다 줄 개혁자로 그려진다. 청에서 힘든 볼모 생활을 하면서도 서양문물과 청의 발달된 기술을 조선으로 가져오는 선각자로 말이다. 그러니 극 중 사대부들은 당연히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아들을 독살한, 강상을 어긴 인조를 폐하고 소현세자의 아들인 철석이(석견)를 왕위에 올려야 한다는 논리를 펼친다. 물론 여기에는 <성균관 스캔들>의 개혁군주 정조에 대한 로망과 유사한 판타지가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강하고 현명할 뿐 아니라, 백성과도 친화적인 개혁군주를 향한 판타지. 최근 정조 열풍과 함께 인조시대 열풍이 부는 것은 아마 이런 정치적 로망 때문일게다. (참고로 드라마 <추노>도 <최강칠우>와 동일한 시대 배경이다. <추노>의 송태하(오지호)는 자자처럼 소현세자를 측근에서 모셨던 무관이고, 태하가 제주도에서 구출해내는 석견 아기씨가 바로 <최강칠우>의 철석이다.)

그러나 한 손에는 소현세자가 독살되었다는 기록이 담긴 사초를, 다른 손에는 소현세자의 아들 철석이의 손을 잡고 정정당당히 궁으로 들어가 대명세상을 열겠다는 자객단과 몇몇 소현세자파의 반정은 끝내 실패하고 만다. 심지어 사초도 잃고 철석이도 독살되고 만다. 이처럼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이 드라마는 의외의 카드를 꺼내든다. 그 동안 소현세자의 마지막 핏줄을 지키는 것만 생각했던 소윤아씨가 자객단에게 소현세자 일가의 살인에 가담했던 모든 사람들-왕, 어의, 영의정-을 죽여달라고 의뢰한 것. 어차피, 의뢰를 받고 사람을 죽이는 게 자객 아니냐며 말이다. 어디까지나 드라마지만, 자객단은 소윤아씨의 의뢰를 성공적으로 끝낸다. 왕을 처벌하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 이들이 꿈꾸던 것 중에 첫 번째 것은 반정으로는 이룰 수 없었지만 자객으로서는 이룬 셈이다.

<최강칠우>의 마지막 장면은 꽤 상징적이다. 일부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의 결말이 나이브한 열린 결말이라며 비난했지만, 내가 보기엔 이들 자객단은 마지막 의뢰를 마치고 장렬하게 죽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거 같다. 마지막 순간, 자객단은 인조반정의 주역이자 자객단 개인들과도 원한이 얽혀있는 김자선 대감과 맞선다. 김자선은 죽음 앞에서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자객들에게 ‘나를 죽이고 왕을 죽여도 세상은 변하지 않으며, 100년 뒤에도 500년 뒤에도 누군가는 개처럼 짓밟힐 것이고, 누군가는 짓밟을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왕을 바꾸어도, 왕을 왕처럼 보이게 만드는 권력구조를 바꾸어도. 확실히 절망적인 말이다. 이 기막힌 절망 앞에 잠시 멍해졌을 때, 우리의 주인공 칠우가 입을 열었다. “맞는 말이다. 100년이 지나도 500년이 지나도 세상은 똑같을 것이다. 짓밟고 짓밟히고. 허나, 100년이 지나도, 500년이 지나도 나같은 놈이 있다. 그땐 칼 대신에 무엇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처럼 싸우는 사람이 또 있을 것이다. 그걸로 된 것이지.”

무엇을 들고 싸울지는 알 수 없지만, 싸우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높은 분들이 알아서 잘 해주시리라 믿고 있지 말고, 억울함을 호소하지 말고 싸워야 한다. <최강칠우>에서 ‘신문고’는 권력의 허울을 드러내는 빈 수레로 등장한다.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에서 살기위해 민초들은 북을 울리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네 주장은 강상(삼강오륜)에 어긋난다는 말 뿐이다. 그래서 나장들은 이 북을 ‘억울한 사람이 치면 더 억울해지는 북’이라고 부른다. 루쉰은 권력을 떠받들고 살기 힘든거나 권력에 맞서면서 사는거나 피곤한 건 오십보 백보라고 말했다. 어차피 살기 팍팍한 세상이라면, 뭐라도 들고 맞서 싸우는게 낫지 않을까. 흥미롭게도 ‘쥐벽서’ 사건을 조사한 검사는 이 일을 두고 외국 귀빈들을 모신 가든 파티에 개를 푼 격이라고 표현했다. 오호라. 우리가 사는 세상은 태평성대가 아니라 ‘난세’였고,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개’였나 보다. 그렇다면 개답게 삼강오륜을 따지지 말고 그냥 주인을 무는 쪽이 속 편하리라. 마침 <최강칠우>가 한창 방영중이었던 2008년 여름은 핸드폰과 디카라는 깜찍한 무기를 들고 싸우던 촛불의 물결이 넘실대던 때였다. 난세의 개떼들이여, 컹컹 짖자, 이빨을 드러내자, 무기를 발명하자. 태평성대는 기다림의 끝에 오지 않나니.

응답 3개

  1. 유심말하길

    아~ 안티고네 글 읽으니 늠늠 씐나요~~

  2. jung1129말하길

    쥐벽서 검사가 정말로 그럴 토쏠리는 발언을 했나요? 놀랍군요. 컹컹 짓어서 물어 뜯고만 싶어지는 밤입니다 ㅡ,.ㅡ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