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카이스트에 다니던 한 학생이 안타깝게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카이스트 학생이 자살을 한 사건이 올해만도 벌써 세 번째라는 기사와 함께. 다음 날 신문에서 그 학교 학생들이 학점에 따라 등록금을 차등 지불하는 제도 때문에 과도한 경쟁에 내몰리고 있고, 이로 인해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세상에, 학생들이 자유롭게 학문을 탐구하고, 즐겁게 공부해야 하는 그곳에서 한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과도 같은 생활을 해야 하다니. 최근 부쩍 텔레비전에서 많이 등장하는 서바이벌 방식의 실력자 가리기 프로그램도 함께 머리에 떠오르면서, 이 문제가 참으로 무섭고 심각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나는 가수다>나 <위대한 탄생>과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들의 실력에 감탄하기보다는 아슬아슬하게 합격하고 떨어지는 그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무척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당사자들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과히 경쟁과 실력이 신처럼 떠받들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실력이 좋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고, 무능함과 실수는 가차없이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는다. 그들의 마음에 영원히 새겨질 수도 있는 상처와 아픔에는 무관심하다. 이건 그야말로 일종의 병리 현상에 가깝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자극적이고 무서운데, 왜 사람들은 이런 것을 즐기는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중에 만난 책이 있다. 바로 데일 카네기가 쓴 <나의 멘토 링컨>이라는 책이다. 얼마 전부터 참여하는 독서모임에서 이 책을 읽기로 되어 있었다. 자기 계발서의 대가라고 불리는 데일 카네기가 썼고, 우리가 어릴 때부터 위인전을 통해 숱하게 접했던 미국의 대통령 링컨의 삶을 조명한 책이어서 처음에 이 책을 읽을 때는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책의 목차에도 ‘노력’이니, ‘성공’이니, ‘리더십’이니, ‘위대함’이라는 단어들이 등장하고 있어서,‘뭐, 뻔한 이야기가 나오겠지’하고 생각하며 약간의 의무감을 느끼며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책을 계속 읽다 보니 제목이나 목차와 전혀 다른 느낌이 엄습해 온다. 링컨의 삶이 성공이나 리더십과는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뼈저리게 겪어야 했던 가난함, 무능한 아버지와 일찍 병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 사랑하던 연인의 죽음, 전혀 사랑하지 않았던 여인과의 결혼, 거듭되는 정치적 실패, 대통령으로 재임할 당시 받아야 했던 숱한 비난과 공격 등. 우리라면 이 중에 한 가지만 겪어도 거의 삶에 대한 희망을 놓쳐 버릴 것 같은 상황에서, 링컨은 ‘그것을 훌륭하게 극복해 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 점에서 이 책은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는 울었고, 절망했으며, 괴로워했다. 알고 보니 링컨은 우리가 알고 있었던 그런 위인이 아니었다고 항변하는 듯한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내내 의아했고, 고통스러웠고, 슬펐다. 하지만 책을 덮으면서, 나는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 위대한 인물(위인)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쉴새 없이 덤벼드는 불행한 사건에 대해 평정심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링컨에 대해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것을 이 책에서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아니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원했던 성공인으로서의 링컨의 모습만을 발췌해서 보지는 않았나 싶다), 독서 토론을 하면서 어떤 이는 링컨에 대해 실망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구절은 그가 진정 인간으로서의 가치 있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였음을 잘 말해준다.
한번은 링컨은 실성한 여자의 재산을 가로채려믄 사기꾼의 음모를 막아준 적이 있었다. 링컨은 단 15분 만에 그 사건을 처리했고, 한 시간 뒤에 동료 변호사 워드 래몬이 수임료 250달러를 나누려고 그에게 왔다. 그런데 링컨은 그를 심하게 꾸짖었다. 그러자 래몬은 수임료는 미리 약속한 액수이며 여자의 오빠가 흔쾌히 모두 내준 것이라고 항변했다. 그러자 링컨은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라고 하면서 “하지만 나는 마음이 가볍지 않네. 그 돈은 말이야, 실성한 가련한 여자에게서 나온 돈일세. 이런 식으로 그 여자의 돈을 받느니 차라리 굶고 말겠네. 최소한 이 돈의 반은 돌려주게. 그렇지 않으면 나는 한 푼도 갖지 않겠네.”라고 반박했다. (125쪽)
선거 당일 밤, 링컨은 전신국에서 자신이 패배했다는 개표 결과를 보고 나서 집으로 향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추적추적 비가 내렸고 음울했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보도는 닳아서 미끄러웠다. 링컨은 갑자기 중심을 잃고 미끄러졌으나 이내 균형을 잡았다. 그러고는 ‘넘어진 것이 아니라 미끄러졌을 뿐이야.’라고 혼잣말을 했다. (169쪽)
(남북전쟁에서 전쟁을 지휘하던 포프와 매클렐런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고 비난을 하는 상황에서) 그러나 링컨은 넓은 이해심과 예수와 같은 마음으로 어느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다. 사실 포프는 패했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링컨 자신도 패배를 밥 먹듯이 했지만 실패로 인해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았다. 생각 끝에 링컨은 수족 인디언의 봉기를 진압하라는 지시를 내려 포프를 노스웨스트로 보내고, 다시 매클렐런을 임명했다. 그러면 왜 매크렐런을 다시 부른 것일까? 링컨은 이와 관련하여 “우리 군대가 절반만큼이라도 제구실을 할 수 있도록 지휘할 사람은 매클렐런 장군밖에 없다. 자신이 싸울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이라도 싸울 수 있도록 준비시킬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매클렐런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링컨은 ‘형편없는 매클렐런’을 다시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 때문에 비난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각 때문에 더욱 괴로워했다. 심지어 스탠턴과 체이스는 반역적인 언행에다 경멸스럽기까지 한 매클렐런에게 다시 군사 지휘권을 주느니 차라리 리 장군에게 워싱턴이 함락되는 것이 낫다고까지 말했다. 링컨은 그들의 맹렬한 반대에 너무도 큰 상처를 받은 나머지 만약 내각이 자신이 사임하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하겠다고까지 말했다. (220쪽)
또한 그의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었는지를 반증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죽은 직후 아들의 반응이다.
다음 날, 어린 아들 테드가 백악관에 찾아온 손님에게 아빠가 천국에 계시냐고 물었다. 그는 “틀림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테드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아빠가 돌아가셔서 기뻐요. 아빠는 이 곳에 온 후로 전혀 행복하지 않았거든요. 아빠에게는 여기가 좋은 곳이 아니었어요.” (328쪽)
문득 오늘날 성인으로 추대받고 있는 소크라테스, 예수, 공자와 같은 사람들도 당대에 어떤 대단한 업적이나 스펙을 쌓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감동하게 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남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고 불행했지만, 그 상황에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며 여유를 잃지 않았던 사람이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후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다양한 질문과 해석, 그리고 깨달음을 던져주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링컨 또한 내 마음 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을 것 같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세상,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세상, 오로지 남을 딛고 일어선 성공만이 행복을 보장한다고 외치는 세상에서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실패를 마음껏 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삶의 진정성을 놓치지 않으며 여전히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마음의 밭을 일굴 줄 아는 것, 그것이 결국 삶의 가치이자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이 책은 일깨워주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스스로 어쩔수 없는 미래에 대하여 대책없이 두려워만하고 있는 때가 종종 있는데 이 글을 보고 나름 위로를 받습니다. 더 힘차게 일어서서 오랫동안 걸어갈 준비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