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3호] <불신지옥>과 <독>을 통해 본 2009년 대한민국의 지옥도 2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씨네꼼

<불신지옥>과 <독>을 통해 본 2009년 대한민국의 지옥도(2/4)

1. 개신교와 반공 극우주의와의 결탁

<불신지옥>에서 짧지만 강렬한 공포를 안겨주는 인물로 경비원을 꼽을 수 있다. “월남전…베트콩…빨갱이 새끼…재수 없고 요망한 년…십창을 내어…삼청교육대…서울대 나온 놈이 내 앞에서 벌벌벌….” 등의 섬뜩한 언사를 자기도취 상태로 내뱉는가 하면,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한 태도를 보인다. 또 희진의 환상 속에서 누워있는 희진에 올라타 다리를 긁어대는 행동은 성추행을 연상시키고, 배터지게 농약을 먹고 게워내고 죽은 모습은 지독한 탐욕을 연상시킨다.

극우 반공주의자이자 탐욕에 가득한 마초로 보이는 경비원은 영화의 서사 속에서 개신교와 직접 연관되어 있진 않다. 영화는 개신교와 무속의 내적 연관관계를 밝히지 않고 병치시켰듯이, 개신교와 극우반공주의도 슬쩍 병치시켜 놓는다. 그 결과 서로가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면서 세 이데올로기가 맹목적이고 극단적이며 반사회적이라는 점에서 가족유사성을 띄며,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연상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현실에서 개신교와 극우반공주의는 <불신지옥>의 다소 소심한 연상기법보다 훨씬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는다. 2003년 잇달아 열린 시국기도회에서 활보하던 ‘군복 입은 할아버지들’을 익히 보지 않았던가? 21세기 한국사회 개신교의 성격을 파악할 때 극우 반공주의는 핵심적 사안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개신교는 극우 반공주의와 결탁하게 된 것일까? 개신교의 현실 정치적 위상이 직접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건 김대중 정부 이후이다. 그전까지 개신교는 ‘정교분리’의 탈정치성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탈정치성은 그대로 정치성이기도 했다. 일제강점이나 독재정권에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승인하는 것’이 보수적인 개신교의 입장이었다. 이는 선교사에 의해 개신교가 전해졌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조선민중들은 개신교가 조선 독립에 도움이 되리라 기대하였지만, 선교사들은 개신교를 민족 해방의 복음으로 이해하는 것에 우려를 나타냈다.

러일 전쟁을 전후해선 일본침략을 승인하는 모국의 입장에 따라, 조선인들 사이에 반일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차단하려 하였으며, 1907년 부흥운동을 비롯해 1910년 100만인 구령운동 등은 조선 민중들에게 ‘개신교는 독립운동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영적인 구원을 추구하는 종교’임을 강조하고 ‘정치화된 그리스도인들’을 교회에서 추방하고 교회를 정치운동으로부터 정화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많은 개신교인들이 3.1운동에 참여했지만, 이는 개신교가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결과가 아니라, 개신교가 서구 열강들의 종교인만큼 일제를 제압할 힘을 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개신교에 귀의하였고, 유관순의 예에서 보듯이 개신교계 근대교육기관을 통해 개신교계 근대지식인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힘에 대한 갈구’가 바탕이 된 믿음은 일제의 ‘힘’이 확인되자 급격히 무너졌다. 3.1운동의 실패 후 더 이상 조선독립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자발적인 친일인사(가령 감리교계 윤치호)들이 출현하였고, 개신교계는 급격하게 친일로 돌아섰다. 1930년대 신사참배 문제로 교단이 갈라졌는데, 결국 조선교회는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국민의례라며 공식적으로 받아들였으며, 끝까지 우상숭배라며 저항한 목회자들은 투옥되거나 교단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일제의 승전을 위한 개신교인들의 ‘무운장구기도회’가 8,953회 열렸다.

친미, 반공, 자유(시장) 주의

해방 전 조선 개신교인의 60%가량인 20여만 명은 평양, 원산 등 이북지역에 거주하였다.  이들은 우익정치운동을 주도하다가 이들을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이며 민족해방과 사회변혁의 장애물로 간주했던 사회주의자들과 충돌하였는데, 해방 후 충돌은 더욱 격렬해졌다. 북한에 공산정권이 수립되자, 하층민 개신교인들은 찬동하였지만 북한 내 반공투쟁을 이끌었던 지주와 중산층 개신교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교권을 박탈당하였다. 북한지역의 개신교인들 중 35-50%에 해당하는 7만-10만 명이 한국전쟁을 전후해 월남하였고, 이들이 남한 개신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교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공산정권에게 핍박당한 경험을 통하여 남한 내 격렬한 반공주의자가 된다. (가령 제주 4.3 학살을 비롯하여 우익테러를 자행했던 ‘서북 청년단’은 서북지역에서 월남한 감리교인이 주축이 된 개신교 청년단체이다.) 남한 지역의 개신교계 역시 신사참배 등 친일 행적을 가리기 위하여 일제를 물리친 미국을 열렬하게 환영하였으며, 개신교도이자 친미 자유주의자인 이승만 정권을 적극 지지하였다. 결국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개신교계는 친일에서 친미로 갈아탔거나 목숨 걸고 북한 정권으로부터 도망쳐 온 극렬반공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이들에 의해 ‘친미-반공-자유(시장)주의’가 한국 보수주의 개신교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는 약 50년간 독재정권을 지지하는 버팀목으로 작용하였다. 민주화운동을 외면하고 정권에 대한 불만을 반공안보의 논리로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하였으며, 그 대가로 세제(稅制)나 군종(軍宗), 대규모 부흥집회 등을 통해 신자수가 폭증하는 혜택을 누렸다. 1966년 박정희 군사정권 때 시작되어 매년 열렸던 ‘대통령 조찬기도회’나 1980년 8월 6일 전두환이 5.18 학살의 공로로 대장 진급을 하던 날 개신교 지도자 23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전두환 장군을 위한 조찬기도회’는 이러한 밀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의 결과 얻어진 6.29 선언은 보수주의 개신교에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이들과 달리 70년대 이후 진보적인 사회참여에 목소리를 내고 민주화 운동에 동참해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가 1988년 반공주의를 죄로 단정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을 발표하자 이에 대한 반동으로 극우 반공주의 개신교지도자들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을 출범시키고 총집결하였다. 이후 이들은 재정지원을 빌미로 KNCC에 침투하여 진보세력을 주변화시키고, KNCC의 진보적 성격을 탈각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개신교계는 극우 반공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되었고, 개신교단 내부에서 진보진영은 소수파가 되었다.

한기총의 주도세력은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장로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다. 또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기독교정당 결성과 본격적인 정치참여가 논의되었다. 1997년 대선에서도 개신교 보수 세력들이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외환위기 사태는 김대중 정부를 출범시켰다. 처음으로 자신들과 반대 입장을 가진 김대중 정부의 출범에 개신교 보수 세력은 크게 동요하였다. 특히 햇볕정책은 ‘반공을 매개로한 정권과 개신교의 공생관계’를 깨는 것이었다. 여기에 2001년 단군상 철거 혐의로 목사 3명이 구속되자 정권에 대한 반감이 촉발되었다. 한기총은 서울역 집회에서 “김대중 정권 각성과 사법부 퇴진”구호를 외쳤다. 개신교 보수 세력들은 정권 재창출만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회창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2002년 여중생 압사사건으로 촉발된 촛불집회를 계기로 반미감정이 표면화되고, 그 여파로 노무현 정권이 창출되자 친미 반공 이데올로기를 표방해 온 보수주의 개신교계는 결집되었고, 조갑제등으로 대표되는 개신교 바깥의 극우 반공주의 세력과의 공조가  일어났다.

2003년 1월 시청광장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가 두 번이나 개최되었다. 한기총을 중심으로 한 보수교회가 재향군인회 등 보수단체들과 함께 연 집회에서 10만 명의 개신교인들이 북한 핵무기 개발 규탄, 주한미군 철수 반대, 반미 감정 자제 등의 구호를 외쳤다. 3.1절에는 여의도와 시청에서 동시에 열린 집회에선 한손에는 태극기, 한손에는 성조기를 든 개신교인들이 ‘We love USA’ 피켓 아래에서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며 기도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이후로도 ‘구국 기도회’는 계속 이어졌다.

2004년에는 한국기독당이 창당되었다. 2005년 12월 사학법이 개정되자, 가장 많은 사립학교를 지닌 개신교계는 격렬히 저항하였다. 2006년 1월 영락교회에서 ‘기독교 사학 수호를 위한 구국 기도회’를 거행한 후 시청까지 ‘십자가 행진’을 벌였다. 9월에는 시청에서 5만 명이 모인 가운데 ‘비상 구국기도회’를 열고 전시작전통제권 단독행사 유보 및 사학법 재개정을 촉구하였다. 2006년에는 12월에는 ‘사학법 재개정 촉구를 위한 연합기도회’에서 목회자와 교회지도자 수 백 명이 삭발하였고, 재개정에 찬성하지 않은 국회의원에 대한 낙선운동을 벌일 것을 천명하였다.

이명박 장로

이어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장로 대통령 만들기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2007년 3월 ‘국가와 민족을 위한 조찬 기도회’에서 김홍도 목사는 노골적으로 ‘장로 대통령’이 나와야 함을 역설하였고, 7-8월에 주일예배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예수 잘 믿는 장로’가 경선과 대선에서 승리하도록 기도해 선관위로부터 서면경고를 받았다. 경선에 당선된 바로 다음날 한기총을 방문한 이명박 후보에게 한기총의 회장은 축하와 지지의 변을 안겼다. 이러한 지지는 취임이후로도 계속 이어진다. 2008년 6월 촛불 정국에서도 김홍도 목사의 “빨갱이를 잡아들이라”고 발언하였으며, 8월에는 한기총이 시청광장에서 ‘나라사랑 특별 기도회’를 열어 국론통일과 국가안보, 경제발전과 한미동맹 강화를 축원하였다. 2009년에도 마찬가지였다.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후 추모정국이었던 지난 6월, 각계의 시국선언이 쏟아져 나올 때도 한기총은 “자살을 미화하고 민생을 혼란케 하는 선동을 중단하라”는 시국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상에서 보듯 2009년 현재 한국의 정치상황에서 가장 강력한 극우 반공주의의 축은 개신교이다. 이들은 친일-친미-반공-독재로 이어지는 태생적 연원을 가지며, 이는 한국 근현대사 전반을 관통하는 남한사회 지배세력의 형성사와 그대로 일치한다. 김대중 정권 출범으로 역대 정권들과 맺어왔던 반공주의 카르텔이 무너지자, 개신교는 반공주의의 마지막 보루로서 극우 단체들과 제휴한다. 이 제휴를 이끈 것이 ‘조선일보’의 조갑제라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한기총으로 대변되는 한국 개신교는 엄청난 물적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현실정치에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 그 정점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이명박 장로대통령’이다.

이것이 21세기 신정정치의 풍경이다. 2008년 촛불정국에서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추부길 목사는 “사탄의 무리” 운운하다가 문제가 되자 관용어구라고 둘러댄 적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수사는 그저 수사가 아니다. 소망교회와 이명박 정권의 면면에서 보듯이, 보수주의 개신교는 북한을 자극하여 평화를 위협하고 권력자에게 힘을 실어주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현실적인 힘을 지닌다. 그것이 개신교를 바라볼 때 느껴지는 공포가 (<불신지옥>의 경비원으로 표상되는) 군복 입은 극우 할아버지를 바라볼 때 느껴지는 공포보다 훨씬 큰 이유이다.

– 황진미

응답 2개

  1. 뤼미에르말하길

    잘 읽고 갑니다^^

  2. 올빼미말하길

    와우, 사진 대박!
    읽어두면 도움이 될 듯한 정보이나 너무 길어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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