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무한독전

크로포트킨과 한받-진지하고 꾸준하게 놀 궁리

- 유심

    침묵에 춤출 수 있는 단계
    파업에 춤출 수 있는 단계
    스트라이크아웃에 춤출 수 있는 단계
    계단에서 굴러떨어질 것 같은 자세-태도로 춤출 수 있는 단계
    아버지 잔소리에 춤출 수 있는 단계
    어머니 회초리에 춤출 수 있는 단계
    개망신 당하면서도 춤출 수 있는 단계
    산속 숲속에서 다람쥐 토끼 꿩 매 나무 앞에서 춤출 수 있는 단계
    물개 앞에서 춤출 수 있는 단계
    춤앞에서 춤출 수 있는 단계
    뼈앞에서 춤출 수 있는 단계

(‘생각해볼 수 있는 단계’ 블로그 ‘수도사의 계략’ Yamagata Tweakster 항목 중에서)

지난 주말 당신은 무얼 했는가? 놀았다고? 아주 좋은 대답이다. 하지만 어떻게? 내가 궁금한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정말, 잘 놀고 싶다. 나는 대학 졸업 후에도 종종 옛친구들을 만난다. 직장을 다니는 친구, 대학원을 다니는 친구, 고시를 준비하는 친구들. 그 사이에서 나는 좀 이질적인 존재다. 대학원생도 아닌데 연구실(수유너머)을 다니고, 취직준비, 취집준비, 스펙 뭐 이런 것들은 다 무시한다. 연구실 다닌다고 다 그렇지는 않지만 고기, 술, 커피를 멀리한다. 아침에 요가하고 철학공부를 한다니까 분명히 ‘놀면서’ 사는 건 맞는데, 도저히 이 ‘놀이’코드가 맞지 않는다. 그런 나를 대동해 함께 놀러 갈만한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초반에는 거리를 하릴없이 배회하며 쏟아지는 신상품을 눈으로 학습하다 적당히 분위기 좋은 밥집, 술집, 찻집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우리 옛날이야기를 풀어놓다보면 친구들 소식과 각자의 현실 얘기가 나오고, 이어 사회에 대해 불만도 툭툭 터져 나온다. 하지만 요상하게도 나이를 먹을수록 온순해지는 우리. 세련되지 못한 걸까? 분노 한 번 시원하게 터뜨리지 못한다. 말미에는 서로의 앞날에 파이팅을 외친다. 그래도 우린 할 수 있다, 남들보다 조금만 더 참아보자,라고. 아니, 이게 뭔가. 너무 허망하잖아!? 세 시간동안 ‘박카스 광고’를 찍는 느낌. 놀고 있는 이 순간에도 직장인인 친구는 노동하지 않고 있다는 안도를, 구직중인 친구는 노동하지 않고 있다는 불안을 느낀다. 우리는 놀려고 만났지만 시원하게 놀지 못하고, 자신에게 허락된 ‘여가시간’ 동안 어찌할 바를 모른다.

“모든 활동에 노동-모델을 부과하는 것, 모든 행위를 가능한 노동 내지 잠재적 노동으로 바꾸는 것, 자유활동을 훈육하는 것, 또는 (결국은 마찬가지이지만) 자유활동을 단지 노동과 관련해서만 존재하는 ‘여가’로 밀어넣는 것” (<천의 고원 II>, 이진경ㆍ권혜원 역, 280쪽)

책은 끝내 조직화된 노동을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인디언들로 인해 미국이 흑인을 노예로 들여왔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다.

들뢰즈 가타리는 인간 행위의 척도가 되는 표준인간과 그 노동-모델이 ‘국가의 공공노동’과 ‘군대의 조직화’를 통해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군대 갔다 와서 ‘정신 차리’고, CEO 대통령을 뽑고, 그의 대운하건설로 국가경제 재건에 동의하려는 마인드는,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일축시키고 그 자리에 오로지 노동 모델만을 남겨놓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모델’이 억압했다는 ‘자유활동’이란 뭘까? 그것은 분명 노동력의 재생산을 준비하는 ‘여가’는 아닐 것이다. 여가 아닌 놀이를 생각할 수 있는가? 노동-모델이 아니라 놀이-모델을 생각할 수 있는가? 새삼스레 개미와 베짱이 우화의 교훈이 떠오른다. 배부른 이야기는 일찌감치 치우라고 마음 속 제어장치가 작동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 놀이야말로 생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러시아 지리학자와 그러한 삶을 실천하는 한국의 가수가 있다. 먼저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를 살펴보자.

“개미에서 비롯하여, 조류를 거쳐, 최고의 포유류에 이르는 모든 동물이, 서로 붙들고 늘어지거나 경주를 하거나 서로 희롱을 하거나 하는 유희를 즐긴다 (…) 지나친 감동이나 남아도는 활력을 유희에 맡겨서 풀고자 하는 욕망, 감동을 전달하거나, 짤짤 지껄이거나, 혹은 다른 종류의 생물에 친근함을 느끼거나 하는 요구, 이런 것들은 모두 자연계에 충만해 있으며, 그 밖의 생리적 기능과 마찬가지로, 생명과 감동성의 현저한 특징으로 되고 있다.”

그는 새가 ‘때창’하는 습관, 춤추기 위해 모임 장소를 장식하는 습관 등 다윈의 책을 빌려 온갖 흥미로운 동물간 상호부조(혹은 놀이)의 예를 든다. 그리고 이 분석틀을 포유류의 한 종인 인간, 그들의 중세도시의 예로까지 확장해간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일관된다. 상호부조와 지지를 통한 경쟁 배제야말로 결과적으로 군체에 이롭다. 나아가 생존을 위한 연합뿐 아니라 오로지 ‘생의 즐거움’을 위해서도 동물들은 함께 어울린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런 발견을 한 크로포트킨은 러시아의 혁명가요 아나키스트 운동가였다! 노동이 아닌, 여가도 아닌 유희를 즐기는 동물, 그가 발견한 인간은 ‘생의 즐거움’을 위해 언제나 떼를 지었고, 동일종 혹은 별개 종의 개체들과 어떤 방법으로든지 커뮤니케이션하려는 욕망을 표현한다! 나는 이 멋진 크로포트킨의 발견을 읽으며 한국의 자립음악가 한받 씨를 떠올렸다. 그는 스스로를 ‘놀일’(놀이며 일인 활동)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자립음악가로 생존하는 법을 실천하고 있다.

“우리는 음악생산자입니다. 우리는 맨 처음 우리 자신을 위해 음악을 생산합니다./우리 자신의 위로와 즐거움, 기쁨과 슬픔을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나로부터 타인을 향해 내 몸과 목청과 신체를 통해 바깥으로 나아갔을 때 우리의 음악은 어떠한 다른/좋은(?) 가치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우선은 다른 이들과 쉽게 공감대를 형성시켜주고 위로를 주거나 기쁨 혹은 즐거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결국 당신과 내가 상품으로서의 음악이 아니라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다른 가치를 가지는 음악을 통해서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유저스토리북과의 인터뷰 전문’ 중)

그는 요즘 자신이 만든 노래를 씨디에 구워 화폐뿐 아니라 쌀 물물교환 등 다양한 방식으로 판매하는 방법을 궁리 중이다. 홍대앞의 작은용산 ‘두리반’ 철거반대, 장애인야학 노들의 투쟁 현장 등에 결합, 놀면서 일하고 자립해서 민중 엔터테이너가 되겠다고 그는 말한다. 나도 최소한으로 노동하여 그 돈으로 식비, 차비, 통신비, 학비대출금, 책값, 약값 등을 충당해 살고 있다. 즐겁게 사는 방법,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모여 진지하고 꾸준히 잘 노는 방법. 크로포트킨을 거쳐 한받 씨를 통해 나 역시 오늘도 궁리한다.

*이 글은 박성관 선생님의 다지원 강의 <크로포트킨: 사랑이 아니라 연대를!>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한받 씨의 많은 소셜네트워크 중 DAUM 블로그 <수도사의 계략>을 참조했습니다. 주소는 http://blog.daum.net/sudmazo.

응답 1개

  1. 프레지아말하길

    경쟁 속에서 토해져 나오는 소리와 ‘떼’ 속의 유희로의 소리는 분명 다른 음악이겠지요? 생각하시는 놀이가 뭔지 잘 들었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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