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주담 객설 6. – 쌀막걸리 이야기.

- 김융희

내가 살고있는 북녘 산골은 3월의 하순인데도 아직 영하의 혹한으로 꽁꽁 얼어 붙었고, 눈속의 자연은 깊은 겨울잠에 파묻혀 있다. 겨우내 계속된 지독한 한파가 참 지겹다. 남쪽바다 내 고향의 3월은, 휘둘러 만발한 꽃으로 동백꽃, 장다리, 유채들이 자연의 대향연을 펼쳐 눈부실 것이다. 싱그러운 봄나물과 연둣빛 보리는 지천으로 널려 있으리라. 잔잔한 바다의 맑은 물빛도 은어의 살갗 비늘처럼 반짝일 것이다. 지천의 조개와 해산물이 풍요로운 계절이다. 불현듯 떠오른 고향의 그리움으로 나는 부랴 다섯 동료와 함께 남행길에 나섰다.

남쪽이 가까워지면서 동토의 잿빛이 점차 밝아져 초록으로 변한다. 가끔 매화와 산수유의 흰, 노랑꽃이 아른거릴 뿐, 만발했어야할 동백과 유채꽃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양지바른 집안에 소곳히 피었어야할 목련도 아직 보이질 않는다. 길고 잔인한 혹한의 횡포와 위력이 대단한 것이다.

볼거리 관광의 명소로 알려진 예양강변에 위치하여 물산이 풍성한 장흥토요시장을 들렸다.

혹한의 위력은 이곳에서도 느껴졌다. 봄나물 달래 냉이 쑥, 싱싱한 미나리, 봄똥 등 채소들이 아직 빈약하다. 풍요와 활력의 시장 분위기도 왠지 맥없이 보여 우리의 기대도 시들해졌다.

우리는 다시 남행, 바닷가로 향했다. 천관산자락에 펼쳐진 자지포를 가는 길이다. 자자포와 수문포의 갈림길에 안양주조장이 있다. 내가 즐겨마신 막걸리의 공급처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새롭게 단장하여 말끔해진 공간에서 젊은 안주인은 꼬두밥을 짖느라, 바깥주인은 상품 포장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우리는 큰 병들이 박스 하나, 새로 탄생된 찹쌀로 빚은 깜직한 작은 병들이 한 박스를 차에 싣고 출발하려는데, 갓 빚은 새 술맛을 보라며 주인이 우리 일행을 자꾸만 붙잡는다. 아침 햇살처럼 맑고 깨끗한 우윳빛 색깔, 달보드레 톡 쏘는 깊은 감칠맛, 아직 숙성이 덜된 술은 더 부드럽고 달콤하다. 마시기도 전에 발효가 한창 진행중인 막걸리의 향에 취한 동료들의 탄성이다.

술잔을 입에 대면 토독 쏘는 듯한 느낌은 발효중에 생긴 탄산가스의 질감 때문이다. 막걸리 라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생(生)자가 붙은 막걸리는 살균막걸리와 구분해 붙인 이름이다. 생막걸리를 30여분동안 6,70도의 따끈한 물에 담궈서 포장하면 살균막걸리가 되는 것이다. 지역판매인 국내용 막걸리는 거의가 생막걸리이다. 효모와 유산균이 살아있어 술의 발효가 계속되면 탄산가스가 발생되면서 보관과 운반이 불편함으로 수출용이나 먼 지방으로 옮기는 술은 살균막걸리가 편하다. 살균막걸리는 더 진한 맛과 향을 느끼게 되며, 탄산까스로 인한 생막걸리의 톡쏘는 듯한 감촉의 묘미는 막걸리의 고유맛을 느끼게 한다.

안양주조장의 막걸리는 쌀을 원료로 만들어 색깔이 더욱 뽀얗고 밝으며 맛이 부드럽다. 이 고장에서 생산된 쌀을 사용하여 쌀알이 둥둥 뜬 탐스런 신토불이동동주는, 많은 막걸리 애호자들의 호응을 받고있다. 쌀막걸리는 90년대에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1960년대의 쌀 절약정책으로 시작된 밀가루로 빚은 막걸리는 많은 양조장에서 지금도 계속 사용되고 있다.

밀가루 막걸리는 가루가 원료이기 때문에 묵직하고 텁텁하며 색깔도 어두운 비지색이다. 탁주로 불린 텁텁한 맛의 막걸리는 오래도록 우리의 입맛을 지켰고, 아직도 그 때의 맛을 막걸리의 진맛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경쾌하고 부드러운 맛의 쌀막걸리와 밀막걸리의 사이에 옥수수막걸리가 있다. 부드러운 감촉에 약간 노란빛깔의 구수한 옥수수로 빚은 술맛은 텁텁하면서도 단맛이다. 옛 맛좋은 막걸리는 반드시 좋은 누룩이 있었다. 술맛을 내는 효모균의 누룩이 지금은 공장에서 대량 생산한 규격품을 쓰고 있다. 오늘날 술맛의 고유 특성이 사라진 한 요인이다. 지금은 지역의 맛과 질의 특성화를 위해, 좁쌀 구기자 율무 인삼등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한 다양한 재품들이 계속 개발되어 판매되고 있다.

안양주조장의 제품은 농림수산식품부의 장려정책으로, ‘장흥버섯연구소’와 ‘남도대학’ 공동 연구의 “찹쌀막걸리 프로잭트”에 의한 산학 연구개발 제품으로 우리 술의 발전을 실감케한 새로운 막걸리의 모델이다. 세련된 포장은 술맛을 돋우기도 한다. 신재품, 햇 찹쌀이 주 “하늘수”는 반 리터의 용량을 깜직한 용기에 담아 감칠맛을 풍긴, 뛰어난 빛과 향을 더한 부드러운 찹쌀 동동주로 술맛이 뛰어난 생막걸리이다.

우리 고유의 농주요 전통주로 사랑받았던 막걸리가 한동안, 정부의 양곡정책에 의한 재료의 사용제약등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가, 겨우 몇 년전부터 막걸리붐이 다시 일기 시작했다.

제품이 활성화되면서 좋은 제품이 개발 판매되고 있음 지극히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금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매우 고무적인 소식도 전해 듣는다. 그런데 언젠가 한 주조장의 주인으로부터 듣었던 “정부의 여러 규제와 간섭으로 군소업자의 생명과도 같은 특성화 전략에 치명타를 줄 정책이 염려스럽다.”는 말이 자꾸 떠올라 마음에 걸린다.

어렵게 지켜온 전통주가 겨우 햇빛을 보며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좋은 제품 개발에 전력투구해야 한다. 그런데 대기업들이 자본을 무기로 시장을 넘보며 뛰어들고 있어, 기존 업체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지금까지 어렵게 지키며 키워온 영세업자들에게는 여력이 없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거대 자본의 위협이 현실로 대두되고 있는데, 정부에서는 제품관리를 명목으로 여러 규제방안을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 규제가 시행되면 대기업의 여러 유리한 여건에 비해 돈도 힘도 없는 영세업자의 고통이 뻔하다. 전통주는 여러 특성의 다양한 제품에 대한 기대가 크다. 국산차 장려정책으로 명맥을 지켜온 국산차시장을 커피 일변도로 만들어버린 것처럼, 늘상 국가의 정책이 맹목 몰개성으로 근본 뿌리마저 고사시켰던 지난 많은 경험이 업계를 두렵게 하고 있다.

물론 좋은 시설과 여건으로 좋은 제품이 만들어지는 것은 바람직스럽다. 또 영세업자의 재력등 불리한 조건으로 불량품이 만들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작은 규모의 다양한 제품 개발은 중소기업의 몫이다. 국가는 후원과 관리만 담당하며, 절대로 제품에 이러 저러쿵을 말아야 한다. 또 유일하게 지역을 중심으로 개발 판매되어 온 지금까지의 우리 전통주 막걸리시장의 변화도 심중히 고려할 사항이다. 전통주는 보편적 일반 상품이기 보다는 개별적 고유 특성을 갖는 것이 바람직스럽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야 우리 전통주 막걸리가 세계를 제압하는 명주로 거듭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동안 10년을 넘게 마셨던 좋은 경안막걸리를 우리 고장의 막걸리로 바꿔 들었다.

지금은 택배를 이용해 멀리 안양주조장의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나의 선택은 단순히 맛의 문제가 아닌 복합적 정서와 기호의 개인 사정일 뿐, 우리 고장의 막걸리도 품질로는 결코 손색이 없다는 사실만 알리면서, 주제를 주담객설인 고향의 막걸리이야기로 타이틀을 바꾼다. 동료들과 고향 탐방 스케쥴의 ‘고향 방문기’를 쓰려고 했는데, 엉뚱하게도 고향의 막걸리 이야기로 횡설 수설 말이 길어져 몹시 민망스럽다.

응답 2개

  1. 강물처럼말하길

    운전하느라 무척 힘드셨으리라 걱정이었는데,
    좋은 시간이였다니 다행입니다.

    그 운전 솜씨를 많이 이용했슴 싶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함께해요. 이번처럼 운전 많이 도와주시게요.

    고마웠어요.

  2. 눈꽃향기말하길

    선생님 안녕하세요? 여행 동반했던 김미숙 입니다. 우연히 동행해서 너무 좋은 시간보내고 감사인사도 제대로 못드렸습니다. 비가오는 운치도 즐겼어야했는데, 조급함으로 폐만 끼친것같아 죄송합니다. 다음에 기회가되면 좀더 여유롭고 편한 여행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건강하시구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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