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다양한 인물들이 그려내는 삶의 하모니

- 달맞이


-『패트리샤 공주는 아무도 못 말려!』로이스 로리 글, 손영미 옮김, 주니어랜덤

여자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많은 공주이야기를 듣고 자란다. 아름다운 공주의 모습에 자신을 동일시하기도 하고, 멋진 왕자를 만나는 이야기에 설레기도 한다. 그러나 서양 동화 속 대부분의 공주들은 주체성을 포기한 나약한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절대 권력을 가진 남성에게 선택을 받아야만 부귀와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다. 이야기를 통해 여자아이들은 암암리에 소극적이고 남성 종속적인 주체이기를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명작 동화라고 일컬어지는 서양 동화 속에는 이렇듯 교묘하게 남성과 여성,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힘이 있는 자와 없는 자, 높은 신분과 낮은 신분 등……. 이분법적인 사고나 권력과 힘을 숭상하는 가치들이 숨어 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요즘의 아이들에게 그러한 가치와 사고는 낡고 진부한, 극복되어야 마땅할 것들이다.

『패트리샤 공주는 아무도 못 말려!』가 기존의 공주이야기를 모티브로 하고 있으면서도 낡고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새로운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공주를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주체가 아니라 자기인생을 스스로 선택하는 능동적인 주체로 그려낸다. 왕과 왕비, 구혼자들을 코믹하게 그려내 읽는 재미를 배가시키는 한편, 유머러스한 문체로 법(제도)과 외모, 결혼과 사랑에 대한 인간의 이중적인 면을 드러내며 현실을 조롱한다. 또한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어울림의 미학을 제시한다. 공주라는 지금-여기와는 거리가 있는 허구의 인물을 통해, 가장 첨예한 지금-여기 현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는 보여지는 것이 다가 아니며, 보여지는 것(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 속에 감춰진 것(본질)을 환기시키기 위한, 작가의 주제와도 밀접하게 이어지는 문학적 전략이기도 하다.

너, 왜 그렇게 살아?

이 작품에 등장하는 왕족이나 귀족들은 사회 지도층이라는 레벨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이다. 겉모습은 물론 심성까지 삐딱하다. 권력과 부, 명예를 가졌으면서도 외부와의 소통을 거부하고 자기 세계에 갇혀 있다. 작가는 이들의 속성을 ‘거추장스러워서 부르기 힘든 긴 이름’을 가졌다고 정리한다. 이들이 보이는 것에 집착하며, 소통 불가능한 고립된 존재들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왕과 왕비는 만백성의 부모여야 하는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왕비는 젊은 시절 멋을 내려고 털모자 없이 겨울 축제에 갔다가 양쪽 귀가 다 동상에 걸렸다. 그 이후 청력이 나빠져서 백성들은 물론 딸의 이야기에조차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 왕은 나라 일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나비 생각에만 푹 빠져있다. 이런 왕과 왕비가 백성들을 잘 다스릴 리 만무하다. 요즘 우리 현실 속에 있는 정치가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공주와 결혼하겠다는 구혼자들 역시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데스몬드 대공은 멧돼지처럼 끔찍하게 생겼으며, 퍼시발 왕자는 입 냄새가 지독한데다가 비듬투성이고, 콜린과 커스버트 백작은 거친 욕설과 트림을 일삼으며, 목욕을 안 해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이런 겉모습보다 더욱 끔찍한 것은 이들의 비뚤어진 심성이다. 데스몬드 대공은 물질만능주의자이며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다. 끔찍하게 생긴 자신의 모습이 드러날까 두려워서, 엄청난 부와 권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낼 만한 것들을 모두 없앤다. 스스로에게 ‘나는 잘 생겼어!’라고 최면을 걸며, 주위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잘 생긴 사람 대하듯 하라고 훈련까지 시킨다. 결혼을 하려는 것도 자기가 죽은 뒤, 전 재산이 국민들에게 돌아갈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결혼은 재산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퍼시발 왕자는 자신의 모습에만 관심을 보이는 ‘거울 왕자’이며, 샴쌍둥이인 콜린과 커스버트 백작은 상대를 통 배려하고 이해할 줄 모른다. 늘 남의 탓을 하며 티격태격한다.

지나치게 희화화(戱畵化)된 감은 있으나, 왕족과 구혼자들의 모습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속성을 여과 없이 반영하고 있다. 자신의 모습을 긍정하기 보다는 타인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해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려하거나, 비겁하게 자기 속으로 숨어들거나, 늘 모든 것을 타인의 탓으로 돌려 싸움을 일삼거나. 그래서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이들의 행태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어느 순간 가슴이 먹먹해진다. 작가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기존 세대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반성을 촉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너 계속 이렇게 살래?’라면서.

내 인생은 나의 것

최고 권력자인 부모님, 아름다운 옷과 맛있는 음식, 시중을 들어주는 시녀. 화려하고 부족할 것이 없는 패트리샤 공주의 삶은 어찌 보면 많은 이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삶이다. 왕실의 유일한 혈육이니 앞날도 탄탄대로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야기 서두부터 우리가 갖고 있는 환상을 깬다. “아, 심심해, 정말 심심해, 진짜 심심해”라는 공주의 푸념 한 마디로 장밋빛처럼 보이는 공주의 삶이, 따분하고 건조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작가는 제목(『패트리샤 공주는 아무도 못 말려!』)을 통해 공주가 자기주장이 강한 자유로운 존재임을 암시한다. 심심한 일상과 자기주장이 강한 자유로운 공주. 기묘한 이 두 조합이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해, 앞으로 벌어질 사건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열여섯 생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공주는 심심한 일상을 탈출한다. 시녀로 변장하고 마을에 있는 학교에 간다. ‘공주’에서 ‘학생’으로의 변신을 통해 공주는 많은 것들을 알아간다. 가난한 평민은 더러울 것이라는 선입관이 잘못이라는 걸 깨닫고, 스스럼없이 사과를 건네주는 프레드를 통해 나눔에 대해 생각해 보며, 고아 소녀 리즈를 통해 평민들의 안타까운 삶도 돌아다 볼 줄 알게 된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공주’라는 조건을 벗어던짐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본래 모습(명랑하고 활기차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며 유머감각이 뛰어난)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는 왕족이라는 환경이 오히려 공주로 하여금 ‘원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게 했음을 보여줌으로써, 작가는 우리가 동경하는 이상적인 삶에 의문을 제기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공주는, 이제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생일날 자신을 찾아온 구혼자 가운데 한 명과 결혼해서 왕실을 이끌어 갈 후계자를 낳는 대신, 평민 출신의 레이프 선생님과 결혼해 교사가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부모가 정해준 삶에 휘둘리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인생을 선택하는 공주를 통해서, 작가는 독자들에게 인생은 스스로 개척해 가는 것이라는 귀한 교훈을 준다.

당신들이 있어서 정말 고마워

왕과 왕비, 구혼자들의 대척점에 놓인 평민과 시종들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그려진다. 세 하녀처럼 노래를 통해 자기 삶을 즐기는가 하면, 사과를 나누어주는 프레드처럼 정 많은 존재로 묘사된다. 특히 공주의 시종인 17번째 하녀는 초반부에 채 드러나지 않은 공주의 내면처럼 보이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도르래 소년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 장면은 교사가 되고 싶은 공주의 꿈을 암시하는 듯하다. 하녀는 일방적인 왕국의 법을 ‘자신이 잘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애정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공주의 신념에 의문을 제기할 만큼, 지혜롭다. 왕이 딸에 대한 애정을 이상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귀띔해 준다. 공주가 주체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개자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지배계급(왕족이나 귀족)은 나쁘고 피지배계급(평민이나 시종)은 좋다는 이분법적인 논리를 재탕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작가는 평민들에 의해 변화되는 귀족들의 모습을 통해, 삶이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어울려 사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세 하녀의 노래에 감응을 받은 콜린과 커스버트 백작이 타인을 비방하는, 욕설만 일삼던 입으로 타인들을 즐겁게 하는 노래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는 장면은 작가의 주제가 잘 드러나는 가슴 뭉클한 장면이다.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데 급급하던 데스몬드 대공은 거울잡이들이 가져온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고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사람”임을 인정한다.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자, 가장 든든한 친구(꼬마소년 리즈)까지 얻는다. 콜린과 커스버트 백작과 세 하녀, 데스몬드 대공과 리즈, 패트리샤 공주와 평민 출신의 레이프 선생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던 인물들이 만나 멋진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겉으로 드러나는 가치들(돈, 명예, 권력. 겉모습 등)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 런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어쩌면 평민이었던 레이프 선생님에게 어느 날 갑자기 씌워진 ‘레이프 기사’라는 칭호처럼 신기루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거기에 휘둘려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드러나는 것, 보이는 것에 함몰되지 않고 본질을 꿰뚫어 볼 줄 알아야 한다. ‘뛰어난 레이프 기사’라는 칭호가 붙지 않았을 때에도 공주가 레이프 선생님의 뛰어남을 알아보았듯이. 레이프 선생님이 공주를 평민 소녀 펫이라 착각한 상태에서도 어린 버드나무처럼 크고, 날씬하고, 유연하고, 사랑스러운 소녀의 모습을 발견해 내었듯이. 풍자는 현실을 비틀어 보여줌으로써 현실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진실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작가의 재치와 유머가 돋보이는, 재미있으면서도 멋진 풍자동화이다.

* 『도서관 이야기』2011년 1, 2월호에 실렸던 이야기입니다.

응답 1개

  1. 둥근머리말하길

    이런 깊은 책을 소개해주셔서.. 선물 받은 기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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