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9/11의 추억-‘미국’은 없다

- Beilang(동아시아사상사연구자, 뉴욕이타카)

개인적으로 9/11과는 얽힌 기억이 적지 않다. 대만에서 친구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방문했을 때 그들과 같이 쌍둥이 건물에 오르기도 했고, 사건이 발발했을 당시에는 뉴욕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살며 근처 대학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십년 전 일이라고 개인적 기억이 좀 있다고 해서 그것을 ‘추억한다’는 것은 이 비극을 섣부른 낭만화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겠다. 더욱이 9/11은 어떤 점에서 여전히 진행 중이니 말이다. 9/11의 상징적 시설인 관타나모 수용소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언한다. 수용소의 폐쇄를 약속했고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던 오바마가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관타나모는 건재하고, 9/11은 끝나지 않았다.

사실 9/11이 갖는 중요성은 사건 자체 보다는 그것에 대응하는 미국의 반응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우리는 이제 미국이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는 것, 미국은 ‘9/11’을 우리가 아는 그 ‘9/11’로 만든 장본인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시작부터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오도된 부시 행정부의 국내외 정책은 온갖 법적, 윤리적 제한을 뛰어넘는 것들이었고 이로 인해 국내외에서 지속적으로 비난을 받아왔다. 최근 <위키리크스>와 <뉴욕 타임즈>가 새로 공개한 서류들을 보면 미국이 자기 안전을 도모한다는 미명 하에 14살 소년부터 치매를 앓고 있는 89세의 노인까지 마구 잡아들였음을 보여주고 있고, 9/11과 관련해서 우리가 모르는 사실들이 너무도 많다.

아감벤은 9/11에 촉발되어 법질서가 ‘예외 상태’ (state of exception)에서 어떻게 쉽사리 무력화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이 무력화가 실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근대 권력과 사법제도에 내재한 속성이라는 주장을 한 책을 쓴 바 있다. 이 예외 상태와 그것이 준 무력감을 현장 비교적 가까이서 경험했고 그 무력감과 싸워온 사람의 하나로서 그것이 드리운 그림자를 추억해 보려한다.

최초의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충격이후 맨 처음 떠오르는 기억은 잔해 더미 속에서 사람들을 구하던 구조대원 들이 외쳐대던 ‘USA! USA!’라는 구호다. 라디오를 통해 들려온 그 소리는 인명구조라는 인도주의적 행위과 국수주의적(혹은 애국주의적) 외피의 결합은 기묘한 불협화음으로 내 신경을 건드렸다. “God bless America”가 여기저기서 불리어지고 곳곳에 성조기가 나부끼기 시작했다. 위축되지 말고 나가서 계속 쇼핑하라는 뜬금없는 부쉬의 연설과, 아프가니스탄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적들을 말살해야 한다는 어느 상원의원의 황당한 의회발언은 미국 리더쉽의 천박함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고매하신 하바드 대학의 헌팅턴 교수는 ‘문명의 충돌’이라는 고장난 축음기를 때 맞춰 또 틀어 댔고 한때 미제국주의를 비판해온 소위 좌파 지식인 중에는 갑자기 돌변하여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처럼 더러운 아랍인들을 쓸어 버려야 한다고 외쳐대는 이도 있었다.

처음으로 미국인들이 정부를 비판하며 두려운 눈초리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을 목격하며 또 내 입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전개에 대한 거친 언사에 놀란 지인들한테서 “특히 너 같은 외국인은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충고를 들으며 한국의 70년, 80년대 독재정권의 그림자가 갑자기 시공을 건너 뛰어 나를 다시 뒤덮는 듯한 암울한 경험을 했다.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증에 시시각각 시달리며 몇날 몇일을 허덕이다 뜻을 같이 하는 몇몇
친구들과 반전 모임을 만들어 공개 강연회와 야외 행사 등을 시작했다. 솔직히 우리의 활동이 무엇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없었다. 고백컨대 그 당시 내 실질적 희망의 최대치는 아프간 공습을 연기시켜 민간인 피해를 조금이나마 줄이는 것이었고 후에 이라크 침공이 가시화 됐을 때 그것을 막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림 1. 9/11 희생자들을 ‘작은 아이히만들’이라 불러 격렬한 반발과 논쟁을 불러 왔던 콜로라도 대학의 인디안계 교수 워드 처칠 (Ward Churchill). 결국 이 일로 교수직에서 해고 되었고 관련 소송이 아직껏 진행 중이다.

우리의 야외 집회가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에 의해 여러 번 방해를 받았고 누군가 차를 몰고 위협적으로 돌진해온 적도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어느 아랍계 사람이 차를 몰고 가다 갑자기 등장한 일군의 청년들에 의해 차에서 끌어내려져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 그리고 미국이 9/11에 과잉반응을 하고 있으며 좀 더 차분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요지의 글을 쓴 어느 지방신문 기자가 독자들의 항의와 협박에 해고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대도시의 도심에 사는 어느 흑인은 백인들에겐 9/11이 엄청난 충격인지 모르지만 자신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매일 그에 준하는 위험에 노출되어 살고 있기에 새삼 새로울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테러리스트들이 설마 못사는 자신들을 타겟으로 삼겠냐는 위안의 말과 어쩌면 이번 일로 자신들이 얼마나 험한 삶을 살고 있는 지를 중산층 백인들이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의 피력과 함께. 이라크 침공 후 외국인-주로 겉으로 드러나는 아시아계-들이 운영하는 거의 모든 상점들의 입구에는 성조기와 함께 미군을 지지한다는 (We support our troops.) 충성의 서약이 내걸려 있었다.

일련의 폭력적 사태는 거의 전적으로 젊은 백인 남자들의 소행으로 직감적으로 이런 공격적 남성성의 표출이 엄청난 피를 흘리게 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9/11이 쌍둥이 빌딩으로 상징되던 미국 남성성의 상징적 거세라는 그럴듯한 분석도 뒤따랐다. 여기에 심지어 일부 페미니스트들마저 ‘아프간 여성의 해방’이라는 명분만으로도 충분하다며 침공을 정당화하는 흐름에 합류했다. 소수자 운동마저 제국의 광기에 봉사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여성에게 힘을’ (Empowering Women)이라는 여성운동의 구호는 아마도 이라크 침공 뒤 아부 그레이브(Abu Ghraib) 감옥에서 아랍 남성들을 개줄에 묶어 끌고 다니고 성추행을 해댄 미국 여군들에게서 궁극적으로 그리고 가장 추악한 모습으로 완성되었는지도 모른다. (구체적 내용은 여기! 참조. 단 미성년자, 임산부, 노약자 관람 불가. )

그림 2 관타나모 수용자들의 모습.

출처:www.guardian.co.uk/world/interactive/2011/apr/25/guantanamo-files-guantanamo-bay

죄수들을 발가벗겨 묶고 매달아 짓밟고 때리고 때론 죽이기까지 하며 희희낙락 기념사진과 비디오를 찍어댄 미군들은 이근안 같은 고문 전문가도 아니고, 광주학살에 투입되었던 폭력에 길들여진 특수부대원도 아닌 대부분 이라크 침략 직전까지 민간인이었던 예비군 내지 주방위군이라는 사실. 폭로 사진에 등장하는 몇몇 하위 군인이 기소된 것 외에는 어떤 처벌도 없었고, 수백 장의 사진과 비디오에 드러난 적나라한 잔혹 행위의 증거조차도 사람들에게서 별다른 분노를 일으키지 못했다는 사실. 재소자 심문과정에서 고문에 깊이 관여한 심리학자들과 의사들 가운데 어느 누구 하나 처벌은커녕 면허취소조차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물고문은 고문이 아니라고 뻔뻔히 강변하는 전쟁범죄자 부쉬와 그 하수인들이 짱돌은커녕 날계란 하나 맞지 않고-부쉬는 이라크에서 구두에 맞을 뻔 하기는 했다-멀쩡히 잘 살고 있다는 사실.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런 사실들은 9/11이 여전히 진행형이며 미국이 무엇인지를 아프게 증언한다.

사건 당시 건물에는 외국인들은 물론 적지 않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이들은 보상문제를 둘러싼 논란의 대상으로 언론에 잠깐 등장했을 뿐, 절대다수의 미국인은 아직도 그들의 희생조차 인지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애초에 추모에서조차 배제된 이들은 아마도 추모될 수 없는 죽음의 대량생산이라는 이후의 비극적 진행을 예시하는 것이었으리라. 전쟁 수행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는 사물화된 이름으로!

이 모든 비극적 사태가 단순히 ‘예외’ 상태에서 일어난 ‘예외적’ 일로 치부될 수 있을까? 그걸 다시 ‘정상’ 상태로 돌려놓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그 정상성은 어디서 구해 질 수 있는 것인가? 혹시 그 정상성의 관념 자체가 우리가 오래 꾸어온 허망한 근대의 꿈에 뿌리 밖은 오도된 믿음은 아닐까?
미국은 없다. 민주주의 국가 미국, 선진국 미국, 그렇게 한국인들이 오매불망 사모해 마지않는 미국, 근대 한국의 이상이자 우상인 미국은 어디에도 없다.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미완의 근대’, ‘근대의 완성’을 외치며 근대와 근대 국가를 이상(향)의 구체적 전범으로 꿈꾸어 보려 해도 근대란 결국 폭력과 탐욕에 찌든 피비린내 나는 인간사의 한 장일 뿐이며 그 궁극적 공동체인 국가란 이 폭력과 탐욕의 현현 내지는 그 실현의 장이라는 사실을 9/11은 내게 깨우쳐 주었다. 이 깨달음이 내가 이 현재 진행형 비극을 ‘추억’한다 할 수 있는 연유이다.

덧붙여.

윗글을 보내고 나서 오사마 벤 라덴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대다수 미국인들에게는 사악함의 상징이었던 그의 죽음이 자신들의 정당성과 정의의 승리를 입증하는 축제의 순간일지 모르나, 사악함을 조작해 자신들의 반대편에 세워놓고 투쟁하고 섬멸하며 자축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그 끝없는 강박에서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은 미국은 자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그 성찰을 기반으로 자신을 새롭게 규정하고 다시 만들어 나아가는 생명의 기본적 성숙 메카니즘이 결여되어 있는 근대가 낳은 초우량아 국가라는 사실 뿐이다. 9/11 직후 한 미국인 친구의 담담한 예상처럼 미국보다는 벤 라덴이 ‘역사의 승자’로 남을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잊혀지고 조문되지 못한 죽음들에 삼가 조의를 표한다.

응답 2개

  1. Beilang말하길

    댓글 다신 걸 오래 보지 못했네요. 열 받아 쓴 글이라 좀 횡설수설 했고, 의도적으로 미국을 폄하한 글이라 언제 미국에 대해 좀 차분한 글을 써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 봄비말하길

    최근에 빈 라덴 사살사망소식을 듣고 법이란 것은 애시당초 부르기 나름이구나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글을 읽으며 우리들은 미국의 무엇이 부럽다고 말하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