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건강과 의학에 대한 단상

- Beilang(동아시아사상사연구자, 뉴욕이타카)

‘건강’은 우리 시대의 화두이다. 한 사회를 가르는 온갖 장벽들–계급, 학력, 지역, 성별 등을 넘어서 이만큼 두루 공감대를 이루는 의제도 드믈 것 같다.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생명 개체 일반의 본능적, 보편적 욕구일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의 넘치는 건강에 대한 관심의 배후에는 인간의 몸에 대한 이해를 대표하는 ‘의학’이 있다. 의학은 단순한 몸의 이해를 넘어 그 몸의 이상(병)을 진단하고 그 이상을 어떻게 정상으로 되돌리는가(치료)를 그 주업으로 삼는 근대적 학문분과이자 지식체계로 그 분야의 연구자들은 지속적으로 우리 몸(과 질병 그리고 치료)에 대한 지식을 생산하고 있고 그 지식의 일부는 미디아를 통해 건강정보로 유통되고 각종 약품과 건강상품으로 상업화 된다.

그러나 소위 ‘전문가’들에 의해 생산된 다양한 지식의 파편들이 얼마나 신뢰할 만한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건강한 삶에 기여하는 지는 불확실하다. 우리는 ‘황우석 사건’을 통해 과학지식의 생산과 유통 과정이 어떻게 탐욕과 오류에 의해 타락하고 왜곡될 수 있는지 그리고 과학이 어떻게 민족주의 같이 과학과 무관해 보이는 외적요소와 연결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각성 뒤에는 여전히 과학의 객관성에 대한 믿음, 과학적 발견이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신천지에 대한 환상, 그리고 과학자의 중립성에 대한 신뢰와 과학적 검증과정의 엄밀성에 대한 기대가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이 전제들은 얼마나 타당한 것일까? 철저한 공적 검증과정을 거친 연구들은 탐욕과 오류에서 자유로운 것일까? 아니 그 이전에 탐욕과 오류에서 자유로운 과학 연구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지난 겨울 존 이오너디스(John Ioaniidis)에 관한 흥미로운 글 한 편을 읽었다. 그는 과학자들의 연구결과를 검증하는 ‘메타과학자’로서 상당한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전문과학자 집단이 어떻게 과학적 지식을 구체적으로 생산하는지에 초점을 맞춰 그 연구결과를 검증하는 것이다. 과학자들에게는 꽤나 골치 아픈 과학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에 따르면 의사들이 의존하는 전문 학술지에 출판된 의학정보의 90 퍼센트에 오류가 있으며 이름난 학술지들에 실린 이런 연구의 상당수가 전혀 재검증이 되지 않은 채 인용, 재인용 되어 다른 연구의 근거로 재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는 가장 저명한 의학 학술지들에 실린 논문 가운데 최근 13년간 가장 빈번하게 인용된 34편을 검토해 그 가운데 14편의 연구에서 심각한 오류 내지 과장이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그가 오류 내지 과장이 있음을 지적한 연구들에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폐경기 여성에 대한 호르몬 대체요법, 비타민 E의 심장질환 감소 효과, 심장발작을 막는 관상동맥 스텐트 삽입술, 아스피린의 고혈압과 심장질환을 방지 효과 등이 포함되어 있다. (The Atlantic 2010. 11.)

전문 의학계의 기준에서 볼 때 가장 높은 공적인 신뢰를 얻었고 그래서 실재로 의사들에 의해 널리 시행되고 있는 연구결과들 상당수가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사태가 이쯤 되면 이를 개별연구자의 결함으로 몰아갈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지식생산 시스템의 구조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학계일반의 업적주의, 경쟁주의가 있음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가능한 많은 논문을 써내야 살아남고 또 인정받을 수 있는 환경[Publish or perish!] 속에서 연구자들은 엄청난 압박 속에서 가능한 짧은 시간 내에 효과적으로 흥미로운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는 연구에 집중하게 되고, 이런 환경은 부족한 표본, 성급한 자료 분석, 주목을 끌만한 과장된 결과 도출 등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그리고 이런 조급하고 제한적인 연구의 뒤에는 많은 혜택을 수반하는 학계에서의 인정과 함께 엄청나게 많은 돈이 있다. 센세이션을 일으킬 만한 연구로 단기간에 인지도를 높이고 큰 연구자금을 따내 그 돈으로 다시 새로운 연구논문을 만들고 이로 인해 다시 더욱 인지도를 높이고 더 큰 연구자금을 끌어들이며 연구결과를 특허로 상업화해 엄청난 수입을 올리는 순환구조가 작동하는 것이다. (참고로 미국정부가 과학연구에 한 해 투자하는 돈은 1400억불(160조원)에 이르며 이 중 상당수는 의학연구에 들어간다.) 의학연구자들은 여기서 꿈을 꾸고 여기서 욕망을 한다. 그리고 거대 다국적 제약회사로 상징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이것을 떠받치고 부추기고 이용한다. 그러니 놀랍지만 또한 당연하게도, 간호사, 의사, 병원 운영자, 보험회사, 제약회사 순으로, 즉 환자에서 멀어질수록 고수익을 올리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오류 내지 과장이 섞인 연구가 어떻게 이 시스템 속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돈을 벌어들이는지 그 대표적인 예가 있다. 1980-90년대에 FDA승인을 얻어 널리 처방되고 있는 졸로프트Zoloft, 프로잭Prozac 같은 항우울제가 그것이다. 자살충동과 유산 유발 등 많은 부작용이 알려지면서 소송이 제기되기도 했고 2000년대 초에는 이들 약품이 위약효과(placebo effect)를 넘어선 실제효과가 거의 없다는 연구까지 나오면서 그 효능에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음에도, 어떻든 이들은 미국에서 가장 많이 처방되는 약품이고 전 세계적으로 널리 팔리는 다국적 제약회사의 주요 수입원이다. (졸로프트는 2004년 한해에 미국에서만 33억불(약 3.7조원)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며 비아그라Viagra와 함께 세계 최대 제약회사 파이저Pfizer의 효자상품이 되었다.)
근대 전문가 집단의 고상한 존재 이유와 전문가 논리 저변에는 이런 적자생존의 논리와 자본주의적 탐욕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 나아가 전문가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사회적 시스템 자체가 그들과 결탁한 자본의 탐욕을 만족시켜 주는 메커니즘의 일부로 작동하고 있고 이 시스템이 전문가의 존재근거 자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섬뜩하게 다가온다. 정말 걱정이 되는 건, 사태가 이지경인데도 마땅한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태에 대해 우리가 어떤 적극적 요구를 하지도 못하며 어떠한 새로운 통찰도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학의 이름으로 그리고 전문가 집단의 권위를 빌어 오류로 점철된 제한적이고 잠정적이며 단기적인 연구가 우리 몸에 대한 보편적인 지식으로 둔갑하고, 그것이 막대한 상업적 이윤으로 돌변하는데도, 우리는 사태의 진실은커녕 자신의 몸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 게 없다. 우리 몸 안에 축적된 힘과 개인적, 역사적 경험이 가져다 준 다양한 통찰을 잃어버린 채, 전문가들의 시선에 몸을 내맡기고 각종 테스트에 몸을 내어주며 시험적 약물의 실험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삶이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자꾸 되뇌게 된다. 그것은 전문가 집단의 자기 인정 시스템에 따라 벌이는 자족적 게임에서 생산된 지식이 말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고,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의학 산업, ‘웰빙’ 산업으로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건강을 위해서는 누구에게도 -설사 전문가라 할지라도- 건강과 삶의 주도권을 쉽게 내줘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건강한 삶에 대한 질문은 개인의 신체에 한정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가령 우울증 환자가 급격히 늘어난다면 그것은 개인의 삶을 넘어선 더 큰 그 무엇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는 징후일 것이다. 개인의 몸을 단련하는 것만큼이나 우울증을 양산하는 잘못된 삶의 구성과 사회적 환경을 바꾸는 것도 처방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을 무시하고 전문가에게 섣불리 우리 뇌의 화학작용에 개입할 수 있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질병과 죽음을 생명에 반하는 것으로만 여기는 생각, 그것을 맹렬히 거부하려는 열망에서도 벗어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질병과 죽음에의 공포에 자리 잡은 개인적 무병장수라는 욕망이야말로 전문가집단과 자본주의 기업의 먹이감이며, 건강의 문제를 개별적으로 고립시키는 일일 것이다. 잘 살고 잘 죽는 것, 나를 둘러싼 공동체 그리고 환경과 의미있는 교감을 주고받으며 삶을 잘 꾸려가는 것이야말로 건강한 삶이 아니겠는가.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당신의 건강과 관련해서 무엇을 믿는가. 아마도 의학은 경제학과 함께 우리의 믿음을 차지한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신학일 것이다. 우리에게 불로장생의 꿈과 무한한 풍요를 약속하는 현대판 신들을 떠받드는 학문들이다. 나는 그들에게 내 믿음과 삶을 내맡기고 싶지 않다. 내가 믿는 것은 내 삶을 이루고 있는 더 크고 다양한 삶들과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엄정한 사실 그리고 내 삶의 건강은 그들의 건강과 별개로 추구될 수는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응답 1개

  1. 카모마일말하길

    사람들은 모두 죽어가지만 그걸 자각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더군요. 그저 영화 속 먼나라 이야기 마냥 바라만 보다, 코앞에 닥쳤을 때 그제서야 당황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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