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연극, 바깥의 경험

- 모기

나에게 그 어려운 블랑쇼의 글을 나름 해석할 수 있게 해줬던 것은 그간 꾸준히 해오던 연극작업에서였다. 러시아 심리주의 연기 시스템에는 ‘믿지 못하는 순간’이라는 용어가 있다. 그것은 배우가 무대 위에서 재현해 내야 하는 순간인데, 어떤 인물(캐릭터)이 극 중에 어떤 사건과 부딪쳤을 때 이 순간이 찾아온다. 즉 그 사건을 믿지 못하고 의미화 하지 못하는 순간, 말을 잊어버린 순간이다. 인물이 어떤 한 목표를 가지고 행위1을 하다가 행위1을 불가능하게 하는 어떤 사건과 마주쳤을 때 그 사건을 이겨내고자 행위2로 넘어간다. 하지만 그 전에 꼭 이 ‘믿지 못하는 순간’을 거쳐야 한다. 만약 배우가 이것을 해내지 못하면 연출은 배우의 연기를 잠시 멈추게 하고 ‘당신은 그 사건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면 배우는 묻는다.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나요? 저는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도무지 믿기지 않습니다.’ 연출 왈 ‘자신을 내려놓고 상대 배우를 봐라. 무대 위의 모든 것들을 들어라. 외부를 향해 자신을 열어라.’

블랑쇼는 바깥을 이야기 한다. 바깥, 어떠한 목적으로도 포섭할 수 없는 지대. 의미화가 불가능한 지점. 그곳에서 제3의, 중성적인 것이 출현하는 지점. 배우의 입장에서 얘기하자면 하나의 캐릭터의 구현이 불가능해지는 순간. 연기가 불가능해지는 순간. 인물이 아닌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가 그 자체로 드러나는 순간. 이야기가 멈추는 순간이다. 이 순간을 연기하는 배우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냥 수동적으로 마냥 서있기만 하다. 배우는 상대 역할에게 서로 개입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공황의 상태, 멈춤의 시간에 빠져든다. 겉보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순간이고 소통이 막힌 순간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순간이야 말로 갈등하던 두 인물(희곡상의)이 소통하는 순간이고 같은 시간을 사는 순간이다. 관객들 또한 이 순간에 가장 인물들과 동일시된다. 즉 대사가 멈추는 순간, 서로의 어쩔 수 없음을 드러내면서 무기력하게 멈춰 있는 그 순간이 역설적으로 가장 급진적으로 소통하는 순간인 것이다.

따라서 희곡에서 하나의 인물이 구축되는 방법은 그 역할이 불가능해지는 지점, 그 역할의 바깥을 드러냄으로서 가능하다. 여기에 모든 내러티브의 아이러니가 있다. 내러티브는 한 인물의 바깥을 넘어 결국 내러티브의 바깥을 향해 있다. 내러티브가 불가능해지는 지점, 이야기하기의 한계 상황 속에 이야기 자체의 현전이 있다. 수많은 부조리극들은 바로 이점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연극은 이러한 방법을 좀 더 확장시킨다. 한 인물의 바깥, 한 희곡의 바깥이 아니라 공연 자체의 바깥을 드러낸다. 영국의 ‘폴스트 엔터테인먼트’(Forced Entertainment)는 이러한 실험을 꾸준히 해온 극단이다. 그들은 <괴로움을 말하라>(Speak Bitterness)라는 작품을 통해 관객과 평단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이 작품은 배우가 관객 앞에 놓인 긴 테이블 뒤에 서서 종이에 적힌 고백을 읽는 행위로만 6시간 동안 진행되는 공연이었다. 이러한 방식의 공연이 과연 가능할지 대부분의 단원들조차 확신하지 못하였지만 공연은 성공하였고 이 후 이들은 유명세를 탔다.

<괴로움을 말해라> (Speak Bitterness)

그 후 연출가인 팀 에첼은 이러한 방식으로 무대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일련의 작업들을 선보인다. 미리 정해진 간단한 규칙만을 공유한 채 배우들의 장시간 즉흥연기를 펼친다. 한국에서도 공연된 바 있는 <퀴줄라!>(Quizoola!)는 세 명의 배우가 미리 준비된 이천 개가 넘는 질문지 중에서 몇 개를 선택해 질문하고 답하는 방식으로 여섯 시간 동안 진행된다. 이 때 배우는 관객과 미묘한 게임에 돌입하게 된다. 배우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질문들에 즉흥적으로 대답하는 가운데 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가상의 상황과 실제 자신의 대답사이에서 통제력을 잃기 시작한다. 관객들은 배우가 하는 말의 진실여부를 확인할 수 가 없다. 어디까지가 배우가 꾸민 이야기이고 어디까지가 배우 자신의 이야기인지 알 수 없지만 연극적 약속을 지키려는 배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흔들리는 불안함을 경험한다.

<퀴줄라!> (Quizoola!)

물론 배우로서, 한 인간으로서 ‘통제력을 잃는다’는 것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너는 수단, 전략, 좋은 아이디어의 목록들, 명료성, 자신을 방어하려는 능력이나 영향력과 같은 무언가를 잃어가는 동안, 너는 또한 매우 값진 것을 얻는다 – 실제 순간에 대한 감수성과 집중력, 이때쯤 너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행동하는 것에 매우 근접해 있을 것이다. (Etchells, 2004:101)

팀 에첼은 이렇게 역할 수행에 실패하고 관객에게 위험에 노출된 체로 무대의 규칙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며 더욱더 그 역할에 천착하고 있는 배우를 ‘투입’의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투입’상태에 놓인 배우들은 관객들에게 무대화하려는 모든 노력이 불가능해지는 순간을 보여준다. 관객에게 의미를 전달하려는, 보여주고자 하는 의지의 한계 상황. 이 때 모든 의미가 말소된 중성적인 무대자체가 드러난다. 이 무대의 현전은 관객에게 사건으로 다가간다. 이 순간, 무대의 현전을 목도한 순간 관객은 ‘목격자(Witness)’가 된다고 팀 에첼은 말한다. 무대가 말소되는 지점에서, 무대의 불가능성 속에서, 무대의 바깥에서, 타자로서의 무대의 현전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본질적인 연극적 경험이고 ‘목격자’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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