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난세(亂世)에 즐거워도 되나?

- 오항녕

사마광을 핑계 삼아

《자치통감(資治通鑑)》이라는 획기적인 역사서로 알려진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란 분이 있다. 물론 《자치통감》이 왜 획기적인 거작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통사(通史)로는 사마천의 《사기》이후 처음이고, 편년체 통사로는 《춘추좌씨전》이래로 처음이다. 거기에 20년에 걸친 자료수집과 편찬, 고증의 성과는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 등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의 관견(管見)으로 볼 때도 압도될 저작이니, 제대로 아는 분의 눈에는 어떨까?

통상 이 분은 우리에게 왕안석(王安石)과 쌍으로 기억된다. 왕안석의 신법당(新法黨)과 대립한 구법당(舊法黨)의 영수로 알려져 있다. 이름이 구법당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곧잘 사마광을 보수, 왕안석을 진보, 이렇게 놓는다. 이런 구도에는 사마광이 주자 등의 사상적 선배라는 사실 때문에, 즉 성리학의 계보에 있기 때문에 보수적이라는 근대적 편견이 자리하고 있다.(물론 내 생각은 다르다. 오히려 왕안석의 국가주의와 사마광의 공동체주의의 대립에 가깝다. 논의의 여지가 듬뿍한 논제일 것이다. 작은 실마리는 얼마 전에 프레시안 북스16호에 실었던 서평, 《대동법:조선 최고의 개혁》 참고. 주소는, http://www.pressian.com/books/default.asp)

각설하고. 오늘 이 분 얘기를 꺼낸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남보다 나은 데가 없다. 다만 평생토록 내가 한 일 가운데,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 없었을 뿐이다.
[吾無過人者, 但平生所爲, 未嘗有不可對人言者耳.]

이 말은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에 나오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소학(小學)》 〈선행(善行)〉편에도 실려 있다. 그런데 이 어른께서 말씀 참 주눅 들게 하셨다. 남보다 나은 데가 없다? 그런데도 평생 한 일 가운데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건 없다? 이 말을 기독교 식으로 바꾸면, 주님 앞에 회개할 일이 없다, 가 된다. 이게 겸손이야, 자부야? 아니면, 둘 다야?
사마광이 정말 그렇게 살았느냐, 그냥 하는 말 아니겠느냐, 고 묻는 분들에게 난 할 말이 없다. 나에게 확실한 건, 사마광의 저 말이 나를 살 떨리게 했다는 기억과, 지금도 살 떨리게 하고 있다는 체험뿐이다. 그리고 내 감(感)이 맞다면, 사마광은 거의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아래는, 사마광처럼 다는 못 보여드리고, 15% 정도 빼놓고 보여드리는 난세의 즐거움이다.

즐겁게 늘어놓은 일들

– 원래 전주에 집을 얻으면서 수유너머 남산의 서경재와 같은 공동생활 겸 게스트하우스를 염두에 두었다. 그래서 주변에 단독주택을 알아보았는데, 집세도 만만치 않았고 여러 준비도 안 되어, 이른바 ‘투룸’, 즉 방 2개짜리를 얻었다. 말이 투룸이지 거실과 방으로 되어 있다. 그동안 꽤 많은 팀이 거쳐 갔으니 게스트하우스 노릇은 한 셈이었다. 전주 생활이 조금 안정을 찾아가면서 학과 사무실에 모집 공고를 붙였다.

“미래는 함께 사는 사람들의 것이다! 운운. 생활비 10만원, 생활규칙 몇 조항. 남자 1명/여자 2명, 또는 남자 3명. 《돈의 달인》을 읽고 그 비전에 동의하는 분은 메일로 연락하시고, 여차저차한 과정을 거칠 예정입니다.”

미리 몇 달 전부터 소문을 내놓았던 터. 한 남학생이 지원했다. OK. 몇몇이 눈치를 보는데, 아침 6시 30분 이전 기상이라는 조건 때문에 망설이는 모질이들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7시로 늦추었다. 그런데 막상 둘이 살아보니, 투룸에 더 많은 사람이 살기에는 불편했다. 역시 방과 마루는 다른 개념이었다.

그래서 아파트 작은 데로 옮겨가려고 하는데, 마침 같이 공부하는 분이 전세를 놓을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시세보다 팍 깎아서.(이건 내가 요구한 게 아니라, 그 분이 먼저 제안한 거다. 취지가 좋다며.^^) 6월쯤 판단을 하려고 한다.

그런데 같이 사는 남자가 무척 먹는다. 쌀이 금방 떨어진다. 반찬도. 그에 비해 전주는 쌀이나 음식을 버리는 데 익숙하지 않다. 어서 마구 버리는 풍토를 조성해야겠다. 우리 집에.

– 이번 학기에 맡은 학부 과목이 ‘역사학개론’. 65세쯤 역사학개론을 내려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서, 신임인 주제에 과감히 맡았다. 교재는 폴 벤느의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와 사마천의 《사기열전》. 일주일에 두 번인데, 화요일엔 벤느를 읽고, 금요일엔 사마천을 읽으며 벤느의 얘기가 사마천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살펴본다.

첫 시간. 노트를 가져온 분은 손에 꼽을 정도. 나머지 놈들은 멀뚱멀뚱. 이 과목만을 위한 노트 준비, 매 시간 해당 교재에서 씨앗문장 1000자 이상 쓰고, 400자 이상 암송, 요렇게 했더니 눈치가 심상치 않다. 그래서 못 박았다. “역사학과는 내 과목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런데도 수강신청 정정기간에 무려 17명이 도망을 갔다. 어리석은 것들! 그로부터 사흘 뒤, ‘역사학개론’은 ‘전공선택’에서 ‘전공필수’가 되어 나타났다. 도망친 어린 양들은 내년에 들어야 한다. 흐흐.

먼저 학생들 이름부터 외웠다. 연도와 이름 외우는 데는 젬병인 내가 역사학은 왜 택했는지, 참. 그래도 두 주 만에 다 외웠다.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앉는 자리를 각자 선호하는 자리로 정했다. 사진과 앉는 자리를 염두에 두면서, 며칠 외웠더니 신기하게 잘 외워졌다.

두 주 동안 번역도 안 좋은 벤느 책 보랴, 씨앗문장 쓰랴, 안 해보던 암송 하랴, 흔들리던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던 그들은, 자신들의 씨앗문장이 벤느 논지의 핵심임을 확인하면서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그렇다! 누구나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

– 3년째 전주에서 계속하고 있는 책읽기 모임, ‘인간+X’. 일명 ‘봄’. 지난 몇 달 동안 《꿈꾸는 기계의 진화》와 《뇌, 생각의 출현》을 읽었다.(인천 독서모임 일로 한 분을 뵈었는데, 글쎄, 그 분이 《꿈꾸는 기계의 진화》를 선물로 주시는 게 아닌가! 역자였다.) 이너스의 한 글자도 버릴 게 없는 글, 박문호의 아름다운 강의. 조금 어려웠지만 다행히 모임 멤버 중에 의사가 한 분 있어서 도움이 컸다. 기억-의식이라는 주제의 연장에서, 4월부터는 융의 《자서전》을 읽는다. 이번에는 심리학을 공부한 기자 한 분이 멘토를 자청했다. 이래저래 되는 집안이다.

새 식구들이 늘어나 이제 내 연구실로는 부족하다. 내 강의를 듣는 학생이 참여했고, 전북대 선생님 한 분이 참여했고, 또 몇 분이 더 오겠단다. 전주시에서 독서모임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지원 자체가 중요하기보다, 곳곳에 자발적인 독서모임이 있다는 사실이 서로에게 반가운 듯했다. 그래서 서로 견학도 한다고 한다. 4월 8일 금요일에는 ‘봄’ 모임에 견학을 오는 날이다. 차와 와인을 대접할까 한다.

– 유난히 나랏돈과 인연이 많은 내가 또 나랏돈을 받아 전주에 와서 문집도 번역하고, 좋은 인연들과 함께 공부한 지 1년이다. 하던 공부야 그렇다 치고, 문집 번역은 처음이었다. ‘언어는 학문의 기본’이라고 다짐하면서도, 늘 한문 실력에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참에 한 3년 서당 들어갔다고 생각하자는 마음이었다.

역시 어려웠다. 실록 같은 연대기는 그런대로 읽을 만했는데, 문집은 다양한 문체와 전거가 등장해서 한줄 한줄 버거웠다. 그래도 여러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이제 조금 길이 보인다. 전남 장흥 출신의 위백규란 분의 문집 번역을 마치고 교정 중이다. 5월에는 제대로 된 학술발표회도 가질 예정이다. 스스로 바닷가 벽촌의 선비라고 생각했던 조선시대 한 사람을 온전하게 만나보았다. 어떤 분이었는지 조금은 알 듯도 하다. 이 분을 그동안 학계에서 ‘실학자’라고 했다. 나는 이 분의 격물설(格物說)과 독사(讀史)를 다룰 생각이다.

다만 이 학과와 번역팀, 서로 너무 좋아해서 탈이다. 우리는 서로 ‘전우’라고 부른다. 말 못하는 15% 중 10%의 일이 대개 여기서 벌어진다. 공부하고난 뒤 서로 더 같이 있고 싶어서 공부를 노동이었다고 최면을 건다. 노동 뒤의 한 잔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물론 공부가 노동일 때도 진짜 있다.

난세에는 즐거움도 근심이라

거의 지방민이 되어 전주와 인천만 왔다갔다 하다 보니, 서울 나오는 게 일이다. 그래서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인사를 받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런데 참 난감했다. 잘 지내고 있고, 무엇보다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잘 지내고 있다. 행복하게. 근데, 이런 난세에 행복해도 되나?” 내 말에 벗들은 기쁜 마음으로 웃어준다.

그렇지만 사마광보다 한 세대 선배였고, 사마광처럼 나를 살 떨리게 했던 범중엄(范仲淹 989~1052) 선생께서는, “천하의 근심에 앞서서 먼저 근심하고, 천하가 모두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하리라. 이런 정도의 사람이 아니라면, 내가 누구와 함께 벗을 삼겠는가.[必曰,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歟. 噫, 未斯人, 吾誰與歸](〈악양루기(岳陽樓記)〉)”라고 하였다. 그럼 어찌 해야 하나? 근심해야 하나, 즐거워해야 하나? 아아, 난세에는 즐거움도 근심이구나.

응답 2개

  1. 바루말하길

    역시 공부란 혼자 하는 게 아니군요. 부럽습니다. 저는 이거 저거 또 딴 거, 이렇게 관심이 자꾸자꾸 흔들리는 터라 뭘 공부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을 걸고 공부해볼 만한 것을 아직 찾지 못할 것일까, 이런 헛다리도 짚어봅니다.

  2. 서울사람말하길

    선생님 글 중에서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집니다.^^ 난세라서 그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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