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성공회대학교 민주주의 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고병권입니다. 저는 현재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를 연구하는 전문 연구자로서, 또 이번 사건의 피고인인 박정수와 최지영을 십년 가까이 알아온 사람으로서 두 사람에 대한 선처를 재판장님께 부탁하기 위해 이 탄원서를 제출합니다.
재판장님, 저는 지난 공판에서 검찰이 이 사람들에게 각각 징역 10개월과 8개월을 구형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나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하나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제가 알고 있기에 검찰이 이들에게 그런 형벌을 요구했다는 걸 인간적으로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전문 연구자로서, 그리고 한국 사회가 어느 정도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믿었던 연구자로서 제가 가진 믿음을 검찰이 크게 흔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재판장님도 아시듯, 그것은 ‘법을 무시하며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한 사회가 법을 통해서 보호하고 구현하려는 가치, 즉 사람들의 안전과 자유, 복리 같은 것을 법을 의식하지 않고도 구현하는 사람이란 뜻일 겁니다.
아마 지난 공판에서 재판장님도 보셨을 겁니다. 경사가 심한 놀이터 담장 아래 피고인 박정수씨가 아이들과 함께 설치해놓은 작품들 말입니다. 만약 아이들이 거기서 놀다가 사고라도 났다면 검찰은 안전규정을 무시하고 울타리를 설치한 업자나 안전 관리에 소홀한 운영자를 처벌했을 겁니다. 물론 그런 처벌이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일정하게 높인다는 걸 저도 압니다.
하지만 박정수씨는 거기 놀던 아이들을 끌어들여 놀이를 하듯 사고를 예방하는 작품들을 만들었습니다.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아이들과 위험을 막는 작품을 함께 만들다니, 얼마나 놀라운 발상입니까. 저는 정말 감탄했습니다. 그가 이런 안전조치를 취한 것은 법을 집행하는 사람도, 공원을 관리하는 관리자여서도 아닙니다. 그저 아이를 키우는 어른으로서, 아이들이 그 울타리를 넘나드는 걸 본 사람으로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런 생각을 한 겁니다. ‘뭐 하러 귀찮은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사람 사는 법이 그게 아니’라고 답할 겁니다.
저는 바로 이런 사람이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이 궁극적으로 보호하고 촉진하려고 하는 안전하고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이 그런 것일 테니까요. 제가 지난 십여 년을 지켜본 한에서, 맹세코 박정수씨와 최지영씨는 검찰이 구형한 그런 처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아울러 저는 민주주의를 연구하는 연구자로서도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아마 제가 아니어도 여러 학자들이 비슷한 의견을 법정에 제출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긴 이야기를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다만 이들이 ‘G20 행사’를 선전하기 위해 만든 ‘정부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린 것이 우리 사회 민주주의를 훼손했다고 보지 않으며, 이 행위에 징역을 구형한 검찰이야말로 민주주의를 크게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재판장님! 이들이 훼손했다고 하는 정부 포스터는 공적인 것이 맞지만, 이때 ‘공공’이라는 말은 법률적 규정을 넘어 매우 중요한 정치적, 역사적 맥락을 가진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재판장님께서는 물론 법률을 토대로 판결을 하시는 분이지만 또한 그 법률을 해석함에 있어 여러 가지를 참작하셔야 하고 또 그러시리라 믿기에, 연구자로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공공(the public)’이라는 말이 근대 사회에서 처음 생겨났을 때 그것은 ‘공중’, 다시 말해서 정부가 내놓은 말을 듣는 ‘청중’을 뜻했습니다. 근대 정부가 내놓은 정책이 ‘공공’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은 그것을 비밀리에 사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공중’에게 내놓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공중’에게 내놓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각오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지지하겠지만 누군가는 반대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욕설을 퍼부을 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민주주의 정부를 이끄는 사람들이 그런 불편을 감수하는 이유는, 바로 그 다양한 목소리가 사회를 혁신적이면서도 튼튼하게 만들어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근대 민주주의란 이 믿음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재판장님, 그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간혹 나라를 이끄는 이들 중에는 마치 가내 식솔들에게 명하듯이 시민들을 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일러 ‘전제군주(despot)’라 한다고. 여기서 오늘날 ‘전제정치(despotism)’이라는 말이 유래했습니다. 재판장님, 정부를 이끄는 사람들이 공적 행위자라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큰 권력을 잡아서가 아니라(만약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전제군주도 공적인 존재일 겁니다), 그들이 공적으로 행동해야만 하는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일 겁니다.
‘G20 행사’를 선전하는 정부의 포스터는 시민들에게 무조건 내 말을 따르라는 가부장의 말이 아닙니다. 만약 그 포스터가 정부의 명령이었다면 그것은 제아무리 정부가 내다 건 것이라 해도 공적인 성격을 갖지 못합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부의 모든 행동은 시민들에게 의견을 구하고, 설득하고, 동의와 참여를 이끌어내는 한에서 공적인 것입니다.
재판장님도 ‘G20 행사’와 관련해서 우리 사회에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이들이 ‘경제효과가 수십조에서 수백조’에 이른다는 정부의 선전, 그리고 과거 권위주의 정부시절에나 볼 수 있었던 시민동원 방식을 보면서 큰 거북함을 느꼈습니다. 그런 거북함을 폭력이 아닌 유머와 위트로서, 그래피티라고 하는 예술 작업으로서 표현한 박정수를 보며, 저는 아이들과 놀이터에 만든 작품을 볼 때 그런 것처럼, 얼마나 감탄했는지 모릅니다. 물론 ‘G20 행사’를 지지하고 찬성하는 시민들 입장에서는 그의 작업이 거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바로 이런 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거북하더라도 다양한 견해들이 폭력 없이 공존하는 법을 찾는 것 말입니다. 반대 목소리가 상당함에도 그것이 표현되지 않고 애당초 없던 것으로 치부된다면, 그 사회는 결코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박정수의 작업이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음에 대한 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5월에 있을 재판장님의 선고에서 다시 한 번 그것이 입증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민주주의에 대한 연구자로서, 아니 그보다 우리 사회가 이룬 민주주의에 대한 성취에 큰 믿음을 갖고 있는 시민으로서 감히 부탁드리건대, 부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입증하는 판결의 주인공이 되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