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무한독전

존재의 이유, 놀이

- 박카스(수유너머R)

존재의 이유로 놀이

이번 설에 부모님 댁에 갔을때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동생이 나에게 물었다.

형, 잘 지내지? 근데, 형 공부하고 있는 거 맞지?

그럼 예술하는 거구나? 그렇지?
‘아니, 놀아.’
‘아, 진짜 장난치지 말고. 형 이제 곧 서른이잖아
형, 내 친구들한텐 우리 형, 예술 한다고 했어. 멋있다고 그러드라.’
‘논다고 그래.’
아.. 참.. 정말..
‘형, 맨날 수유너머에서 뭐하잖아.’
‘거기서도 맨날 열심히 놀아.’
하… 말도 안돼. 우리 형이 이렇게 될 줄이야.

‘놀면서 산다는게 이상한 거야?’ 나는 동생에게 이렇게 묻는 대신 “뭐, 놀때도 있고.. 일할 때도 있고.. 그래도 나는 노는 게 좋더라. 너도 그렇지 않냐?” 라고 물었다. 위와 같은 동생의 질문은 동생이 없을 때 간혹 스스로에게 들리는 질문이기도 한다. 이럴 때 스스로에 대한 최종 질문격인 ‘그냥 살래? 잘 살아볼래?’라는 물음에서 잘 살아보겠다는 대답의 방향은 항상 놀이 하면서 사는 삶으로 나를 움직이게 한다. 여기서 나에게 말하는 놀이란 ‘철학을 공부한다’, ‘연극을 만든다.’ ‘술을 마신다’ 등의 이름 지어진 행위 자체로 똑 떼어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나에게 있어서 놀이는 ‘~를 위하여’가 없이 하는 행위들, 뒤에서 지켜보는 감시자나 채점자 없이 혹은 그런 사람이 있을 필요 없이 자신을 가꾸는 무언가를 친구들과 함께 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놀이를 하면서 사는 것은 적지 않은 불안을 따르게 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세계 곳곳에는 위의 대화에서 동생의 대사에 십분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놀이 하면서 살겠다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시선, 그런 시선들을 만들어내는 공간, 시설물, 영상, 이미지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시한번 따져봐도 놀이는 중요하다. 내가 알고 있는 건강하고, 좋은 삶을 사는 사람들은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함께 어떻게 놀까에 열심히 고민하고 행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경제적 이익보다 함께 어떻게 잘 놀 수 있을까에 늘 빠져 지낸다. 놀이는 결코 여유의 부산물이 아니다. 놀이는 존재의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놀이터 만들기

그러나 조금만 도심으로 발을 디디면 이곳은 놀 수 있는 곳인가? 하고 묻게된다. 거리를 조금 뛰어다닐라 치면 어디선가 자동차 크락션이 빵빵거리며 내 고막을 친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은 점점 협소해지고, 학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네 댓명이면 차는 작은 공터에서 모여있다가 주차장을 기웃거리다가 건물관리아저씨에게 꾸지람을 듣는다. 서울 종각 근처에서는 거대한 빌딩의 화려한 불빛들이 뿜어져나오고, 사람들은 불빛을 따라 청계천의 다리 밑으로, 건물 안으로 몰려들어간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목소리를 내었던 광장은 거대한 두 동상의 전시장이 되어버렸다. 또 한쪽 서울의 한 복판 도심의 가판대에는 청소미화원 분들이나 버스기사님들을 학생으로 만들어버린 표창장이 내걸렸다. 선생이나 관리자의 위치로 자신들을 자리하게 했을 때 생겨날 수 있는 표창장 하사라는 디자인 발상은 나의 신경을 자극한다. 그리고 또 한편에서는 여전히 개발의 압제로 또 하나의 삶의 공간이 철거위기에 놓여있다. 누군가의 삶의 공간들이 개발과 공사로 인해 사라져간다. 이러한 삶의 공간들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여기 도시공간에서 사라지는 것들은 무엇일까? 그리고 생겨나는 것들은 무엇일까?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뉴욕의 이민자 출신 예술가이자 활동가인 코소 이와사부로는 그의 저서 뉴욕열전에서 세계도시로의 뉴욕의 힘은 개발이 아닌 잡다한 민중이 본래 가지고 있는 밀집, 근접성이라고 말한다. 그는 잡다한 민중의 도시공간을 치마타라 표현한다.

‘치마타’란 본래 ‘길이 걸쳐 있는 곳’이라는 뜻이며, ‘이별의 길’이나 ‘교차로’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도시 민중들이 만나고 모이는 장소, 어디에나 있는 ‘교류와 교통의 공간’을 지칭한다. 따라서 각종 의식이나 축제의 공간, 퍼포먼스 공간, 시장, 정치적 주장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한편, 치마타와 대비하여 말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진행은 전 줄리아니시장 등이 뉴욕에 추구했던 교외로의 도시화를 말한다. 교외로의 도시란 철저히 보안되고 관리된 공간, 주택지가 확대됨에 따라 주변에는 온갖 쇼핑몰이 출현하고, 공공기관과 비슷한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교외는 참으로 쾌적한 생활공간인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세계에서 이곳만큼 극심하게 불균등한 부의 집중을 추구하며, 전지구적 자원 낭비가 많은 생활형태는 없다고 이와사부로 코소는 말한다. 덧붙여 저자는 교외는 참으로 쾌적한 생활공간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삶의 방식 속에서는 삶과 관련된 각종 욕망들이 쇠퇴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럼, 우리의 도시기획안에 당신들도 참여하길 바랍니다.’
나는 이전에 해치맨 프로젝트팀과의 인터뷰에서 그들이 내게 들려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해치맨프로젝트팀이 서울시 디자인기획에 대해 물음을 던졌던 퍼포먼스 하고 난 후, 서울시디자인관계자 중 한사람이 오히려 그들에게 디자인안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보자고 전화를 걸어왔다고 하였다. 이에 해치맨은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싶었다고 말했다. 위와 같이 도시 기획에 함께 답을 내보자고 말하는 시당국의 노력에 뉴욕열전의 저자 이와사부로 코소는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내륙적 미국, 교외와 달리 치마타를 이루는 것은 도시공간을 무대로 한 투쟁에서 그곳에 살고 있는 그들 자신의 존재와 그들이 ‘일상성’ 속에서 이뤄내는 모든 생산이 문화이자 무기가 된다. … 군중과 달리 도시적 민중의 힘이란 그들에게는 먹는 것과 주거하는 것에 해당하며, 이는 곧 삶 그 자체를 통해 문화생산(투쟁)을 형성한다. 이러한 도시 민중의 존재가 지닌 ‘삶’이 치마타를 이룬다. … 이 투쟁은 신체성, ‘떼’를 이루는 방식, 지성, 기술, 습관, 정동 등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삶의 정동을 중히 여기며 그러한 삶의 다양한 정동을 이끌어내는 네트워크 연결자들의 노력이 여기 이곳을 전시회장이 아닌 정동의 공간인 놀이공간으로 되살아나게 할 것이다. 뉴욕열전에서는 이러한 문화투쟁의 사례로 폐가나 철거 위기의 집을 점거하며 그곳에서 삶을 이루어 나갔던 스쾃운동이나 도심의 아스팔트 사이로 혹은 빈터에 식물들을 심는 뜰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치마타와 젠트리피케이션간의 공간싸움은 뉴욕 뿐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우리에게도 이미 항상 벌어지고 있다. 홍대의 두리반 투쟁이 이와 같은 공간을 둘러싼 개발과 도시적 민중의 삶의 싸움을 대표적으로 잘 보여준다. 지금 어느 곳으로 발걸음을 향해야할까? 나의 발걸음이 이곳을 놀이공간으로 만들 것인지, 전시회장으로 만들 것인지, 나를 놀 수 있는 귀한 사람으로 만들지, 놀 수 없는 짓눌린 자로 만들지를 말해줄 것이다.

지금 여기 우리의 놀이를 위하여

놀이와 노동. 그것은 특정 행위로 구분질 수 있다기보다 어떤 관계를 지향해가는 가가 보다 둘 간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이와사부로 코소는 뉴욕열전에서 이러한 집합성내 관계를 중요시하는 액티비스트들을 소개하며 예시적 정치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액티비스트들은 자기 존재와 존재의 일부분으로 구성된 집합성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가치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이러한 집합성이 운동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이라고 여긴다…
현대 액티비즘은 예전의 운동과 비교해 볼 때, 모든 의미에서 유연하며 유동적인 ‘실천형태’ 속에 관계되어 있는 개개인의 정열과 의지와 힘에 맞춰 그 어디까지라도 개입해 갈 수 있는 미정의 가능성을 지닌 운동이다. 생활형태, 신체성, 정동, 인간관계, 가치를 형성하는 총체적 변혁에 이르기까지 미정의 가능성을 지닌다. 액티비즘이라는 개념은 힘과 가능성을 현재진행형으로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가능성과 미결정성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기치를 세우고 있는 이상사회를 ‘바로 지금 이 운동단체’ 속에서 실현하는 것 이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예시적 정치의 원리에서 기인하고 있다.

예시적 정치란 의도적으로, 자신들이 만들고 싶은 사회와 비슷하게 조직을 만드는 것을 뜻한다. 낡은 사회의 껍질 속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예시적 정치를 통해 조직을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거나 ‘혁명가의 책무는 국가 권력을 획득하는 일이다.’라고 하는 사고를 거절하면서 지배기구의 실태를 폭로하고 그 부당성을 밝혀내며, 해체하는 한편, 거대한 자율적 공간을 획득하여 참가형 운영을 실현해야 한다고 보았다.

… 예시적 정치란 해방운동을 지향하는 자들이 타도해야 할 적들의 제도(국가권력)를 모방하여 스스로 제도를 형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운동을 형성하는 집단의 집합성 속에서 이미 ‘지금 이곳에서’ 해방된 관계성을 형성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윤리적 결의를 갖는다.

저자는 책에서 상품화 되어버린 예술에 대해서 냉소적인 반응을 내비친다. 그러나 한편 예술이 단순히 상품가치를 올리려고 하거나 한 개인에 대한 추종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정동을 끌어올릴 수 있는 표현들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가능성을 찾는다. 그리고 이때의 예술은 권력을 거머쥐는 것이 아닌 다르게 살아가는 삶에서 발현되는 정동의 전파를 중히 여기는 예시적 정치와 만나고 있음을 저자는 밝히고 있다.

우리가 ‘논다’ 고 말했을 때 이는 누군가의 명령이 아니라 자기의 명령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자기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은 누군가에게는 고역처럼 보이는 일들도 의욕에 차서 그 일들을 해나간다. 그리고 이러한 즐거움을 한 개인이 자신의 작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해 나갈 때, 그때의 즐거움은 함께 하는 놀이의 즐거움으로까지 퍼져나갈 것이다. ‘함께하는 놀이’는 타인에 대한 권위를 가지려는 욕망 대신에 즐거움을 친구들과 나누고자 하는 욕망과 함께한다. 따라서 이러한 욕망에서 비롯되는 놀이가 이어질 때 나와 우리는 타인을 죽임으로써 생겨나는 웃음을 그치고 삶의 의욕에서 생겨나는 즐거움을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를 위함없이 함께 할 수 있는 놀이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러한 놀이 네트워크를 창조해나가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이곳에서는 하나의 힘들어간 목소리에 짓눌린 소리들 대신 친구들과 함께하며 생겨나는 웃음소리 역시 늘어나게 되리라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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