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잃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얻은 것은 예술이로다

- 박정수(수유너머R)

작년부터 이상하게 예술이나 문학이 자꾸 땡깁니다. 청소년 시절에는 꽃무늬 편지에 온갖 공감각적 수사들로 치장된 편지를 남발했고 불문과 다니던 대학시절에는 “문학이란 말야. 삶의 바다에 언어의 그물을 던지는 행위야.” 따위의 말 만들기를 좋아하던 ‘문청’이었는데, 10여년 동안 “소설책 읽을 시간 있으면 철학책 한권 더 보겠다.” 라며 문학을 등지고 살았는데, 작년부터인가 자꾸 문학이나 예술 쪽으로 눈길, 아니 발길이 갑니다.

그래서 멀쩡한 G20 포스터에 “불길한” 쥐 그림을 그려 “우리 국민들과 아이들로부터 청사초롱과 번영에 대한 꿈을 강탈한” 극악한 범죄행위까지 자행하고 말았습니다. 개념을 창안하는 철학적 사고는 게을러지고 형상을 창조하는 예술적 상상만 부지런해집니다. 요즘에는 연구실 옆에 있는 조그만 놀이터에 ‘갤러리 텃밭’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버려진 변기, 청바지, 인형, 차량통제 고깔 따위를 주워다 딴에는 예술적 화분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습니다. 너무 재미져서 책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주위에서 “공부는 언제 해? 연구자는 그만 둔 거야?” 소리를 들을 지경입니다. 꽤 오래 동안 문학서적은 등 돌리고 살았는데 요즘은 루신과 카프카에 매료됐습니다. “철학이나 사회과학서적이 소설책보다 페이지 단위당 정보량이 훨씬 많은데 왜 소설책을 봐?” 라고 말하곤 했는데, 요즘엔 반대입니다. 행간의 침묵까지 포함하여 문학책이 훨씬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는 쪽입니다.

문학이나 예술이 땡기게 된 시점은 ‘노들야학’ 사람들과 인문학 세미나를 시작한 시기와 겹칩니다. 미셀 푸코의 책을 같이 읽었는데 무지 힘들어 하시더군요. “말이 너무 어려워요.” 저는 노들 사람들의 삶과 싸움의 체험을 통해 푸코의 언설들이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 것 같아 좋았는데, 저만 배우고 노들친구들은 별 감흥을 못 받은 듯했습니다. 그 다음엔 루신을 읽었는데, 와, 이분들 ‘물 만난 고기’인 양 쭉쭉 빨아들입니다. 제가 못 본 부분까지 세심하게 읽어내고, 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기막힌 해석이 줄줄 나옵니다. 푸코의 언설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느 루신 해설서보다 훨씬 심오한 내용이 그들의 입에서 줄줄 나오는 걸 보고 감탄을 금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문학과 예술이 땡기게 된 건 정치와 삶의 현장에 부딪히면서인 것 같습니다. 책상과 컴퓨터 바깥에서 문학(예술)의 공간이 열린다고 할까요. 블랑쇼의 표현을 빌리면 자아의 세계 바깥, 언어와 개념의 바깥, 이념과 표상의 바깥, 머물러야 할 세계 자체의 바깥에서 열리는 삶의 공간 말입니다. 블랑쇼에게 그 ‘바깥’은 형이상학의 고향이 아닙니다. 개념적 표상이나 목적의 이념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무수한 침묵의 소리들이 웅성거리는 삶의 지대입니다. 그 ‘바깥’이야말로 진짜 정치적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정치적이란 건 이념적인 게 아니라, 시적입니다. 언어가 멈추는 지점, 이념이 무너진 지점에 정치가 있습니다.

그 바깥은 ‘함께-존재-함’의 체험 속에 열립니다. 공부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함께 하는 거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했지만 사실 공부방에 여럿 있어도, 사람들과 세미나와 강의를 해도 여러 ‘혼자’들이 모여 있을 뿐 ‘나’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타자와 함께-존재-함은 별로 느끼지 못해 왔습니다. 쥐 그래피티 사건 속에서 ‘나’는 익명의 말들, 비인칭의 힘들 속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말더군요. 요즘은 그 타자의 바다에서 유영(遊泳)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일명 ‘갤러리 텃밭’을 통해 동네 아이들과 친해졌습니다. 변기를 주워다 수련을 심고 ‘마농의 샘’이라 우기고 있는데 동네 아이들이 와서 보고 재밌다며 같이 하자는 겁니다. 지금은 열 명이 넘는 갤러리 텃밭 회원들의 두목 역할(덤샘!)을 하고 있습니다. 극성스럽기로 소문난 해방촌 아이들과 부대끼며 노느라 정말 정신 없습니다. 루신을 함께 읽으면서 노들야학이 그저 ‘夜學’이나 ‘운동단체’가 아니라 ‘공동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비장애 교사, 상근 활동가, 장애학생들이 일상을 공유하고 싸움을 함께 하고 꿈을 나눠 꾸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언젠가 나도 저들 속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따위 개인적인 얘기는 이번 호 대문 기획 ‘시대를 거스르는 사상가 4: 모리스 블랑쇼’를 소개하기 위함입니다. 대학원 다닐 때 친구가 블랑쇼 가지고 석사논문 쓴다고 맨날 ‘문학은 죽음이야’ ‘문학은 실수와 방황이다’라고 한 걸 주워들은 것 말고는, 문학과 등진 10여년 동안 읽을 기회조차 없었는데, 올해 다시 읽으니 작년부터 제가 꽂힌 게 뭐였는지 명쾌하게 이해되더군요. 문학(예술)과 삶, 문학과 외부, 문학과 정치, 문학과 공동체에 대해 고민하시는 분들, 정치적인 예술가가 되고 싶은 분들께 블랑쇼를 권합니다.

쥐 그래피티 사건에 대한 3차 공판에 오셔서 용기를 북돋아 주신 박준상 샘께 다시 한번 감사 말씀 드립니다. 명쾌한 논리와 달변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 ‘침묵’과 ‘납함吶喊’ 속에 옹골차고 풍요로운 삶을 품고 계신 박준상 샘의 인터뷰부터 읽어보시지요.

응답 2개

  1. 남창훈말하길

    아주 멋지게 사시는 분이신 것 같습니다. 얼마전 구제역 관련된 글을 올렸던 남창훈이라고 합니다. 죽은 사회 속의 ‘생기’는 마치 밤하늘의 반딧불처럼 신비스럽고 아름답기만 한 것 같습니다. ‘삶으로 완성되어가는 논리, 운동, 변혁 등등’ 말로는 쉽게 나오지만 실제는 얼마나 어려운 것들인지요. 건승하셔서 멋진 사회 만드는데 큰 힘이 되어주시기를 기원해 봅니다.

  2. 이경말하길

    저도 최근에야 문학의 힘을 알게되었어요..!
    블랑쇼도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아무튼, 텃밭에 놀러갈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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