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유혹

- 성태숙(구로파랑새나눔터지역아동센터)

살면서 큰 요령을 부려본 기억이 별로 없다. 요령 따위가 필요 없을 정도로 어쩌면 사는 게 민숭민숭한 탓이 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이 밋밋함과 헛함을 꾹 참고 견디는 것을 제일의 미덕으로 알고 여태껏 살아왔다.

그러나 살다보면 가끔 크고 작은 유혹거리들이 밀려들 때가 있다. 내 것이 아닐 줄 잘 알면서도 언제나 눈이 뒤집히고 안달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유혹 앞에 내 모습이다. 이리저리 재보고 갖은 수를 다 내고 그럴 듯한 말귀를 생각해내느라 고심에 고심을 더하기 일쑤다.

최근에는 그런 유혹 중에서도 아주 강도 깊은 유혹이 몰아쳐 들어와 사람의 애간장을 다 녹이고 있으니 참 환장할 일이다. 내용인즉슨 파랑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큰 교회에 별도의 복지관 건물이 있는데 그 별도 건물의 일부를 파랑새에 무상임대를 해주겠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계약 기간은 끝나면서 월세를 배로 올려달라는 소리에 기겁을 해서 나가겠다고 했더니 집주인이 득달같이 집을 내놓았는데 벌써 해를 넘기지 전의 일이다. 하지만 가끔 하수구 맨홀 뚜껑을 열고 하수펌프 언저리와 하수도 기름과 음식 부유물 등 찌꺼기 등을 주기적으로 손수 청소해 주어야 하는 집에 흔쾌히 들어오겠다는 새 세입자가 없어 해를 넘기고야 말았던 것이다. 집주인이 집을 내놓겠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간도 비좁고 여러 가지 불편한 점도 많아 잘됐다 하는 심정으로 새 집을 알아보고 다녔는데 새 세입자가 들어오면 그 때가 돼서야 나가라는 집주인 말에 도로 좌절하고 주저앉은 것이 벌써 일 년도 훌쩍 넘었다. 지금은 집주인의 부담을 줄여 집을 빼는 것을 용이하게 하려는 생각에 아예 월세를 내지 않고 있다.

하지만 부동산 시장이 점점 수상하게 요동을 치면서 임대 시장이 전세가 아닌 월세의 형태로 그 주된 흐름이 바뀌어 가는 것을 보면서 슬며시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교사 인건비 등 운영비가 모자라서 후원금으로 들어오는 돈을 보충하지 않으면 감당이 되지 않는 운영 형편에 안내는 월세마저 운영비에 보태 쓰고 있는데 어디 가서 이 정도 규모에 이렇게 싼 집을 또 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슬며시 월세를 내고 다시 주저앉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돈 값을 분명히 하는 사회인가 보다, 워낙 집을 허술하게 지어서 그런지 괴로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식당이 있는 지하는 하수 펌프로 물을 퍼내야 하는데 휴일을 보내고 와보니 물이 무릎까지 차올라서 마치 홍수 재해라도 당한 듯 난리가 난 일이 있다. 소방차를 불러 물을 빼내고 냉장고 등 집기를 모두 쓸 수 없을 만큼 그야말로 재해를 당한 것이다. 별 기대도 안했지만 그래도 하도 집주인이 정나미가 떨어지게 글어서 나도 모르게 집을 계약한 부동산에 가서 괜스레 한풀이를 하였다. 그 와중에 집주인이 은근히 동네에서 임대차 관련하여 악명을 떨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임차인들이 재판을 걸거나 치를 떨며 집을 떠났다는 것이다.

물이라면 끔찍한 집인데 그것말고도 공부방으로 쓰는 1층은 위층에서 물이 새서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천장은 까맣게 곰팡이가 갑작스럽게 슬고 축 늘어져 정말 흉물스럽다. 온 집이 물을 흘리고 있는 양 아래층의 전기나 위층도 갑작스럽게 전력 중단이 저절로 일어나기도 하도, 여름이면 바로 집앞에 맨홀에서 하수구와 분뇨 냄새가 살며시 흘려오기도 하니 정말 이런 집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될까 이젠 죄스런 마음까지 든다. 그러나 더 비싸고 좋은 집으로 옮기는 것도 고민스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정말 이 월세는 늘 공포의 대상이다. 현재 지역아동센터는 시설 운영과 관련한 지원이 전혀 없어서 후원금이나 자부담으로만 임대료 등을 부담할 수 있는 실정이다. 언제나 다짐은 월세를 낼 수 있는 그 마지막 날까지만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겠다는 것이 나와의 약속이었다. 공부방에서 지역아동센터로 전환을 고민하던 순간에도 결국은 이 임대료와 운영비 등을 매달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부담감이 너무 커서 간곡히 붙잡는 공부방 동지들의 손을 뿌리치고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지역아동센터로 되돌려야만 했던 것이다. 근 10여년의 세월 동안 월세와 공부방 공간의 문제는 이렇게 고민의 중심에서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처음 지금의 자리로 이사를 올 때만 하더라도 정말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예전에는 화장실도 공부방 밖에 있고 심지어 부엌은 두 건물 사이의 골목길 사이에 임시로 담을 설치한 채로 쓰고 있었던 탓에 건물 안에 버젓이 화장실도 있고 부엌 공간도 지하 한 쪽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이 감격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텅 비어있던 슈퍼에 처녀 교사와 인부 아저씨 한 사람 이렇게 셋이서 바닥의 난방공사를 하고 자원봉사자들의 힘을 빌어 방 구조를 만들어가던 그 순간이 아직도 선하다. 하지만 이제 파랑새는 사방 벽에 책과 책상 및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곽 차 그야말로 답답하기 그지없는 공간이 되었다. 아이들까지 세월이 가니 키가 크고 몸이 우람해져 공간은 더 협소해 보일 뿐이다. 늘 손길이 닿는 벽지는 어느 틈에 새까매지고 찢어져 어디 한 군데 정갈한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공간문제로 인해 아이들은 흔히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

더욱이 예건에는 그런 공부방들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학교를 비롯한 온갖 군데에서 방과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니 우선 시설만 보는 학부모와 아이들의 입장에서 파랑새는 꼴찌를 면할 길이 없다. 공간은 그저 공간의 문제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금방 아이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아이들을 돌보는 교사들에게도 역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능력 범위를 벗어난 일처럼 보여 과연 어찌 해결해 볼 수 있을까 늘 고민하던 차에 참으로 믿기지 않은 말을 들으니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하지만 이 집을 꼭 떠나고픈 마음만 드는 것은 아니다. 가끔 일이 있어 동네를 다녀오면 아이들이 누구누구가 다녀갔다는 소식을 전할 때가 있다. 지독히도 말도 안듣고 결국 공부방을 그만 둔 아이들이 가끔 다녀가는 것이다. 그래도 그냥 한 번 와봤다고 하면서 괜스레 공부방을 다녀간다. 싸우고 지지고 볶고 했었지만 그래도 한 번 다녀가고 싶은 그 아이들의 마음을 지켜주려면 여기에 계속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일은 아이들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다. 한참 모습을 보이지 않던 부모들이자 조부모들도 불쑥 얼굴을 내밀고 이런저런 일을 이야기하고 싶어 다니러 오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도 나아지지 않은 형편을 다시금 싸들고 힘없는 파랑새를 찾아오면 마음이 그저 찡해올 뿐이다.

그런 일들이 있고 나면 아무런 곳으로도 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너무 좁은 방에서 아이들은 제대로 된 프로그램도 하기 힘들어하고, 사무실도 하나 없는 공간에서 교사들은 내내 아이들과 씨름을 해야 하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조금만 더 컸으면 청소년 센터를 굳이 따로 만들어 아이들을 보내야 하는 서글픈(?) 일은 없었을텐데 늘 아쉬움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소년 센터를 다녀온 아이들은 새로운 꿈이 생가는 눈치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유혹에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곳을 지켜야 하나, 아니면 힘들고 위험하지만 교회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나? 참, 참, 내 마음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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