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들어야 할 때

- 윤여일(수유너머R)

1.

3월 11일, 일본 동북부에서 대지진이 일어난 날 저녁, 일본의 지인들에게 안부를 묻는 메일을 보냈습니다. 하루 이틀에 걸쳐 다들 답장을 보내줘 일단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도쿄에서 2년 가까이 체류한 적이 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작은 규모이긴 해도 이따금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지진 보도가 뉴스에 흐르는 것은 낯설지 않은 일상의 풍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지진은 일상을 무너뜨렸고 그 피해는 참담했습니다. 그곳의 일상을 떠나왔지만, 뉴스를 보는 동안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원자력 발전소의 긴박한 사태가 신문의 1면을 메우기 시작한 것은 3월 13일부터였습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았지만, 방사능 유출은 일본사회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사태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원자력 발전소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자 일본에 있는 지인들이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지진 피해를 확인했을 때와 달리, 시시각각 변하는 방사능 피해상황 아래서는 메일로 안부를 묻기가 어려웠습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이 또 어떻게 달라질지 몰라 괜찮은지 물어보아도 상대로서 답하기란 쉽지 않으리라 짐작했기 때문입니다.

2.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은 곧잘 그렇게 묘사됩니다. 상투적 표현이지만 이 말에는 어떤 진실이 담겨있는지 모릅니다. 흔히 ‘가깝다’는 일본이 지리적 거리에서 그렇다는 것이며, ‘멀다’란 일본과의 민족감정의 간극이 크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지내는 동안 저는 ‘가깝다’와 ‘멀다’에 관한 다른 원근감을 경험했습니다.

어떤 나라든 그 나라에 관심을 갖고 그곳 사람들 속에서 헤맨다면 그 나라는 가까운 곳이 될 수 있습니다. 장시간 체류가 아니라 여행이라도 말입니다. 현지인의 살아가는 모습에서 뜻밖에 친근한 구석을 발견하거나, 낯선 정경이 마음속에서 바라왔던 장면과 포개지거나, 혹은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지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와 사람들에게 관심 이상을 갖는다면 가까워지는 만큼 멀어지기도 합니다. 진정 대상을 소중하게 느낀다면 함부로 다가가 멋대로 의미를 부여하거나 끄집어낼 수 없습니다. 대상에 매력을 느낄수록 서둘러 본질을 꿰차고 싶어지지만, 진정한 애정이라면, 애정의 대상이 타사회라면 인식의 거리도 생겨납니다. 대상을 함부로 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웃나라를 대할 때 ‘가깝고도 멀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지진이 일어난 다음날, 고등학생들에게 논술을 가르칠 일이 있었는데 지진 이야기로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당부했습니다. 인터넷 댓글에 일본 사태를 희화화하거나, 피해자들에게 상처가 될 말은 하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2008년 쓰촨 대지진 때가 기억납니다. 그해 중국은 한국의 언론 공간에서 일 년 내내 화두였습니다. 소위 독만두 사건으로 그해를 시작해, 봄에 티베트 사태가 발발하고, 이윽고 쓰촨 대지진이 이어졌으며, 다음이 베이징 올림픽이었습니다. 그렇게 중국은 줄곧 회자되었지만, 그해를 겪으면서 한국 사회가 중국에 관해 더 알게 되거나 더 느끼게 된 것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한국 사회라고 통칭한다면 거창하겠지만, 지금도 한국의 대중매체에서 중국 이미지는 세 가지 방식으로 패턴화되어 유통됩니다. 중국의 낯선 풍습이나 기괴한 사건들을 다루며 ‘이국성’을 끄집어내는 내용, 중국사회의 비민주성이나 언론의 부자유, 도시 농촌의 격차 등에서 ‘낙후성’을 짚어내는 내용, 그리고 경제적인 영역에서의 중국위협론입니다. 이웃나라 중국을 대하는 시각은 너무나 정형화되어 있으며, 중국을 향한 ‘가깝고도 멀다’는 원근감은 잘못된 방향으로 뒤틀려 있습니다.

일본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자 고등학생들에게 그런 당부를 한 까닭은 쓰촨 대지진 때를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국의 네티즌들 가운데는 쌤통이다, 더 죽어야 한다며 중국인을 조롱하고 비난한 자들이 있었는데,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중국의 네티즌이 그런 댓글을 번역해 중국의 사이트에 올렸고, 그리하여 한국인에 대한 감정이 격앙된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진의 피해가 무엇인지를 아는 일본의 네티즌은 대개가 중국인들을 위로하는 논조로 글을 올렸습니다.

고등학생들에게 비방조의 댓글은 자칫 중국인을 화나게 할 수 있으니 쓰지 말라고 당부한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그런 비이성적 적개심이 자신을 먼저 해칠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4.

이번은 쓰촨 때와 달랐습니다. 모금 운동이 전개되고, 민족 감정보다는 인간애가 중시되는 분위기였습니다. 어쩌면 일본 동북부가 쓰촨보다 실감의 거리가 훨씬 가깝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이번에는 지리적 가까움이 정서적 가까움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수요집회는 희생자 추모집회로 열렸습니다.

한국의 언론도 일본 돕기를 거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연히도 일본 사태를 보도할 때 여러 프레임이 뒤섞였습니다. 대지진이 발생한 날, 저는 조선일보 기사를 보고 경악했습니다. 이번 일본 지진으로 일본의 내수경제가 살아 장기적으로는 경기가 부양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해서는 안 될 진단은 아니지만 1분 1초가 다급한 마당에 너무나 여유를 부리고 있어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한국 주가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가 주요기사로 올라왔습니다. 언제부턴가 한국 언론을 보면 주가는 전국민이 기르는 자식인 것처럼 의인화되어 있어, 모두가 그 성장을 염려합니다. 연구실 동료들에게 아마도 인간은 지구의 종말 때까지도 주식을 할 거라고, 그때는 종말테마주가 인기일 거라고 쓴 맛으로 말했습니다. 더불어 포털사이트에는 도쿄의 세계선수권 대회를 통해 1년 만에 복귀하는 김연아의 무대가 이번 지진으로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는 기사가 상단에 올라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습니다.

그 후 며칠 동안은 일본의 시민정신을 상찬하는 보도가 흘러나왔습니다. 참담한 지진 피해에도 동요하지 않고 질서를 지키고 있다며, 세계가 감탄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보도에는 일본인들이 싫더라도 배울 건 배워야 한다는 훈계조가 곁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불편한 느낌도 있었습니다. 아마 일본의 매스컴에서도 “세계가 우릴 지켜보고 있다”는 식의 논조가 기승을 부릴 텐데, 그런 논조가 일본 사회에서 지니는 위력을 생각해보면 저런 보도가 그저 감탄할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원자력 발전소에 남은 결사대 등의 영웅 만들기 서사나 감동을 지어내는 휴먼드라마도 빠르게 유통되었습니다. 그런 보도 역시 일본의 매스컴을 차용한 것일 텐데, 참담한 현실을 참담하게 바라보지 못하도록 눈길을 빼앗는 것 같아 제게는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더 불만이었던 것은 한국 언론이 ‘일본 사태 특집’을 만들어 팔며 장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각 방송사는 지진과 쓰나미, 원전 사태의 쓰라린 피해영상을 경쟁적으로 흘려보냈습니다. 외면해서는 안 될 장면이었지만, 정작 피해자보다는 피해의 스펙터클함에 초점을 맞춰 영상적 자극을 안긴다는 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일본을 향한 안타까움 어린 시선, 더 나아가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태도가 마련되었습니다. 그간 언론에서 일본이 화제로 부상할 때, 일본은 한국인의 민족감정을 발산시키는 가장 편리한 회로로 기능하였으나 이번에는 그런 구도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였습니다.

5.

하지만 일본인을 위로하는 분위기는, 적어도 언론을 보았을 경우에는, 피해를 강 건너 구경할 수 있을 때까지였습니다. 방사능 물질이 바다 건너 한국까지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그 우려가 현실화되자 일본인을 애도하던 여유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일본발 재앙’에 대한 두려움이 대신했습니다. 결국 애도의 감정은 정신의 여유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 달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일본에 대한 보도는 폭증하고 유동하고 크게 회전하더니 결국 ‘독도 문제’에 안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존의 프레임은 되살아났고, 여전히 건재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바람의 방향도 바뀌어 며칠 후면 방사능비가 내린다고 하며, 일본에서 불어오는 남풍은 한국에 잠시 자리를 잡았던 (정서적으로) ‘가까운 일본’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6.

한국에서 일본 논의가 크게 왕복운동을 하여 애초의 자리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일본에서 희생은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웃나라에서 저렇듯 커다란 희생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 희생 속에서 우리가 남겨야 할 것은 없을까요. 저는 다시 2008년 중국을 떠올립니다. 그렇게 떠들썩하게 회자되다가 결국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일까요.

이번호부터 수유너머 위클리는 [일본에서 온 목소리]를 연재합니다. 이미 언론에서 일본은 관심사로부터 밀려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떠나가려는 그 관심을 부여잡고 싶습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일본에서 온 목소리를 더 들어야 합니다. 아직은 더 들어야 할 때입니다. 이 지진 사태가 한국사회에서 일본을 대하는 인식에 작은 균열을 낼 때까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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