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믿음 없는 나, “욥기”를 읽으며…

- 김융희

교회를 찿는 것이 벌써 반 세기를 넘었고, 경동교회 문턱을 넘나든 것도 거의 50년이 된다. 그러면서도 아직 믿음이 무엇인지를 몰라 방황하며 진실한 믿음 얻기를 갈구한다. 나는 기도가 정말 어렵다. 지금도 나는 남들 앞에서 기도를 못한다. 기도할 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우선 말문부터 막혀 당황한다. 모두 나의 부족한 믿음 때문임을 절감하며 진실한 믿음을 갈구하지만 이는 마음뿐, 어림없는 나의 신심이 안타깝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나의 믿음 없음을 통감한다. 성서의 말씀을 선듯 이해하며 공감하기 보다는 온통 혼란으로 답답함만 가중될 뿐이다. 이처럼 성서의 이해와 내용에 공감을 얻지 못한 내가, 욥기를 읽으면서는 더욱 혼란을 넘어 회의와 의혹으로 당혹감마저 느끼게 된다. 좀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욥기를 읽으면서 나의 회의와 의문은, 왜 이같은 하나님을 믿고 따라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는 신앙의 근본문제를 회의하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질문과 상식을 벗어난 답변으로 이루어진 욥기를 읽으면서, 선한 사람에게 주어진 고통과 재난, 악행을 일삼아 저지른 데도 아무런 문제없이 잘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부조리가 보편화된 현실에서, 믿음 없는 나는 회의와 의문과 함께 이 문제를 생각해 본다.

“이 세상에는 욥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 하는 사람이 없다.“며 친히 야훼께서 보증하는 사람인데도, 견딜 수 없는 질곡의 고통을 당해야 하는, 왜 하나님은 이처럼 열심히 노력하면서 선하게 살아가는 욥에게 처절한 고통과 재난을 겪게 하는 것일까?

이 세상의 온갖 악행을 다 저지르면서 믿음 없이 사는 사람도 천벌은 커녕, 늙어 죽을 때까지 복을 누리며 잘 사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것인가? 그런 하나님 앞에서 믿음 없는 내가 어떤 기대나 의지를 할 수 있을까? 그럼 믿음이란 나에게 무엇이며, 그런데도 늘 부족한 내 믿음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그 믿음을 의지하면서 나는 계속 크리스챤으로 살아야 하는가?

어느 날 갑자기 닦친 이유도 모르는 재난과 고통, 전 재산을 잃고, 사랑했던 자녀들도 모두 죽임을 당하며, 자신의 몸뚱이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악창의 가려움증에 질그릇조각으로 긁어도 긁어도 시원찮는 고통속에서 아내마저 외면하여 떠나버린, 오직 처절하게 비참한 욥이다. 욥이 알 수 있는 이유란 세상에 태어난 죄 뿐, 이유도 모른 채 주어진 불행과 고통 앞에서, 욥은 자기 생일마저 저주한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메달려 항변으로 절규한다. 욥은 자기 고난의 이유를 전혀 모른다. 욥의 진실을 아는건 야훼와 사탄과 욥기를 읽고 있는 독자들뿐이다. 이런 엄청난 일이 다만 하나님 야훼와 사탄의 내기로 이루어진 일이라니… 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믿고 싶지도 않는 일이다.

오늘날 부조리의 비정상적인 일들이 홍수처럼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이같은 일들이 행여 하나님도 함께 하는 사탄의 작난이라면? 그런 상황에의 하나님을 보면서, 우리는 그 하나님을 계속 우리의 주로 믿고 따라야 하는가? 거의 한계적 상황의 처절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욥은 더한 고통이라도 육체의 고통이라면 참을 수 있으니 제발 이유만을 알려 달라며 매달린다, 까닭도 모른 채 당한 고통을 이겨내기가 그토록 힘든 것이다. 그는 세상에 태어남을 저주하면서 차라리 죽여 달라며 절규하였고 결국엔 야훼를 믿을 수 없어 반항한다.

욥이 처한 상황은 너무 절박하며 인간으로는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이다. 불행을 당한 소식을 듣고 멀리서 달려온 친구들은 알아볼 수도 없는 친구인 욥을 보면서 기도하며 위로한다. 아름다운 우정과 사랑을 보여준 친구들은 욥과 며칠을 함께 지낸다. 그런 친구들이, 극한 상황에서 욥이 하나님에 대한 불경스런 항변을 계속함을 보면서 욥에게 회개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며 충고를 한다. 이유없는 고난은 없다며,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도 욥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면서 회개를 촉구한다. 순종하며 회개하여 간구하라는 주문을 친구들은 욥에게 집요하게 요구한다.

“죄 없는 사람이 망한 일이 있더냐? 정직한 사람이 멸망한 적이 있더냐?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할 수 없다, 공의를 거짖짓 판단치 말라“ 를 반복하면서, 네 친구들은 모두 진지한 태도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욥을 향해, 간곡히 충고를 계속한다. 욥은, 자기를 위로하는 친구들이 눈앞의 자기 고통은 이해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자기의 고통과 재난 역시 죄에 대한 당연한 대가라며, 회개를 촉구하는 친구들의 상투적 답변만을 되풀이 하는 야박함에, 끝내는 배신감마저 갖게 된다.

무조건 회개하며 기원하면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신다는, 모든 화복을 믿음의 공과로 돌리며 인과응보를 내세운 기복신앙의 현존들. 공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부조리, 현실과 무관한 공허한 빈말들, 어설픈 교리와 지식으로 쉽게 판단하여 편의데로 이용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그런 신앙을 부추기며 선동하는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 그리고 이를 믿고 따르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믿음이다.

야훼와 함께 내기를 하는 사탄의 “보상없는 인간들의 믿음은 절대로 불가하다”라는 말을 대변이라도 하는 듯, 오늘날 교회에서도 ‘오직 믿음만이 구원’이라며 믿음을 강요하는 많은 목회자들의 목소리를 우리는 계속 듣고 있다. 욥을 보면서, 사탄의 말에 주목하면서, 인과응보를 내세우며 옹호하는 기복신앙이 날로 성장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과연 나에게도 보상을 바라지 않는 믿음이 가능한가를 깊이 생각해 본다. 나역시 그런 믿음에 의지하여 신앙을 받아들였고, 크리스챤이 되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하나님의 침묵속에 모두가 외면한 채, 알 수 없는 죄를 인정하여 회개만을 촉구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내가 바라던 행복은 오지 않고 화만 들이닥쳤구나” 욥은 계속 탄식하며 또 탄식한다. 가장 처절하게 절망하는데도 의지해야 할 구원의 하나님은 말이 없고, 하나님의 공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욥만이 순수한 인간의 편에 서서 세상의 부조리를 항고하며 원성을 토로하는 인간의 실존을 본다. 우리는 볼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실천할 수 없는 미사려구의 빈말에 불과한 기도를 반복하면서, 우리로써는 전혀 알지도 못한, 인정할 수 없는 죄까지 회개하여야 하며, 계속 우리의 복락을 기원하는, 이같은 이기적 믿음을 갈구하며 지키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이다. 그런 신앙을 우리는 계속 믿고 따라야 하는가?

욥에 대한 하나님의 반문형식의 응답은 전혀 예기치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엄청난 질문들이 계속된다. 욥의 인간의 실존적 항변에 나는 전적으로 동조하면서 드디어 기다리는 하나님의 응답이 38~41장에서 계속되고 있음을 본다.

“어찌하여 세상의 모든 일들이 인간에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인간들이 해아릴 수 없는 일이 있다고 해서 그 일로 하나님을 탓하는 행위가 바르며 정당한 행위인가?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한 존재라도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계속되는 하나님의 반문에 욥은 할 말을 잃고, 새로운 마음의 동요를 느낀다. 세상의 일들이 반드시 이해되어야 하며, 꼭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될 수 있어야만 하는가? 우리들의 통념이 현실에 적응되지 않는다고 하여, 더구나 그 통념은 믿으면 이루어지고 복을 누릴 수 있으리란 기원의, 우리들의 지극한 이기심에서 우러난 것 임에도 말이다. 그래서 아니면 하나님의 공의와 책임을 따지는 것이 우리들의 믿음이 아닌가?

욥에서의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밝힌 인간중심의 세상이 아닌, 인간과 무관한 반인간적 야생세계도 돌보고 기르심을 알려주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인간만을 위한 존재가 아닌 인간세계는 물론, 자연세계를 다함께 아우르는 우주의 하나님임을 분명히 밝히며 인간의 착각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욥기에서는, 세상일을 인간 중심으로, 또한 자기 중심으로 이해하면 안된다는, 경고와 함께 자연의 모든 것을 다 주관하시는 하나님임을 밝힘으로,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인간의 유 불리와는 무관하게, 그리고 이해 여부와도 상관없이, 보다 훨씬 기이하고도 심오함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인간 세상에서 발생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 인간이 겪고 있는 모든 고통과 재앙을 꼭 하나님의 징벌로 이해하며, 인간 중심적이요, 심적인 이기심의 부질없음을, 인간 중심의 착각으로 함부로 하나님을 비난함의 온당치 않음을, 나는 욥기를 보면서 깨우쳤다. 여러 갈등에도 불구하고 실존적 믿음에는 더욱 다가선 느낌이다. 다만 사탄의 농간으로 처절하게 망가진 욥의 불행을 보면서, 사탄의 내기를 하나님과 함께 했다는 사실이 계속 여운으로 남는다. 그것이 믿음 없는 나의 한계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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