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다

- 풍경지기 박혜숙

『철학이 필요한 시간』, 강신주, 사계절

문학수업 마치는 종이 울렸다. 남학생반 수업이었다. 아이들의 잠을 깨우느라 보낸 시간이 길었다. 졸고 있는 아이들은 복도에서 찬바람을 쐬게 했다. 잠을 깬 아이들은 교실에 들어왔다. 하지만 잠시 후 다시 졸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이었다. 미워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의 마음이 전해졌나 보다. 졸고 있는 아이를 깨워도 예전에 간혹 보이던, 짜증섞인 표정은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아이들이 나에게 가지는 미안함이 전해졌다.
수업이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왁자지껄했다. 교실에서 나가려다 보니 태현이 책상 위에 놓인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4월 풍경모임에서 토론하기로 한 『철학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태현이는 수업시간에 어두운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 있다가 잠속으로 스며드는 아이였다. 하지만 책을 읽어내는 모습을 보면 내가 교과서를 들고 수업을 하고 있는 게 미안하다 느껴지기도 했다. 태현이에게 다가갔다.

“태현아, 얼마나 읽었니?”
“많이 읽지는 못했어요.”
“느낌은 어때?”
“신기해요.”
“왜 신기하게 느껴졌을까?”
“철학은 멀리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내가 고민하는 문제들이 책 속에 담겨있어서 신기했어요.”
“내가 30대 중반에 깨달은 것을 태현이 너는 벌써 깨달았구나. 대단하다.”

4월 풍경 토론에서 강신주 선생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토론한다고 수업시간마다 안내를 한 뒤 참가 희망자를 조사했다. 책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한번도 토론에는 참가한 적이 없던 태현가 이번에 처음으로 참가 신청을 하고 책을 읽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의 대화가 재밌어 보였는지 수환이가 다가온다.

“수환아, 너는 얼마나 읽었니?”
“저도 얼마 못 읽었어요. 근데 페르소나 설명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래?”
“제 친구가 어제 여자 친구랑 헤어졌어요. 그 녀석, 많이 힘들 건데 오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웃고 있어요. 저는 그 녀석 마음을 알거든요. 그게 페르소나구나 생각했어요.”

수업 시작하는 종이 울리자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교실 문을 나섰다. 여학생들은 복도에서 마주쳐도 지난 토론에서 나눈 책 이야기 혹은 강연회 이야기를 짤막하게 들려주기도 한다. 하지만 남학생들과는 그런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행복했다. 남학생반에서 쉬는 시간에, 그것도 태현이랑 철학 책을 앞에 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니…….

강신주 선생은 철학한다는 것을 여행에 비유한다. 우리는 가끔 여행을 떠난다. 자신의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으로 여행을 하다보면 자신의 일상이 낯설게 보인다. 그때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한다. 이때의 자신은 여행을 떠나기 전의 자신과 다른 존재일 수밖에 없다. 철학은 여행처럼 내 자신을, 내 주위를 낯설게 볼 수 있도록 해주고 나를 전혀 다른 존재로 만들어 준다.
이 책은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나와 너의 사이’, ‘나, 너 우리를 위한 철학’으로 나누어 마흔 여덟 곳의 여행지를 소개하고 있다. 나 자신의 삶과 내면을 돌아보고 나와 타자의 관계를 돌아보며 나와 타자를 둘러싸고 있는 구조, 혹은 환경을 돌아보는 긴 여행을 통해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낯설게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김수영은 자신을 치장하던 가면을 벗어던질 수 있었기 때문에 위대한 시인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인문정신이라고 강조한다.

이제 시인처럼 우리도 자신의 삶과 감정에 직면하도록 하자. 분명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처, 즉 관습, 자본, 그리고 권력이 만든 피고름이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를 희망할 수 있고, 우리의 뒤에 올 사람들이 더 이상 우리와 같은 상처를 받지 않을 사회를 꿈꿀 수 있게 될 것이다. 철학자를 포함한 모든 인문학자, 혹은 시인을 포함한 모든 작가는 정직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시, 소설, 영화, 그리고 철학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정직하게 치부를 털어놓는 친구 앞에서는 자신도 정직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시를, 그리고 철학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처럼 정직하기 위해서 말이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의 프롤로그 중에서

지난 토요일에 강신주 선생의 강의를 들었다. 희망찾기 모임에서 올해 추진하고 있는 배움의 자리였다. 작년까지는 만나고 싶은 저자를 학기별로 정한 뒤 그 분이 추천해주시는 책을 세 권 혹은 네 권을 읽고 세미나를 한 후 학기말에 대중강연을 열었다. 그러나 올해는 배움의 형태를 바꿔 정기강좌 형태로 운영하기로 했다. 한 번의 만남이 아니라 네 번의 만남을 통해 조금 더 깊이있게 배우기 위해서였다.
첫 강좌가 지난 토요일에 있었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대상 도서로 공부하는 자리였다. 강신주 선생은 첫 강의에서 김수영의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시를 통해 앞서 말한 인문정신을 이야기하셨다. 팽이가 돌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속도로 돌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만의 속도로 삶을 살아내어야 한다. 옆에서 돌고 있는 팽이에게 의존하는 순간 팽이는 넘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스스로 서지 못한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기대고자 한다면 나도, 그도 넘어질 수밖에 없다.
책을 읽고, 강신주 선생의 강의를 들으면서 대부분의 문학 작품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네 삶을 아프지만,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 그리고 이게 내 삶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것만이 구원이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자기가 스스로 설 수 있을 때 내 곁에서 숨쉬고 있는 타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타인과 함께 걸어나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강의를 함께 들었던 선생님 한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자기 스스로 돌아가는 팽이에 대한 말씀이 정말 좋았다. 하지만 허무하다. 나는 내 옆에서 돌고 있는 팽이에게 손을 내밀어 잡고 싶은데 그럴 수 없지 않느냐. 그렇다면 연대는 어떻게 해야 하나? 손을 잡기 위해 손을 내밀면 넘어질 수 있다는 말씀이 너무 아프게 와닿는다.
내가 말했다. 꼭 손을 내밀어 손을 잡아야만 연대가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같은 자리에서 자기만의 궤도를 열심히 돌고 있는 것이 연대가 아닐까요? 조직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죽여가면서 손을 잡는 것은 오히려 연대가 아니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그 선생님이 가진 의문, 슬픔을 나도 공감할 수 있었다.

자습 감독을 하면서 이 책을 다시 읽고 있었다. 여진이가 복도를 지나가다가 내게 다가왔다. 자신도 이 책을 읽고 있는데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참 좋다고 했다. 오래 기억에 남을 구절들이 많았다고 했다.
이 책을 읽고 아이들이 들려줄 이야기가 기대된다. 아이들은 자기 스스로를 들여다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함께 이야기 나누는 과정에서 타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까? 그리고 자신과 친구들을 둘러싼 현실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풀어놓을까?

응답 3개

  1. 연초록말하길

    여자친구와 헤어진 아이가 맨 얼굴을 보이지 못할 때

    그것이 바로 페르소나로구나 하고 느끼는 그 대목에서

    자신의 경험과 근접한 이야기에 반응하는 아이들을 생각하게

    되네요.

    철학책이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아마 그런 근접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책으로 접하기 때문이겠지요?

    저는 강신주 선생의 다른 책들을 계속 읽어와서 그런지

    이제는 한 사람에 대해서 조금 더 깊게 쓰는 글들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2. 송정기말하길

    이 책 소개썼네요. 제목이 어려워서 망설이다 집어 들었는데, 의외로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아주 가끔요. 어려워서 몇 번 다시 읽으면서 작가의 강연을 같이 들었으면 더 좋았을텐데…라는 생각을 했어요.

  3. 김대경말하길

    앗! 박혜숙 샘, 제가 다음에 쓰려고 했던 책이 바로 이 책인데…
    저도 최근에 아주 잘 읽었답니다. 우리 학교(제가 휴직은 했지만 학교에서 독서모임 할 때마다 저를 불러주시거든요^^) 독서모임에서 이번에 읽을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답니다. 철학은 정말 삶이 휘청거릴 때 더 진가를 발휘하는 것 같아요. 많은 용기와 배움을 준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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