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농사 일지 12. 재동아, 돌아와 다오.

- 김융희

설친 간밤으로 막 잠에 들려는데, 새벽부터 산새가 창밖에 날아들어 지지대며 잠을 깨운다. 짜증보다는 스친 생각에 후닥닥 문을 박차며 밖을 살핀다. 훌쩍 나르는 놀란 산새의 기척일 뿐, 갈망의 선한 그 놈의 모습은 전혀 보이질 않는다. 허희탄식의 짠한 마음, 무엇이 지금 나를 이토록 짠한 마음에 애타는 갈망을 불러오는 것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에 갈망은 더해간다. 벌써 보름도 넘었나보다. 우리집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재동이의 이야기이다. 철통같은 올올의 임무로 집과 장포를 지키며 이녀 년을 함깨 해 온 재동이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밤중에도 문을 열면 바람처럼 달려와서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그 놈의 모습이 선하다. 행여 밤중에 돌아오지나 않았을까, 나는 밤이면 몇 차례씩 문을 열어보곤 한다.

숲속 외딴 집은 산짐승들로 늘 안전을 위한 경비가 요구된다. 밤이면 노루 고라니 살쾡이는 물론 멧돼지들이 대가족을 이끌며 장포를 짖밟고, 울안까지 수시 무단 침입을 한다. 낮에는 비들기를 비롯한 새들이 밭에 내려앉아 뿌려둔 씨앗을 거둬먹이로 싹쓸이 해치워, 피해는 물론 매우 골칫거리다. 주위의 농가들이 이런 문제로 많은 피해를 당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집은 재동이가 영특하게 집을 잘 지켜주고 있어 전혀 안심하며 지내왔다.

그런 재동이가 자리를 비우자 벌써부터 뿌려둔 열무 씨앗을 비들기들이 쪼아 먹었으며, 텃밭에는 짐승의 발자국들이 심하게 나있다. 새벽에는 창문앞에 나타난 새들이 새벽잠을 설치게도 한다. 토끼 노루는 나타나면 잡혀 죽으며 돼지들도 재동이에겐 얼씬데며 함부로 근접을 못한다. 곡식 낱알이 마당에 널려 있어도 새들은 얼씬을 못하며, 새벽 창문곁에도 감히 접근을 삼간다. 이곳 저곳에 숨어 지내는 쥐새끼들이 부쩍 늘어 설침도 요즘 자주 보인다.

우리 집엔 재동이 말고도 건우, 분이, 살살이가 있다. 모두가 진돗개로, 넷이서 사위의 일면씩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분이와 살살이, 재동이는 암놈이요, 건우만이 숫놈이다. 숫놈인 건우의 나이가 제일 위이며, 살살이와 재동이는 분이의 새끼로, 재동이가 제일 막내놈이다. 건우와 분이는 이미 늙어 비실거리며, 살살이는 독기가 얼굴에 배어 표독스럽고, 재치가 있어 이름도 재동이는 막내답게 활력이 넘치고 용감하다.

연장의 숫놈인 건우는 그들의 가장으로 군림한다. 그런데 모녀간에도 암놈들의 질투는 대단하다. 건우 앞에서는 모녀간의 체면도 위계도 없고, 오직 힘만 있을 뿐이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보지를 못해 붙으면 싸움질이다. 싸움은 그야말로 혈투로 물고 할퀴며 유혈이 낭자하게 사투가 계속된다. 그래서 멀리 떨어져 단단한 개줄로 메둬야 한다. 특히 싸움질이 심한 분이와 살살이는 꼭 메어있고, 건우와 재동이만 자유롭게 활동한다.

그런데 메어둔 놈들이 발버둥을 치다가 풀린 경우가 가끔 있다. 언젠가는 공교롭게도 분이와 살살이가 밤중에 같이 풀렸다. 아마 사나운 짐승이 접근을 해와 발악하며 발버둥을 치다가 줄이 견디지 못해 풀렸었나 보다. 밤중에 둘이서 싸움이 붙었다. 가끔씩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쓰러져 있으면서도 서로 머리와 목을 문 채, 헐떡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낭자한 피로 온몸이 물들어 있고, 완전 기진맥진이다. 나의 접근으로도 싸움은 끝이 아니다.

내가 다가가면서 더욱 격렬해진다. 띄어 말리려 하지만 막무가내 어림없는 일이다. 어느 놈인가 꼭 한 놈이 죽어야만 할 것 같다. 이것이 진돗개의 근성이다.

TV에서 ‘동물의 세계’ 프로처럼, 동물의 세계는 인간 세상사 못잖게 재미있다. 건우란 놈이 젊어선 산과 들을 질퍼 다니고, 온 동네를 싸돌며 바람을 피우더니, 지금은 늙은 몰골에 앉아서 졸거나 조강지처인 분이 곁에서 거의 소일한다. 그래도 재동이가 있을 땐, 버거운 외부 침입자를 만나면 재동이를 거둘거나 함께 동행 거동을 하더니, 지금은 매사가 귀찮은 듯, 한사코 양지녘에서 졸고있기 일쑤다. 곁에서 지켜본 분이가 측은지심에 접근해 보지만 아예 관심 밖이다.

재동이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문간에 앉아 집을 지킨다. 특히 내가 외출 때 면, 어지간한 일에는 외면인 채, 문밖에서 나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지난 재동이가 없어진 날이다.

상경했다가 늦게사 집에 왔다. 엔진 소리만으로 보이지도 않는 나를 벌써 알아보고는 달려와 반기곤 하는 재동이가 그날엔 보이질 않았다. 의아했지만 곧 나타나려니 생각하며 밥을 놓아두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보여야 할 재동이는 보이지 않고, 밥그릇이 그대로 있다.

곧 돌아오겠지 기다리는 재동이는 지금까지 종무소식이다.

날짜가 지나면서 초조한 마음에 반경을 차차 넓히면서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동네 반장댁도 같은날 비슷하게 개가 없어졌다는 불길한 말만 들었을 뿐이다. 전혀 없었던 동네의 불상사로 걱정거리만 남긴 채, 아무런 진척도 대책도 없이 지금까지 도무지 속수무책이다. 인제는 재동이의 모습이라도 지워지기를 바라지만, 그 놈이 없는 우리집의 빈자리는 너무 크고 생생하다. 건우는 물론 분이, 살살이도, 모두가 풀이 죽어 집안 분위기가 무겁다.

업친데 겹친 격이었다. 재동이가 없어진 이틀 뒷 날이었다. 그날도 재동이를 기대하면서 문밖엘 나섰다. 목격된 참상! 집안이 온통 며칠 전에 사온 병아리들이 죽어 처참한 모습들이다.

병아리를 가둬 둔 비닐하우스를 살폈다. 뽑힌 깃털들로 어지럽힌 채, 찢겨진 하우스에는 병아리가 한 마리도 눈에 뜨이질 않는다. 오천원씩이나 주면서 사온 병아리 스무 마리가 모두 물려 죽어 집안 이곳 저곳에 어지러이 널려 있다. 이것은 건우놈의 짓이 분명하다.

널린 병아리를 주어 모았다. 반쯤 먹다만 것까지 합쳐 열세 마리이다. 행여 나머지는 재빨리 도망쳐 살아있을까 싶어 샅샅이 찾았지만 전혀 흔적도 없다. 나머지는 먹어 치웠나보다. 아무리 작은 병아리지만 일곱 마리를 흔적도 없이 먹어치웠다는 게 좀 너무하다 싶지만 그려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날 호두나무를 옮겨 심으면서 파묻어 감춘 병아리 한 마리를 찾았다. 아랫 밭에 이랑을 내면서 또 묻혀진 병아리 두 마리를 더 찾았다. 이것도 감춰두고 먹겠다는 속셈의 건우놈 짓이다.

삭풍과 엄동의 계절을 거치면서도 저마다 살아있음을 보이는 꽃과 싹이 펼치는 계절이다. 상큼한 새싹의 초록이 눈부신 이 좋은 계절이면, 햇살과 공기, 바람결, 물빛 산빛이 모두가 투명한 산촌에 아지랑이가 아른거린다. 침묵의 대지에 갈무리로 기다렸던 씨앗들도 세상살이가 그리워지나 보다. 어서 새싹이 되고자 저마다 독촉으로 농삿꾼은 일손이 바쁘다. 그런데도 농사일지랍시고 잃어버린 개 이야기를 쓰고있는 내가 한심하다.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어제 밤도 씨앗을 뿌려둔 밭에 황소처럼 큰 발자국이 패여있음을 보면서 영특한 재롱이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개도둑님 돈을 줄께 재동이를 돌려주오, 재동아 제발 무사히 돌아 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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