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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파장

- 유정아(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홍상수 감독의 다섯 번째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는 제목은 초현실주의자 루이 아라공의 시 ‘미래의 시’에서 따온 구절이다. 소위 ‘구체적 일상을 탁월하게 묘사한다는’ 평가를 받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의외로 ‘초현실주의적’으로 읽힐 여지가 많다. 그의 영화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여러 꿈 장면들은 이런 생각을 뒷받침한다. <극장전>에서 느닷없이 등장한 백색 미녀. 그녀는 모텔 한 구석에서 아작아작 사과를 씹어먹다가 난데없이 ‘드실래요’라며 주인공에게 말을 건넨다. <밤과 낮>에서는 말도 안 되게 관계가 얽힌 등장인물들이 뜬금없이 부부로 등장해 역시 말도 안 되는 에피소드를 보여준다. 그 의미를 묻는 기자에게 홍상수는 말했다. “당신은 당신의 꿈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현대 미술에서 ‘꿈’은 매우 중요한 모티브이다. 꿈은 언제부터 예술의 주요 소재가 되었을까? 물론 더 오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시작해보자. 이 시기 예술은 오랫동안 지켜왔던 정조를 버리고, 순백색의 캔버스 위에 새롭고 낯선 것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피카소는 타원형 캔버스의 테두리를 따라 긴 밧줄을 붙인 작은 정물을 만들었다. 이 정물화에는 ‘그리지 않고 직접 붙인’ 등나무 문양의 유포와 함께 대중문화의 상징인 신문(Journal)의 첫글자 ‘JOU’이 디자인 되어 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이끌었던 타틀린은 기하학적 추상을 그리는 대신, 그 비슷한 모양새를 재료 -철과 유리, 아스팔트- 그대로 평면 위에 붙여 회화인지 조각인지 모를 작품을 선보였다. 이들은 사물을 캔버스에 재현하는 오랜 회화의 관습을 포기하고, 다양한 꼴라쥬를 통해 순수하고 전통을 고수하는 미학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미학에 대한 도전에 그치지 않고, 본격적으로 부패한 부르주아 사회를 타파하고, 모든 것을 부정하고 거부하며 다다이즘이 등장했다. 예술 그 자체를 부정했기에, 출발부터 몰락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던 다다이즘은 ‘다다의 가르침마저도 믿지 말라’는, 마치 선승의 유언과도 같은 명언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 소멸의 장소에 세계를 구원할 보다 희망적이고 구체적인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한 운동이 ‘초현실주의’이다. 기성세대의 위선과 인습에 대항하기 위해 앙드레 브르통을 중심으로 모인 파리의 젊은 예술가들은 현실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예술운동을 시작했다.

1924년 발표된 1차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브르통은 ‘외견상 모순적으로 보이는 두 상태인 꿈과 현실이 일종의 절대적인 현실성, 말하자면 초현실성 안에서 용해될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늘 마주하는 삶, 일상적인 평범한 사물들 속에서 ‘초현실’의 놀라운 세계를 발견했다. 그들은 익숙한 일상적 오브제를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바꾸어버림으로써, 인간의 객관적인 이성을 혼란스럽게 하여 인습과 논리의 구속을 벗어나게 하고자 하였다. 친근하고 평범한 일상 오브제나 이미지를 엉뚱하고 기묘한 존재로 변형시켰던 마그리트나 달리, 에른스트 그리고 코르넬의 작업은 모든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신비로운 초현실의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를 찾으려는 희망을 표현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 문학가 루이 아라공은 소설 <파리의 농부>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데카르트의 논리와는 다르게, 감각적인 직관에서 생겨난 환상이 이성의 올바른 판단을 그르치게 하는 함정이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밝힐 수 없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특이한 길’이라고. 이는 브르통이 ‘초현실주의 선언문’에서 ‘이성의 속박으로부터 상상력의 해방을 주장하고, 광기의 입장을 옹호했던 것’과 일치하는 주장이다.
브르통이 사실주의 소설의 진부한 묘사를 비판하면서 일체의 묘사를 거부하고자 했던 것은 그런 묘사가 독자의 상상력을 전혀 자극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었다. 반면 아라공은 극도의 사실적 묘사를 통해서 독자에게 대상에 대한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한편, 동시에 낯선 느낌을 갖게 하면서 현상의 신화적 요소를 발견하도록 했다.

이처럼 초현실주의 미학은 시인 로트레아몽의 ‘해부대 위에서 만난 재봉틀과 우산’이라는 유명한 시구처럼 서로 만나게 될 당위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한 상황 속에서 만났을 때 생기는 시적인 감동에 근거를 둔다. 브르통은 ‘우발적이면서 마술적인 발작적 아름다움(compulsive beauty)’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발작적 아름다움이란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미의 개념처럼 세심하게 조절된 조형적 탐구에 의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우연히 발견된 평범한 사물들이 개인의 상상력 또는 무의식과 상응하면서 갑자기 무의식 속에 묻혀있던 진실을 이야기하는 마술적이거나 신비한 사물로 변모될 때 일어나는 예기치 않은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오브제의 외부적인 리얼리티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듯이 보이면서도 우연적이고 비논리적인 문맥 속에 놓이도록 하는 초현실주의 미술가들의 작품들은 바로 이런 새로운 개념의 미를 창출하려는 시도였다.

아라공은 회화에서의 콜라주와 문학에서의 인용문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글 속에 다른 사람이 쓴 것을 옮겨 넣거나, 광고문이나 벽보, 신문기사처럼 일상생활의 현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내용을 그대로 텍스트에 옮겨놓는 방법을 콜라주라고 정의한 바 있다. 아라공은 자신이 콜라주의 강박증에 사로잡혀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위에서 언급한 소설 <파리의 농부>는 바로 그런 시절의 작품이다.

종합해보면 콜라주는 이렇게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정성을 기울이지 않은 듯한 표현, 불완전한 것과 미완성적인 것의 취향,
아름다움에 대한 무관심, 매력적 형태의 거부,
익명성, 허술함, 일시적인 것, 이질적 요소들의 우연한 마주침,
개인적인 미술의 종말”

이성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꿈의 세계에서는 어떤 모순적인 사건도, 예기치 못한 뜻밖의 상황도 자연스럽게 등장하는데, 마그리트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의 비논리적 병치는 그 좋은 예가 된다. 평범한 일상 오브제나 인물의 모습을 극히 재현적으로 그린 마그리트 회화는, 모순적이고 비논리적인 관계 속에서, 마치 ‘발작’을 일으킬 듯 당황스럽고 다소 위험스러워 보이는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서로 걸맞지 않는 요소들의 결합에서 예기치 못한 놀라운 조형효과를 얻는 마그리트의 회화적 장치를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이라고 부른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이질적 결합을 이루는 요소들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평범하고 친근한 것일수록 상례를 벗어난 엉뚱한 조합에서 오는 데페이즈망 효과가 더욱 배가된다는 점이다.

막스 에른스트(Max Ernst)는 다양한 콜라주의 기법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1921년 파리에서의 개인전을 계기로 독일을 떠나 파리에 정착하면서 초현실주의 그룹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던 에른스트가 작품제작에 사용했던 콜라주나 프로타주는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조형기법의 하나로 인정받게 되었다. 에른스트는 스스로 ‘걸맞지 않아 보이는 두 개의 리얼리티가 하나의 평면 위에 놓이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는 콜라주 기법을 이용하여, <백 개의 머리를 가진 여인>(1929), <카르멜 수녀원에 들어가기를 원한 소녀의 꿈>(1930), <자선주간>(1934)등, 마치 연금술과 같이 비밀스럽고 수수께끼같은 스토리가 전개되는 콜라주-소설(Romans-Collage)을 제작했다.

<자선주간 Une semaine de bonté>에서 볼 수 있듯이, 여러 책으로부터 가져온 다양한 이미지들을 엉뚱한 결합으로 병치시킨 콜라주-소설은 붙여진 개개의 이미지들이 구체적인 현실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평범한 일상의 모습을 보는 듯하지만, 실상은 그 이미지들의 조합이 너무도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관람자는 어느새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기묘하고 경이로운 세계로 빠져 들어간다.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세계의 요소들을 비논리적으로 결합한 에른스트의 작품은 한마디로 현실과 꿈, 친근한 것과 낯선 것, 사실적인 것과 상상의 것이 혼재하는 경이로운 초현실의 세계를 보여준다.

벤야민은 이 초현실주의자들에게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혁명적 에너지를 발견했다. 꿈들이 갖는 심리학적 근원을 분석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꿈들이 깨어남에 가져다주는, 그러나 이성이 보통 경시하는, 미세한 눈짓들, 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그 눈짓들을 포착하려고 했다. 꿈은 규율 받지 않은 경험의 매개체가 되어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유의 각질 표면에 맞서는 인식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지극히 ‘사적’으로 보이는 꿈의 세계로부터 어떻게 혁명적 에너지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 앞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의 작품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이 기나긴 여정을 따라가보자.

(참고글 : 오진경, ‘다다와 초현실주의 미술에 나타난 평범함의 정치학’ ;오생근,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와 초현실주의’)

응답 2개

  1. hermes말하길

    감사합니다. 역시 전… 예술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의 관광안내 가이드는 벤야민입니다. 함께 긴 여행을 해 보시지 않겠어요? *^^*

  2. 요리조리말하길

    진실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들리는 것이라 했던가요?
    앞으로 꿈을 다룬 작품들을 볼 생각을 하니 기대가 많이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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