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여치와 떠난 여행

5화 풀여치야 안녕

- 배문희

다음날부터 나는 카페 <고장난 기억>에서 일을 하게 됐다. “정해진 일은 없단다. 카페에서 놀면서 틈틈이 우리 일을 도우면 된단다. 카페에 오는 시간도, 집에 가는 시간도 네 마음대로 하면 된단다”라고 히피 할머니께서 말씀하셨지만 나는 카페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부지런을 떨었다 카페에 가는 일이 방에서 혼자 뒹구는 일보다 훨씬 즐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카페에서 만난 친구들이 그처럼 내 인생의 보물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카페 친구들을 소개하기에 앞서 얄리와 히피할머니, 그리고 수자 언니의 관계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얄리와 수자언니가 처음 만난 것은 지금부터 오년 전 가을이었다고 한다. 얄리는 혼자서 안동 하회마을로 여행을 갔고 그곳에서 수자 언니를 만났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연인사이가 되었지만 둘 사이엔 넘기 어려운 벽이 있었다. 경상도 종갓집인 수자 언니네 집안에서 외국인인 얄리와의 결혼을 극심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특히 집안에서 엄격하기로 이름난 히피 할머니의 노여움은 하늘을 찔렀다고. 나는 이 대목에서 그만 실소를 터트렸다. 히피 할머니가 종갓집의 안주인이었다니!

“말도 마 옛날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만큼 무섭고 지독한 노인네였단다.” 수자 언니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설명했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팝콘머리가 아니라 머리에 쪽을 지고 모든 일에 체통과 법도를 따지는 히피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히피 할머니가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그보다 궁금한 것은 그 깐깐한 종갓집 안주인이 어떻게 지금의 히피 할머니로 변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내가 묻자 히피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둘이 죽고 못 살겠다는데 어쩌겠냐. 어쩔 수 없이 얄리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후에 얄리와 수자와 함께 얄리의 고향인 인도로 여행을 가게 됐단다. 여행 마지막날 갠지스 강가에 갔다가 춤추는 노인을 만나게 됐지. 노인은 평생을 함께한 아내를 갠지스 강에 떠나보내고 난 후 슬픔과 그리움을 담아 춤을 추고 있었단다. 노을에 물들어 빨갛게 타오르던 그 슬픔의 춤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춤을 지켜보다 나도 모르게 신발을 벗고 함께 춤을 추었단다. 모든 복잡함과 심각함을 털어버리고 울며 웃으며 춤을 추었지. 그동안 이 불덩이들을 어떻게 가슴 안에 꽁꽁 숨겨놓고 살았나 싶더라.”

인도여행을 다녀온 후 종갓집 안주인은 히피 할머니로 다시 태어났다. 더 이상 죽은 귀신들에게 밥을 해 먹이느라 인생을 낭비할 수는 없다며 종갓집을 나와 얄리와 수자언니와 힘을 합쳐 카페를 차린 것도 그 무렵이었고.

이번엔 카페에서 만난 친구들을 소개할 차례다. 수자언니는 내가 아는 한 최고의 요리사이자 바리스타이다. 아니, 언니에겐 요리사라는 호칭보다 연금술사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언니가 요리하는 방식은 음식을 만들어낸다기보다 음식의 영혼들을 하나하나 불러일으킨다는 표현에 가깝다. 그래서 언니의 요리에는 자연이 원래 가진 맛과 향이 그대로 살아있다. 또 고기를 쓰지 않고 채소와 해물로만 음식을 만들기 때문에 언니가 차린 식탁에는 언제나 고요와 평화가 흐른다.

풍금을 곧잘 쳐서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바람머리 아저씨는 이곳에선 나몽달 씨로 통한다. 나몽달 씨는 70년대에 나몽달과 파파라치라는 그룹에서 활동하던 꽤 잘나가던 가수 겸 작곡가였다고 한다. 나팔바지와 휘날리는 바람머리가 트레이드 마크였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때의 분위기가 남아있다. 잘 나갔던 그때 그 시절에 대해 묻자 나몽달 씨는 웃으며 말했다. “그 시절 나몽달이는 음악가의 허울을 쓴 보잘 것 없는 떠돌이였지만 지금은 떠돌이의 허울을 쓴 진짜 음악가란다. 그래서 난 지금이 더 행복하단다.”

랭보. 하루 종일 노트에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는 구석자리 청년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그를 엉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랭보 엉아는 새로운 국어사전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세상이 병들고 사람들 사이에 진정한 사랑이 없어지게 된 까닭은 상업주의에 물든 죽은 언어들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은어처럼 맑게 튀어 오르는 새로운 언어들이 필요하다나. 엉아가 만드는 사전을 흘낏 봤더니 이런 글들이 적혀 있었다. <대형마트-쓸모없는 물건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곳. 그곳에서 사람들은 바퀴달린 바구니에 물건들을 수북이 담지만 정작 비어있는 것은 자신들의 영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자본주의-자본을 만들어내기 위해 인간과 자연을 막무가내로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괴물. 부자-인간을 괴롭히고 자연을 파헤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 가난뱅이-인간과 자연을 괴롭힐만한 힘이 없는, 그 자체로 평화인 사람들.>

염씨 아저씨 소개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뻥쟁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데 입만 열었다하면 뻥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섯 살 먹은 어린애도 염씨 아저씨의 뻥에 넘어가지 않을 게 뻔하다. 도대체 장롱에서 호랭이가 나왔다는 식의 이야기를 누가 믿느냐는 거다. 어쩌다 뻥쟁이가 됐냐고 물으니 염씨 아저씨가 배시시 웃으며 하는 말. “내 뱃속에선 언제나 온갖 뻥들이 부글부글 끓고 있어서 끄집어내지 않고선 못 참겠거든.” 하지만 아저씨의 뻥은 거짓말과는 다르다. 거짓말쟁이나 사기꾼들의 입에선 뱀과 황소개구리 같은 것들이 튀어나오지만 염씨 아저씨의 뻥은 뭐랄까.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색종이 같은 것이랄까.

도라에몽 아저씨는 오늘도 열심히 도라에몽 춤을 연습하고 있다. 도라에몽 춤을 추는 아저씨의 모습은 보는 사람도 지칠 만큼 몹시 힘겨워 보이지만 아저씨의 의지는 조금도 꺾이지 않는다. “지금은 비록 도라에몽 역할을 빼앗기고 아무 이름도 없는 곰인형을 쓰고 있지만 나는 진짜 도라에몽이라구! 그깟 덤블링 좀 할 줄 안다고 해서 아무나 진짜 도라에몽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중요한 것은 어린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야.” .

드디어 얄리를 소개할 차례다. 얄리는 카페에서 만난 친구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다. 얄리는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을 줄 아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다. 자신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내 인생이 완전히 어긋났다고 느껴질 때마다 얄리에게 그 모든 것을 털어 놓으면 이야기하는 도중에 어느새 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 나는 수많은 우주의 생명체 중에서 오직 단 한번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

얄리가 귀 기울이는 방법은 아주 특별하다. 언젠가 한 소년이 노래하지 않는 새를 얄리에게 가져왔다고 한다. 얄리는 계속 귀를 기울였다. 꼬박 한달간 귀를 기울인 끝에 새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얄리는 귀뚜라미와 개구리와 달팽이와 지렁이, 심지어는 저녁노을과 별빛, 물안개에도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그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얄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이렇게 얄리는 귀 기울여 들을 줄을 알았다!

얄리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에서부터 우리 동네 뒷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산에 올라갔고 여행한 나라만도 열 곳이 넘었다. 얄리는 서툰 한국말로 여행이야기를 곧잘 해주곤 하는데 그중에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도 있었다. 버마에서 봤다는 하늘을 나는 고양이 이야기부터 코브라와 맞장 뜬 이야기, 사막의 밤에 나타난다는 모래귀신 이야기까지. 얄리의 이야기를 듣다가 나는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봤다. “얄리. 그런데 오른쪽 검지 손가락은 어쩌다 잃게 된 거야?” 나의 물음에 얄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음… 그건 말이지. 심한 동상에 걸렸어. 히말라야에 올라갔을 때. 하지만 괜찮아. 다른 손가락들이 힘을 내서 도와주니까.” 히야. 히말라야하니… 그때부터 얄리의 잘린 손가락마저도 신비롭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날 내게 새로운 친구가 생겼다. 얄리가 카페에 들여놓을 새로운 물건을 가지고 들어온 날이었다. 깨진 거울이 세 개, 너덜너덜한 천 소파가 하나, 고장난 재봉틀이 하나, 부러진 의자가 네 개… 하나같이 먼지를 허옇게 뒤집어쓰고 너저분해서 저런걸 뭐 하러 가져왔나 한숨부터 나왔다. 그러던 중에 내 눈을 반짝 끄는 것이 있었다. 바로 자전거였다. 페달이 떨어져 나가고 타이어가 펑크 난 이상한 자전거였지만 어딘지 마음을 끄는 데가 있었다. 특히 마음에 드는 것은 연두빛 색깔이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연두빛은 단순히 자전거에 칠해진 색깔이라기보다 자전거가 꾸고 있는 꿈처럼 느껴졌다.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전거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손잡이를 잡고 말했다. “풀여치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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