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노동잔혹사

고객님

- 김민수(청년유니온)

“야, 이 씨발년아.”

L은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린다. 긴 인생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수화기를 들자마자 육두문자로 화답 된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다. 앞으로도 이 일을 계속하다 보면, 이렇게 인간 본성에 반하는 무례함에도 실소를 머금으며 의연하게 대처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 의연해진다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얼마 전, L은 얼마 전 어느 통신사에 취직했다. (직.간접 고용 여부는 잘 모르겠다.) 이 통신사에서 그녀가 소속 된 곳은 ‘고객님’을 최전선에서 맞이하며 민원을 처리하는 텔레마케팅 전담 부서이다. 교육기간 동안 제공받는 임금 수준이 여느 웬만한 매장의 관리직 수준이고, 회사 차원에서 제공되는 복리후생 수준 또한 적절하다. 회사 위치도 집에서 가깝고, 밤에 일한다는 것이 조금 흠이지만 근무시간도 길지 않으니, 스펙만 놓고 보면 이래저래 괜찮은 일자리가 아닐 수 없다.

교육과정은 나름 재미있었다. 상업계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에서 배울 법한 ‘정보통신’ 이론들을 흡수하는 일은 제법 버겁지만, 존재에 대한 자부심 덕분인지 몰라도 열심히 공부했다. 가끔 청소년 시절, 연애에 대한 경험이 없는 티 팍팍 내며 어설프게 알량대는 영혼들이 거슬리긴 하지만, 동료 언니들과 진득한 수다를 떨다보면 어느새 아웃 오브 안중이다. 새삼스레 짜증이 나는 건 이 부서에서 총체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것은 거진 여성인데, 왜 이들을 관리한답시고 짐짓 거드름을 피우는 것들은 죄다 머리 벗겨진 아저씨들인지 모르겠다. 정당하고 합리적인 업무 능력에 따른 ‘승진’ 개념이 없는 것인가? 남녀고용평등과 양립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응징할 수 없는 지 궁금하다.

수화기를 들자마자 씨발 년 소리를 들은 것은, 이론 교육과정이 종료되고 텔레마케팅 업무에 처음 배치 된 날이였다. “반갑습니다 고객님”이라는 낭랑하고 매력적인 인사말을 건넸건만, 씨발 년이라는 화답을 받으니 가슴이 먹먹하고 아려온다. 기기 관련 민원을 넣은 중년 남성이었다. 처음 민원을 넣은 후 한참이 지나도 담당 부서에서 연락이 오지 않아 분노(…)가 극에 달한 것이다. 자기 자식들을 동원(?)해서 요즘 유행하는 SNS를 활용하여 이번 문제를 발칵 뒤집어 놓겠다며, 되도 안 되는 욕지기를 점진법으로 나열해가며 연설을 늘어놓았다. 출판물로 나온다는 비속어 사전 발행인이 이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또래 뻘 되는 자식도 있다는 인간이 면(面)의 익명성이 보장되는 수화기의 허술함을 활용하여, 이처럼 교양 있는 욕설들을 -그것도 책임소재가 분명하지 않은 일개 텔레마케터에게, 선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신하다. 대한민국에서 수화기를 드는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흡연률이 현저히 높다는 사실도 놀라울 것이 없다.

소비자의 분노는, 조금 나이브하게 표현하면 ‘자본’에 기인한다. 비용을 최소화하고 이윤을 극대화 하는 것이 자가증식 하는 자본의 생리가 아니던가? 여담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한국 자본주의는 절반만 존재하는 것 같다. -‘비용의 최소화’.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인사컨설팅을 통한 최저비용 노동력 삥땅치기, 납품단가 후려치기, 하.도급 업체에 책임소재 독박치기. 이와 같은 일련의 비용최소화 작업만으로도 자본증식에 문제 될 것이 없으니, 기업가 정신이니 기술혁신이니 따지면서 이윤극대화의 과정이 필요 없겠지. 닌텐도 쪼물딱 거리다가, 우리는 왜 이런 거 못 만드냐고 호통치는 가카께서는 반성문 써 오길 바란다. 자본주의 마저도 제대로 활용할 줄 모르는 녀석에게 국정을 맡기려니 피곤하다.

사족이 조금 길었다. 비용의 최소화를 조금만 더 읊어 볼까? ‘대 소비자 서비스의 축소’ 또한 비용 최소화의 일환이다. 소비자가 지불한 금액에 미치지 못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면, 자본은 그 간극만큼의 추가이윤을 확보한다. 이게 어떻게 실현 되냐고? 이것도 결국 노동의 문제이다. -‘사람을 덜 쓴다.’ 10명이 해야 할 일을 5명에게 시키면 된다. 5명의 노동자는 악몽 같은 노동강도 속에서 7명의 노동력을 달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는 마땅히 누려야 할 서비스의 7할만을 누리게 된다. 10할의 금액을 지불하고 7할의 서비스를 제공받은 소비자는 자신의 분노를 표출 할 1차적 목표를 찾게 된다.

“반갑습니다. 고객님.”

옳거니, 가뜩이나 열 받는데 너 잘 만났다. ‘텔레마케터 = 기업’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등식이 적용된다. 단결되어, 자본의 중심을 향해 표출되어야 할 소비자의 분노는 엉뚱한 곳으로 각개발산 된다. -대개는 썅욕으로.

정당한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한 당신의 분노는 정당하다. 하지만 우리, 이러지 좀 말자.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권한으로부터 완전 배제 된 존재에게 표출하는 분노는 ‘파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당장 손에 잡히는 텔레마케터를 향한 1차적 분노를 거두시고, 기업의 주인 되는 고객님의 이름으로 자본의 무차별적 탐욕에 철퇴를 내리시라.

그건 그렇고… 소비자가 누려야 할 정당한 서비스에 가지는 관심만큼, 노동자가 누려야 할 정당한 노동의 권리에도 관심이 폭발한다면, 세상은 한 뼘 더 아름다워질텐데.

응답 2개

  1. cman말하길

    소비자의 분노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봅니다. 폭력은 스스로 소멸되지 못하고 계속 유지되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생채기를 남기고도 살아 남는듯 합니다. 고용대리인을 세워 면피를 할려는 상술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런류의 문제를 한두 요인을 개선함으로 바뀔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한계가 있는 방안이고 결국은 건전하고 통합적인 소비자 운동이 함께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갈수록 우리들의 감정의 날은 날카로워지는데 이를 보드랍게 다듬어주는 공장은 어디 없을까요?

  2. longer말하길

    언제부턴가 고객님이란 말만 들으면 불편하더라고요. 고도의 감정노동을 감내하는 그분들 심정은 오죽할까 싶습니다. 늘 신선한 욕이 곁들여진 글, 재밌게 보고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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