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힘들면 앞서라.

- 김융희

지난 주말엔 모처럼 먼 길 경북 봉화에 있는 문수산에 다녀왔다.
다행히 중턱까지는 차를, 그리고 약 2킬로 정도를 오르는 등산길이란 가이더의 설명임에도, 해발 천 이백의 전혀 듣지 못했던 꽤 높은 산을 오르려는 나의 초행길이 여전 불안했다. 서둘러 이른 아침에 출발했는데도 봉화에 들어서니 벌써 해가 중천이다. 정말 만화보다 더 만화같은 가로수길을 지난다 . 10메터가 넘는 적송의 가로수가 한참을 꺼벙이 모습으로 늘어서있다. 봉화의 상징인 금강송, 춘양목을 본따 씨멘트로 찍어 만든 어색한 모습이다. 기막히게 기발한 치졸 극치의 착상에 더럽게 불쾌한 천사를 보내고 싶었다. 한촌으로 들어서면서 호젓한 분위기가 더해간다. 호젓한 협곡을 한참 지나 장수마을이란 큰 푯말이 서 있고, 버스가 헐떡거리며 사과밭 사이를 계속 오르니 더 이상 오를 수 없다는 안내판이 붙어있는 축서사의 주차장이다.

축서사(鷲捿寺), 신라시대에 창건된 고찰로, 근래에 지어 꽤 규모있는 잘 정돈된 사찰이다. 鷲수리취(축으로도 발음), 捿살서, 사찰 이름의 불편한 발음처럼 ‘수리가 서식하는 절’?

‘독수리같은 스님이 계신 절’이란 뜻인지, 내용의 이해 또한 쉽지 않다. 조용한 분위기에 스님도 누구도 눈에 띄지 않아 궁금증을 물을 수도 없다. 바쁜 일정에 경내를 들를 여유가 없어 궁금한 채이다. 시작된 등산길은 경사가 꽤 가파르다. 등산로 입구인 장수촌에서 축서사까지 2.5km, 여기서 문수봉까지가 2.4km의 표시였다. 그런데 이 2.4km의 등산길이 나에게는 버겁기만 하다.

어제는 종일 밭 관리로 힘겹게 보냈고, 오늘도 산행준비로 새벽부터의 활동은 많이 무리인 듯 싶다. 숨결이 거칠고 굳은 다리가 잘 옮겨지지를 않는다. 이를 악물어보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더욱 일행들에게 피해를 끼칠 것 같아 불안하여 마음이 착잡하다. 얼마전 있었던 일로, 마침 시간도 있어서, 한동안 못 본 친구에게 가까운 도봉산에나 오르자며 전화를 했더니, 인제는 힘들어 얕은 산도 오를 수 없다는 힘없는 목소리였다. 공연한 전화질로 실의와 좌절을 겪게했던 죄책감으로 지금까지 그 친구에게 연락도 못하고 지낸 나이다. 그때의 일이 지금 이런 저런 일들과 함께 새삼 떠오르면서 벌써 내가 이 지경에 이르렀나 생각하니 비참한 자신이 가엾기도 했다.

나를 서글프게 한, 우리집에서 가장 보기 싫은 물건, 그래서 한갓지게 치워둔 테니스가방이 떠오르기도 한다. 몇십 년을 함께 했던, 그래서 매일 라켙을 들고 땀을 흘리지 않음 일과가 맥없었던 그 좋와했던 테니스 라켙을 놓은지도 벌써 수개 년이 흘러갔다. 다시는 잡을 수 없을, 어떻게 기회가 되어 억지로라도 해본 들, 옛 기분이 아닌 벌써 나에게서 멀리 떠나가버린 테니스는 지금 슬픈 추억만 남긴 채 떠나고 없다. 짚어보면 내게 알게 모르게 이런 일들이 쌓이고 있다. 그래서 나이는 오기로 살아야한다며 버텨온 나의 삶이 아니었던가!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늙은이의 좌절은 한 번으로 끝이다. 그 친구의 힘없는 목소리도 언젠가 있었던 한 번의 좌절이 가져온 결과가 아니었겠는가. 힘겨운 발걸음, 극복하고 넘어서야 한다는 마음세의 갈등이 함께 요동친다. 아니다. 해야 한다. 여기서 낙오되어선 안된다. 나는 할 수 있다. 저 고즈녁한 축서사의 어딘가에 서식하고 있을 독수리의 기를 훔쳐서라도 일행들에게 지금 나의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된다. 않그래도 행여란 조심스러운 조신을 품고서, 한 달에 한 번 있는 젊은 동료들과의 정기 산행을 한사코 동참해 함께 하고 있었는데, 오늘 내가 주저앉을 수는 없는 일이다.

벌써 혼자서 몰래 시행해 효과도 확인했던, 지난 3월의 산행에서 터득한 그 비법을 쓰자. 생각을 바꾸자 다시 다리에 힘이 실리며 자신감이 든다. 나는 앞장을 섰다. 남들이 쉬는 틈에도 나는 쉬지 않고 앞장을 섰다. 선두보다도 50여m는 앞서며 계속 나아갔다. 가파른 경사도 아무러치도 않는 채, 거침없이 정상을 향했다. 이런 모습을 바라본 일행들은 네가 용써 본들 얼마나 가겠느냐며 별로 관심없는 표정들이다. 그러나 정상이 눈앞에 이르렀다. 양보하고 싶지 않는지 발빠른 친구가 성큼 쫒아 바짝 다가온다. 바로 나를 차넘길려는 참이다. 나의 위기였다.

‘내가 지금 축지법을 써서 오르고 있는데, 내가 앞서지 못하면 나의 축지법이 무용이 된다. 제발 나를 앞서지 말라며 애걸했다. 다행히 그가 잘 응해주어 드디어 1205m의 고지 문수봉 정상에 섰다. 일행중 일부는 도중에 머물며 오르지 않았다. 우리는 정상에서 막걸리를 나누며 소백산을 중심으로 펼쳐진 백두대간을 굽어보며 호연지기를 펼쳤다. 축서사의 기를 받아 축지법이 더 잘 받아들여서 어제의 피로까지 말끔하다며 능청을 떠는 나에게, 모두가 또 헛소리 기염이라며 놀린다.

그러나 나는 결코 헛소리가 아닌 진담이었다. 돌아서 내려오는 길, 5.7km의 거리가 멀기도 했지만, 오르내림이 계속되면서 만만치 않다. 그러나 오르는 비법을 계속 쓰면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의 고단했던 피로는커녕 어느 때보다 즐거운 오늘 등산이 모두 축지법과 같은 나의 비법지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축지법이 있기는 있는건가? 있다면 이것이 바로 그 축지법이 아니겠는가! 맥없어 주저앉고 싶고 좌절에 겨워 쓰려지려는 때 모두를 극복하고 일어서는 용기를 주는 힘이 바로 축지법이란 나의 생각에는 하등의 이의가 없다. 그래서 그리 말한 것 뿐이기 일행 동료들이여 이해해 주오.

힘들면 선두인 앞장을 서라. 일행과 더불어 산을 오르며 앞장을 서서 일행을 이끌면 고되지 않아 훨씬 쉽다. 뒤에서 앞을 따르려면 계속 서둘러야지만, 앞서면 자기가 완급을 조절하면서, 숨이 차면 숨고르기를 하면서, 험하지 않는 평지나 완만한 곳에선 걸음을 독촉하며, 여유를 즐긴다. 적절한 곳에서 쉼도 자유스러워 훨씬 유익한 휴식을 즐길 수도 있다. 그러면서 대단한 마력이라도 가진 듯 마음의 우쭐뎀도 누린다. 지치고 피로할 겨를이 없다. 선두를 지키고 싶은 야심도 만만찮는 힘이다. 선두는 군림의 자리이다.

이것이 어찌 등산길에서만 있는 일이겠는가. 사회에서는 더잘 통하는 보편 타당한 통념이 아니던가. 소위 지도층이라며 별난 재주의 특권이라도 있는 듯, 오만 잡것에 두루 군림하면서 십만 방정을 다 부리는 짖거리들이 모두 이런 것이 아니련가 싶다.
나의 비법이 공개가 되어 인제는 선두자리가 힘들겠다. 그러나 내려오는 길은 뒷서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어차피 매사는 반반이기 마련이다. 오르는 길을 앞서지 못하면 내려오는 길에 뒷서면 된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의 위기를 지혜로 넘길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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