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여치와 떠난 여행

4화 포도주와 우당탕탕 파티

- 배문희

“따끈따끈한 모모 나왔습니다!”

그때 커다란 잠자리 안경을 쓴 여자가 쟁반을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 여자가 등장하자 카페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벙글었다.

“드디어 모모가 도착했군.”

“오늘은 평소보다 오래 기다렸으니 더 맛있을거야.”

얄리는 옆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팔 만두 이름이에요. 모모는. 당신은 우리들의 좋은 친구가 될 거에요. 이름이 모모니까요.”

그렇다. 이들이 기다렸던 것은 내가 아니라 만두였던 것이다. 나는 어쩐지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말하는 곰 인형에 대한 미스테리도 곧 풀렸다. 곰 인형은 자신의 머리를 스르륵 들어 올리더니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머리 안에는 웬 아저씨가 곰 인형만큼이나 귀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녕. 많이 놀랐니? 난 이 카페 근처에 있는 놀이동산에서 일을 하고 있어. 놀이동산에 오는 꼬마들은 내가 진짜 도라에몽이라고 굳게 믿고 있단다. 난 꼬마들의 스타라구!”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저씨는 원래 놀이동산에서 곰 인형이 아닌 도라에몽 역할을 맡고 있었다. 도라에몽은 다른 인형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도라에몽 아저씨의 싸인 한 장을 받기 위해 아이들이 한 시간씩이나 줄을 서서 기다린 적도 있었다고. 그럴 때면 아저씨는 아이들이 내민 종이 위에 단팥빵 모양의 싸인을 정성스럽게 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저씨는 도라에몽 춤을 추다가 넘어진 이후로 도라에몽 역할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고 지금은 아무 이름도 없는 곰 인형 역할을 맡고 있다고 했다.

“모모에게도 모모를 맛보게 해줘야지.”

“모모도 모모를 틀림없이 좋아하게 될거야. 그래야 모모답지.”

“모모가 모모 말고 또 모모를 좋아하는지 정말 궁금하군.”

사람들은 계속해서 내 이름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내 이름과 같은 모모란 녀석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도라에몽 아저씨가 모모를 갖다주자마자 크크 웃으며 낼름 먹어치워 버렸다. 사람들 말대로 모모는 모모를 좋아할 수밖에 없나보다. 모모를 한 입 베어 물자마자 튀김옷이 바삭하게 부서지며 알싸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만두 속은 뜨거웠지만 알싸한 향 때문에 입 안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모모를 두 접시쯤 비웠을 때 잠자리 안경을 쓴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안녕. 나는 이 카페의 요리사이자 바리스타인 수자라고 해. 앞으론 수지 언니라고 부르렴.”

얼굴을 반쯤 덮은 잠자리 안경 속에서 여자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우리 카페에는 어떻게 오게 됐니?”

“히피 할머니가 같이 가자고 하셔서요.”

나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붙인 별명을 이야기하고 말았다. ‘히피 할머니’라는 말에 사람들은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히피 할머니라니. 정말 어울리는 별명인걸.”

도라에몽 아저씨가 내게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내가 붙인 각설이 할머니라는 별명보다 훨씬 근사하고 우아한 별명이구나.”

“지금 이 순간부터 각설이 할머니는 힘겨운 방황을 끝내고 진정한 자유인, 히피 할머니로 다시 태어남을 선포하노라!”

사람들은 탁자를 두드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히피 할머니는 제자리에서 뱅그르르 돌더니 머리에 쓴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벗고 인사를 했다.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와하하 웃었다.

‘별것 아닌 일에 이렇게 웃을 수 있다니!’ 카페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그동안 봐왔던 어른들과는 전혀 달랐다. 넥타이를 매고 근엄한 표정을 짓거나 뭔가에 짓눌린 표정을 짓고 있는 어른들과는 달리 이들은 별것도 아닌 일에 감탄하고 즐거워했다. 마치 어린애들처럼.

갑자기 바람머리를 한 아저씨가 풍금 앞에 앉아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톰과 제리가 경주를 하는 듯한 빠르고 경쾌한 음악이었다. 군데군데 건반이 빠진 낡은 풍금에서는 연한 바람소리가 났다. 똑 떨어지는 명료하고 정확한 소리가 아니라 여러 개의 음이 웨하스처럼 겹쳐 붕붕거리는 풍금소리에 맞춰 몇몇 사람들은 춤을 추었고 몇몇 사람들은 포도주를 마셨다.

“미안하지만 미성년자에겐 술을 줄 수가 없어.”

수자 언니가 포도주 병을 따며 말했다.

“저 미성년자 아니에요. 스물 한살이나 됐는걸요.”

“뭐라고? 너가 스물 한살이라고? 난 중학생쯤 됐는 줄 알았는데.”

수자언니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난 유난히 작은 키와 비쩍 마른 몸매 때문에 종종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으로 오해를 받곤 한다. 키가 오센치만 더 큰다면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그럼 좋아. 한잔 마셔봐.”

“이건 아니에요. 그냥 포도주가. 수자의 꿈이 담긴 포도주에요. 이건.”

옆에서 얄리가 속삭이듯 말했다. 한 모금을 받아 마시자 얄리가 한 말이 어렴풋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그냥 포도주가 아니었다. 포도주 한잔을 다 마시고 난 후에도 달콤하고 은은한 향이 오래오래 입안에 감돌았다. 마치 푸른 꽃과 깊은 입맞춤을 한 기분이었다.

“술이 이렇게 맛좋은 건지 처음 알았어요. 어떻게 만들었어요?”

나의 감탄에 수자 언니의 얼굴에 등이 반짝 켜졌다.

“향기로운 포도를 따서 가을바람과 아침볕에 마침맞게 익혀서 만들었지.”

음악을 들으며 포도주를 홀짝이다보니 지금이 몇시쯤 됐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들이 가리키는 시간들도 제멋대로여서 아침인지 낮인지 밤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달력 역시 제각각이여서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점점 더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도 같았다.

나는 옆 테이블에 앉아 줄곧 노트에 뭔가를 적고 있는 수염 난 청년에게 시간을 물었다. 수염 난 청년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지금 시각은 새벽 세시입니다.”

“뭐라고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다고요?”

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그러자 수염 난 청년은 자신의 손목에 볼펜으로 그려놓은 손목시계를 보여주며 씨익 웃었다. 볼펜으로 엉성하게 그린 손목시계는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게 놀랄 건 없습니다. 이 손목시계는 항상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거든요. 왜냐하면 나는 새벽 세시를 가장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새벽 세시라는 시간에 대해 아십니까. 그 시간은 깨어있던 것들이 모두 잠들고 잠들어있던 것들이 깨어나는 시간이죠.”

나는 맥이 풀려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때 헬멧을 쓴 히피 할머니가 나타났다.

“벌써 아홉시란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겠구나.”

히피 할머니는 내 머리에도 헬멧을 씌워 주었다. 카페 문을 여니 밖이 깜깜해져 있었다.

“잘 가. 모모.”

“만나서 반가웠어.”

“다음에도 꼭 놀러와.”

얄리, 수자언니, 도라에몽 아저씨, 그리고 카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문 밖까지 나와 배웅을 해주었다. 나도 그들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오토바이는 차가운 밤바람을 헤치고 미끄러졌다. 어느새 우리 동네가 모습을 드러냈다. 회색빛 아파트 건물, 텅 빈 놀이터, 잘 가꾸어놓은 아파트 화단. 늘상 봐왔던 풍경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왠지 다르게 느껴졌다. 나를 둘러싼 풍경과 사람들, 그리고 나마저도 이전과는 다른 눈빛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참 이상한 카페와 사람들이었어.”

작별인사를 한 후 멀어지는 히피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지난 반년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 방안에서 숨어 지냈던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친한 친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들조차 피해 다녔던 내가, 봄 햇살 앞에서 고개조차 들 수 없었던 내가 그곳에서 사람들과 있었을 때는 정말로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겐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보일지 몰라도 내게는 아주 커다란 사건이었다.

응답 1개

  1. 서울사는만두말하길

    모모도… 히피 할머니만큼 멋진 사람이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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