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노동잔혹사

편견

- 김민수(청년유니온)

“서울대 학생이네?”

학원 원장의 시선처리가 학력란에 고정 됨과 동시에, 여느 면접장에서 볼 수 있는 사무적인 분위기는 종결 되었다. 면접이라기 보다 동문회라는 타이틀이 어울릴 법한 화기애애함이 무르익고 난 뒤에는, 검토해보고 연락 주겠다는 요식 행위가 필요 없다. 앉은 자리에서 합격 발표를 받음은 물론, ‘원장과 동문’이라는 요상한 특권 덕분에 기본급에 약간의 프리미엄이 붙었다. 한국 사회에서 학연․지연․혈연 빼면 남는 게 없다더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K는 서울대 학생이다. 얼마 전 졸업했으니 서울대 ‘출신’이라는 표현이 조금 더 어울릴 지 모른다. 집에 오는 길에 만감이 교차한다. 조건 좋은 학원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아래 합격했겠다 프리미엄도 붙었겠다, 무엇이 문제냐 싶지만서도, 가슴 한 켠의 불편함은 지울 수 없다. ‘서울대’라는 자기존재의 부분집합이, 자신의 본질을 압도적으로 규정하는 무시무시한 현실 앞에 마냥 행복할 수 없다.

‘서울대’라는 키워드가 그의 존재를 설명하는 부분집합이라면, ‘청년유니온 활동가’라는 키워드 역시 그를 설명하는 존재 일부이다. 사무실에서 반상근 활동을 하며 전반적인 실무를 도맡아 하였고, (한 때 그의 별명은 ‘실무대마왕’이었다.) 지금은 서울지역 모임의 담당자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 그의 별명은 ‘노예 1’이다. 사족이지만, ‘노예 2’는 필자이다.) 재학 시절 가볍지 않은 학생운동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그는, ‘청년(당사자)’와 ‘노동’을 관통하는 새로운 운동의 중심에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는 서울대 출신임과 ‘동시에’ 청년유니온 활동가이지만, 포용력 떨어지는 이 사회는 두 가지 정체성에 이질적인 긴장감을 부여한다. 촌스럽게 내놓고 따지지는 않지만, 서울대 출신이 뭐가 아쉬워서 노동운동 판에서 활동하냐는 의구심에서 그는 자유롭지 못하다. 편협한 인식체계가 동시에 수용할 수 없는 개념이 공존하고 있으니, 마찬가지로 자신의 인식체계 수준 내에서 끼워 맞춰야 한다. – ‘먹고 살만하니 저러고 있다.’ 이런 식이지 뭐. 우습지 않은가? ⟪지킬 앤 하이드⟫도 아니고, 하나의 존재에서 두 가지 정체성이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밝히자면, 나는 ‘서울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프리미엄에 갇히지 않고 열심히 ‘활동’하는 청년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한 가지’ 정체성에, 과도한 본질을 환원(편견)하는 우스운 사태들에 대한 경각심이다. 일류대학 출신이라는 정체성에 압도당한 채 누군가를 규정하는 것은 ‘장애인/이주노동자/동성애자’라는 정체성에 뿌리 깊은 편견을 간직하는 것 만큼이나 위험하다. 비장애인과 장애인 간의 차이보다, 장애인들 간의 차이가 더 크다고 했던가? (시각장애인 – 청각장애인) 같은 유비추리를 일류대학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명문대 출신에게 보이는 편견(선망?)과 비명문대 출신에게 보이는 편견(조롱?)은 동전의 양면이다. 어떤 양상을 보이든 편견이라는 것은 폭력이며, 실체 없는 학벌의 강력한 작동기제로 작용한다.

편견이라는 폭력이 위와 같은 사안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글의 코너에 부합하게(?) 노동의 현실로 돌아와야겠다. 우리는 ‘청소년 노동’에 대하여 ‘가출 청소년 혹은 양아치’라는 규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린다. 청소년은 공부나 해야한다는 편협한 인식체계가 청소년 노동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저 따위 결론 밖에 안 나오는 것이다. 청년들의 노동은 이렇게 비루한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까? 20대 초, 중반 청년의 노동(대개 매장직)은 ‘용돈벌이’라는 규정이 선사된다. 20대 후반이 넘어가면 어떨까? 소위 ‘사무직’ 혹은 ‘전문직’이 아닌 영역의 노동에는 혀를 찬다. – ‘편견’(청(소)년 노동)에 함몰되면 다른 이의 ‘삶’을 볼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편견이라는 ‘텍스트’(정체성)가 아니라, 삶이라는 ‘컨텍스트’(공감)가 아닐까?

어차피 인간의 불완전한 인식체계로 다른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의 한정된 정보 값에 의지하여 ‘규정’하기 보다, 열린 시각으로 맥락에 ‘공감’해 주시라.

‘이건 이거지.’

대신,

‘이건 이럴 수도 있겠구나!’

이 사회가 한 결 풍요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응답 1개

  1. 프레지아말하길

    텍스트 이전의 삶에 다가가란 말이 가슴에 와 닿아요. 얼마나 어떻게 이전에 그런 태도자체가 중요한 것이겠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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