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노들야학과 만나면서

- 박카스(수유너머R)

노들야학과 함께 인문학공부를 시작한 것은 2009년 여름이었다. 그해 7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맑스의 자본론(상),(하)를 함께 읽었고, 올해 1월부터는 루쉰의 소설, 잡감, 전기를 같이 읽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노들과의 인연으로 5개월째 뇌병변장애를 가지고 있는 호식이형의 활동보조를 하고 있기도 하다. 2009년 여름부터 지금까지 노들야학과 만나 함께 공부하고, 고민했던 흔적들 가운데 몇 가지 기록들을 옮겨보았다.

2009. 8.

미연(가명)은 뇌병변 장애를 가지고 있어 책을 혼자서 읽기가 불편했다. 그래서 미연은 나와 전체 토론 1시간 전에 만나 자본론을 미리 함께 읽기로 했다. 자본론(상) 제 1장 상품편에서 제 3절 가치형태를 읽을 때였다.

“맑스는 가치형태에서 화폐형태의 발생기원을 밝히고 있어. 단순한, 개별적인 또는 우연적인 두 물건으로 가치들이 나타나다가 하나의 물건이 여러 물건으로 가치를 나타낼 수 있게 되지. 그러던 것이 이제는 거꾸로 아마포라는 하나의 물건으로 여러 물건들의 가치를 나타내게 된 거야. 그리곤 하나의 물건대신에 화폐라는 하나의 형태가 여러 물건들의 가치를 표현하게 된 거지.
어떤 학자는 이 두 번째 가치형태에서 세 번째 가치형태로 넘어가는 과정이 중요하대. 여러 가치와 가치로 만나던 관계들에서 하나의 물건이 모든 물건들의 가치를 설명하게 되었다는거지. 이럴 경우 하나의 물건으로 유통은 편리하게 이루어지겠지만 한편 그 물건이 힘을 갖게 되기도 한다는 거야.”

미연에게 가치형태에 대한 설명을 더 하려는데 이런 예가 떠올랐다. 장애인 등록증도 마찬가지 아닐 까. 장애인 등록증은 장애인에게 이익과 편리함을 주는 동시에 생활하기에 불편함을 지닌 다양한 개별의 존재들을 장애인이라는 형태 안으로 들어가게 만들지. 장애인등록증이 있으면 편리하지만 그 증이 있기 때문에, 마치 그 증이 없으면 장애로 인해 사회에서 겪는 불편에 대한 혜택을 당연히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설명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사회에서 불편을 겪는 사람들이 정부에서 당연히 받아야할 권리나 혜택을 그 증에서 비롯되는 수급으로 여겨 정부의 호혜를 받는 것처럼 여기게 되는 모순에 빠지는 것도 그래. 또 장애를 갖고 불편을 갖는 사람들이 장애인이라는 용어에 억눌리게 되고 사회적 편견을 받게 되는 것도 이러한 용어나 증서가 만들어내는 효과이기도 한 것 같애. 미연은 “이제야 알았냐?” 는 듯 나를 물그러미 쳐다보았다.

2009. 11.

“노동자는 자기의 신체를 그 작업을 위한 자동적이고 일면화된 도구로 전환시킨다.”

『자본론』의 분업에 대한 장을 함께 읽다가 미연이 몸을 들썩이며 말했다.

“내가 시설에 있을 때도 그랬어. 매일 몇 시간씩 봉투 접는 일을 해야했어. 기계처럼 똑같은 일을 몇 시간씩 계속했어. 못하겠다고 하면 손등을 때리고, 안 할꺼면 여기서 나가라고 하고. 시설에서는 시키는 대로 해야 거기서 계속 살 수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계속 똑같은 일들을 해야했어.”

그리고 미연은 노트에 자신의 의문들을 적어 보여주었다.

“왜 시설에서 장애인들은 하고 싶은 활동들을 스스로 결정해서 할 수 없는거야? 시설에 사는 당사자인 장애인들이 그 안에서 자기가 하는 활동들을 아무것도 정할 수 없다는게 말이 돼? 원장은 내가 이렇게 말하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꺼면 여기서 나가라고 하더라. 그런데 이상한 건 원장이 이렇게 말하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는 거야.”

지금(2009년 당시) 미연은 시설에서 나와 자립생활 그룹홈에서 친구들과 함께 살고 있다. 장애인 극단 ‘판’에서 배우로 활동하고 수요일엔 자본론을 함께 읽는다. 물론 그동안 무대 경험이 없고, 몸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미연이 누군가의 앞에서 자신의 몸짓을 드러내는 것은 어색한 일일 것이고, 어려운 개념들이 들어있는 책을 읽는 것에도 많은 버벅거림이 따르고 있다. 그러나 미연은 지금 스스로 선택하여 친구들과 함께 고민하고 표현하면서 세상에 다가가는 활동들을 하고 있다. 미연이 불편한 점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고, 말을 잘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공부를 하지 못하고 연극배우가 될 수 없는 이유여야 할까? 시설에서 미연은 이러한 공부하고 표현하는 활동을 할 수 있는 가능성들로부터 차단되어왔다. ‘시설은 과연 무엇을 하는 곳인가? 몸이 불편한 미연이 왜 자기 삶의 결정권마저 시설장에게 내주어야 하는 걸까? 그러고 보면 시설이란 곳은 무시무시한 곳이 아닌가?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이 겪는 불편은 다를 것이다. 그런데 왜 이들은 장애인이라는 범주로 묶이고 시설이란 곳에서 함께 격리되어 있어야 하는 것일까? 시설은 어째서 필요한 거지? 또 누가 누구를 장애인이라는 범주로 묶는 걸까? 같이 살기 위해 시설은 필요한가? 아닌가? 장애인라는 범주는?’

2011. 2.

루쉰의 자서를 읽다가 어깨꿈님(박경석교장쌤)이 루쉰의 자서 한 부분을 되뇌어 읽었다.

“나 자신으로서는 지금 절박한 처지에 몰려 있다고는 하나 결코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여긴다. 그러나 어쩌면 당시 나 자신의 적막한 비애를 아직도 잊을 수 없기 때문에, 때로는 몇 마디 함성을 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고, 또 얼마간은 그런 적막함 속에서 내닫는 용감한 전사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앞을 향해 달려 나가는 데 거리낌이 없게 해 주고자 함일 것이다. … 나 자신으로서도 결코 스스로가 고통으로 여겼던 적막을, 내 젊은 시절같이 아름다운 꿈에 부풀어 있는 청년들에게 다시 전염시키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루쉰이 적막했다라고 말했잖아요. 그게 저에게는 무감각이라고 느꼈던 경험들을 떠오르게 해요. 내가 사고 이후로 몇 년을 방구석에서 틀어박혀 지내야 했거든요. 그때 꼭 내가 시체 같았어요. 바깥에 나가도 아무도 나에게 말 걸어주지 않고, 차가운 시선들만 있고. 그렇게 바깥을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와 방에 있으면 웃음도 울음도 나지 않았어요. 누가 나를 찔러도 아프지도 않고 그랬어요. 그렇게 한동안을 지내다가 이렇게는 못살겠다. 어차피 깨어진 꿈, 여기서 다시 살겠다고 시작한 삶이 여기서의 투쟁입니다.’

루쉰은 1900년대 중국의 전근대와 맞서 싸운 문학가였다. 그는 당시 중국에 주의가 왔다고는 하지만 실상 그 왔다라는 주의 속에는 온통 칼과 불만 있는 상황을 본다. 이를 두고 그는 지금의 중국은 소란하지만 적막하다고 표현했다. 그의 말이 교장쌤에게는 거대한 소리에 짓눌려 다른 소리들에는 귀를 막고 사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몸과 정신 모두 무감각해져야했던 기억들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교장쌤의 말을 듣고 문득 군대에서 제대했을 때가 떠올랐다. 대학교에 복학하여 왠지 모를 불안에 새벽같이 일어나 눈에 불을 켜고 영어 공부를 했던 기억. 별다른 이유 없이 누군가가 만들어낸 불안의 목소리에 단어장이라도 붙들어 매야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이때 나는 스스로 무감각해지기를 자처하지 않았었나? 살아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으로 살아가기 위해 무감각을 자처하고 또 무언가를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스치는 것들에 귀를 열고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 아닐까?

2011. 3.
활동보조를 시작하고.

4주차 활동보조인교육을 받고 왔다. 오늘은 국립재활원에서 교육이 있었다. 교육은 오전에는 장애예방교육이, 오후엔 장애실습체험교육이 있었다. 오후의 교육은 휠체어 체험, 생활공간 체험, 시각장애체험으로 이루어졌는데, 생활을 하면서 장애에 따라 생겨나는 불편의 감각들을 공유할 수 있고, 어떤 노력들이 이루어지면 좋을 지를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오전의 장애예방교육을 들으면서는 걱정이 되는 부분들이 있었다. 국립재활원의 예방을 앞세운 장애인 인권에 대한 교육은 자칫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교육시간에는 한 척수장애인분이 강단에서 자신의 과거 사진을 보여주며 자신이 장애를 갖게 되기 전에 얼마나 건강했었는지를 말했다. 그리고 한 순간의 사고가 자신을 지금의 상태로 떨어뜨렸고, 그런 와중에도 자신은 절망을 딛고 이렇게 여기 나와 교육도 하고, 부동산 관련 공부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강의자는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교육자 자신은 교육을 마무리하며 장애는 결코 비참한 것이 아니며 장애인은 동정의 대상도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교육장 곳곳에서는 울음소리가 들렸고,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교육이 끝나고 몇 몇 분들은 기도하자며 교육자에게 다가가기도 했다.

장애예방에 방점이 찍혀있던 교육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펴나갔다. “장애는 절대 걸리지 않도록 예방을 하는 것이 중요하며 지금 여기 재활원에는 이런 장애 와중에도 힘겨운 재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 활동보조인들은 큰 사명감을 가지고 이들을 도울 필요가 있다.” 나는 이 교육이 교육장에 앉은 활동보조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생각을 해봤다. 아마도 여기 앉은 예비활동보조인들 가운데는 “저런 불편함을 견디고 사는 사람이 있어. 그러니까 내가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 여기 이 약자를 위해 손과 발이 되어주어야지.” 라고 생각을 하게 된 분들이 더러 있지 않았을까.

희생을 자처하는 보호자는 곧 그의 희생으로 되레 불필요한 간섭을 행하거나 장애인을 무능력한 존재로 상정하고 자신의 과도한 호의로 장애인 당사자에게 오히려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불편을 줄 수도 있다. 교육장 안에서는 활동보조를 해봤던 분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경험을 토로하는 분들도 있었다.

“그렇게 자꾸 뭘 해 줄라고 했다가는 큰일 나요. 내가 뭘 더 줄라고 오지랖을 떨면 어쩔 땐 막 화를 낸다니까. 또 어떤 장애인은 그렇게 잘해주면 나를 완전 부려먹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요즘에는 장애인들이 활보인들이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센터로 바로 전화해서 바꿔달라고 한다니까요. 잘해 줄 필요 없어요.”

이러한 불만 섞인 목소리가 터져나오자 장애인과 활보인의 관계는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관계임을 주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으로 이야기가 흘렀다. 이후 다른 날 받았던 몇몇 교육을 통해서 제도와 인식의 변화가 이 부분에 초점이 맞추어져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물론 이 관계를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고용자와 피고용자 관계로 굳어질 경우 이는 ‘자본가와 노동자 관계 같은 냉소적인 관계의 재생산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될 수 있겠다.’ 라는 생각도 갖는다. 한편으로 돈을 매개로 한 교환과, 희생을 필요로 하는 보호 말고 다른 관계를 만들어 갈 순 없을까라는 생각을 통해 친구로의 사귐에 대한 고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들과 그리고 호식이형과 나의 만남은 어떠한지 돌아봤다. 우리는 교환을 하고 있나? 활보를 하며 호식이형이 나에게 주는 것은 매달 계좌로 들어오는 생활비 뿐이 아니다. 노들과 호식형과 만나면서 어느 날부터 나는 어느 건물 입구가 통로 없이 계단으로만 설치가 된 경우, 이곳은 미정누나가 들어가기엔 힘든 곳이군. 이라는 생각이 들게한다. 또 어떤 지하철을 지나칠 때면 어라, 이 역은 아직도 엘리베이터가 없어? 유미쌤이 분노하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고 대학로를 걷다가 거리를 질주하는 전동휠체어를 보면 “역시 빨라” 라고 웃음 짓게도 한다. 노들과 호식이형과의 사귐은 나에게 여기를 보는 다른 시선을 선물해주었다. 또 한편 호식이형의 학습보조를 할 때의 경우, 호식이 형은 내가 혼자서 책을 읽을 때 책과 나 외의 다른 긴장을 준다. 오직 들리는 소리로 공부하는 형은 공부에 대한 열정으로 매시간 나를 기다리며 함께 있는 동안 귀를 쫑긋 세우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형은 내가 책을 읽는 목소리 톤, 뉘앙스에 따라 그 반응을 아주 확실하게 보여준다. 내가 조금만 책을 덜 이해하고가서 문장을 버벅거리며 읽을 때, 형은 여지없이 감기는 눈꺼풀로 나에게 복수를 가한다. 그래서 가끔씩 호식이형은 내가 공부할 때 등장하며 ‘한 번 더’라고 외치며 열공모드에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

물론 활동보조와 활보이용당사자 관계마다 서로의 요구가 다 다를 것이고 의사소통에 있어서도 적잖은 불협화음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친구가 되려고 했을 때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선물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어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활동보조인과 활동보조이용당사자인 장애인 모두가 관계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활보이용당사자인 장애인과 활동보조인 사이에서 관계의 시작이 어렵다거나, 서로 간에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서투르다면, 서로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만들거나 부딪치는 문제들을 공유할 수 있는 (둘 간 혹은 제 삼자를 매개로) 토론 연극 같은 것을 함께 하면 어떨까?’ 한편 의사소통에서 서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이 부분에서는 기분이 나빴어. 이건 이래서 좋았어요.’라는 감정을 나타내는 언어들을 차분하게 사용하는 연습을 해보는 건 어떨까?’ 물론 경제적인 도움이나 활동을 보조하는 역할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우정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간 장애인활동보조교육을 받으며 나는 활보인과 센터, 장애인의 관계가 보다 친구가 되려는 만남으로 출발했으면 한다. 돈이나 그분이 있어야만 우리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항상 여기에 있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응답 1개

  1. cman말하길

    우리 사회에서 세계적으로 처음으로 하는 것도 아닌 장애우에 대한 북유럽과 선진국의 좋은(?) 사례와 선례가 있는데도 받아 들이거나 시행하지 않는 것은 장애우를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나 정치적인 목표의식이 없다는 것이 겠지요. 왜 이나라가 이렇게 살벌하고 삭막하고 나약한 나라가 되었을까요? 답답함을 넘어 절망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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