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서태지, 신비주의, 이미지올로기

- 은유

서태지를 좋아한지 19년이 되었습니다. 1992년 데뷔 때부터 2011년까지. 인생의 꽃시절을 그와 함께 한 셈이죠. 올드팬으로서 서태지-이지아 사건의 충격이 남다릅니다. 물론 서태지는 나의 반려뮤지션이기 전에 마흔 살 남성입니다. 숨겨둔 처자식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종종 했습니다만 덜컥하니 이혼소식부터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압권은 배우자입니다. ‘어느’ 소녀팬에서 서태지의 ‘어린신부’로 등업되었다가 연예계 전격 데뷔해 배용준과 스캔들을 내고 정우성 연인으로 살아가던 그녀는 50억 ‘소송왕’으로 커밍아웃을 합니다. “나는 서태지의 전 부인이다”

이정도 뉴스면 가히 ‘쓰나미’급이지요. 자연재해의 본질이 예상을 빗나가는 데 있음을 이번 일을 겪으며 피부로 느꼈습니다. 암튼 열흘간 제 핸드폰은 ‘24시간 재난대책본부’처럼 밤이고 낮이고 울려댔습니다.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위로 및 상담, 실시간 뉴스 속보가 답지했습니다. 지난 토요일에는 글쓰기의 최전선 수업이 끝나고 보니 문자가 7통 와있더라고요. ‘서태지가 입장 발표했네’ ‘이지아가 소송을 취하했다’

서태지 입장발표문에서 ‘자연인 정현철(본명)로 살고 싶었다’는 표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가 무모한 꿈을 꾸었더군요. 자연인 정현철과 음악인 서태지의 부단한 ‘분할 시도’가 오히려 그의 평범한 삶을 앗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냥 살면 될 일이지, 굳이 정현철의 삶을 고집함으로써 매번 서태지의 삶을 탄생시킨 꼴입니다. 그는 무대 밖에서도 서태지로 살려고 기를 썼습니다. 은퇴 이후 미국에 살면서도 가까운 친구에게 결혼을 숨겼고 아내의 이름을 두세 번 바꿔가면서까지 존재세탁을 감행했으니까요.

저는 팬으로서 서태지의 사생활을 존중해주고 싶었으나, 그가 사생활을 만들지 않음으로써 애초에 배려의 기회조차 박탈했습니다. 그것이 슬프더군요. 누구보다 그를 믿고 지지해주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팬들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서태지는 말합니다. 결혼 사실을 터놓을 기회가 없었고 이미 남이 된 상대방에게 누가 될까봐 모든 것을 숨겼다고요. 정히 그렇다면 묵언수행 할 일이지 툭하면 팬들에게 ‘마누라’ 운운하는 자극적인 발언은 왜 일삼았는지 민망할 따름입니다. 교주본능일까요. 어쨌거나 서태지의 야무진 꿈, 두번째는 인생이라는 책에서 한 페이지만 찢어내려 했다는 점입니다.

벤야민이 근대역사철학을 비판한 대목처럼 그는 ‘서태지 역사’를 하나의 잘 짜인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 어떤 순간들은 ‘과장’ 했고 어떤 순간들은 ‘은폐’했으며 어떤 순간들은 ‘왜곡’했습니다. 그렇다고 일련의 일들이 그가 희대의 사기꾼이라서 그 혼자 장편 시나리오를 쓰고 관객을 동원하고 매스컴을 차단, 활용해서 온 국민을 감쪽같이 속였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것도 십 수 년이 넘도록 말이죠. 자본-언론이 합세하여 ‘환상 속의 그대’의 실존인물 ‘서태지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 혐의 또한 지울 수 없습니다.

급변하는 환경에서 날마다 새 상품을 만들어 내야하는 기업의 슬로건 ‘열정, 도전, 창조, 혁신’은 서태지의 음악 정신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생활도 없고 음악(일) 밖에 모르는 뮤지션의 꿈과 성취. 친근하면서도 신비스러운 존재. 아름답게 가공된 서태지 신화는 자본의 재생산 이데올로기로 적극 활용됐습니다. 1997년 삼성경제연구소가 「서태지와 아이들」과 기업경영이라는 보고서를 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보고서에서는 상식을 파괴하는 역발상, 톡톡 튀는 창조성 등 서태지 1명의 천재성을 주목하며 기업도 정상에 올랐을 때 과감히 변신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합니다. 언론매체 역시 밥보다 자유를 갈망하는 그를 미행하고 정보를 흘리면서 더 숨어들게 하는 방식으로 서태지의 상품성을 높이며 ‘판돈’을 키웠습니다. BBK 공판과 재보선을 앞둔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서태지 이혼-결혼이라는 대형 지뢰가 터졌고요.

서태지의 봉인된 과거가 풀렸습니다. 서태지-이미지-이데올로기로 점철된 신비주의의 찬란한 파산을 목도합니다. 두 사람의 어긋난 진실. 아름답지 만은 않은 그 모습에서 ‘결혼은 삶의 오물통과 마주하는 일이다’라는 율리히백의 말을 떠올립니다. 전직 문화대통령과 영부인도 예외는 아니더군요. 부부의 인연이란 얼마나 모진가요. 상처를 주거니 받거니. 서로가 은폐된 진실을 일깨웁니다. 과거는 죽은 시간이 아니지요. 언제나 되살아납니다. 그러니 이참에 억압된 과거를 해방시켜서 두 사람이 다른 현재,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열어가면 좋겠습니다. 이지아도 그림자 인간에서 벗어나 본연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서태지도 대중과 섞여 사는 음악하는 ‘생활인의 자세’로 돌아왔으면 합니다.

나의 친구 태지에게 앞으로는 추악한 권력비리을 잠재우는 사생활 신비주의가 아닌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락음악 본령의 신비주의를 보여달라고 말하고싶네요. 서태지와 정현철의 분리 불가능한 인격을 통째로 사랑했던 팬으로서 내년 데뷔 20주년에는 ‘저항 돋는’ 음악을 기대해봅니다.

제 64호 위클리 수유너머는 ‘j의 이미지올로기’입니다. 유정아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이 탄탄한 정보와 재미난 해설을 곁들여 이미지가 어떻게 우리의 삶과 관계 맺는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번에는 독일다다이스트 하트필드 편입니다. 전후 독일이라는 특수하고 민감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고 이를 실천으로 옮길 줄 아는 젊은 예술가의 작품을 감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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