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진보국정플랜이 먼저다-유럽에서 본 4.27 재보선

- 맹찬형(연합뉴스 제네바 특파원)

4.27 재보선의 관심 지역 가운데 하나였던 김해을 선거에서 한나라당 김태호 후보가 승리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반면, 민주당과의 지루한 샅바싸움 끝에 단일후보로 나선 국민참여당 이봉수 후보가 참패하면서 야권 대선주자로 꼽히던 유시민씨도 함께 침몰했다. 유시민씨가 단일화 과정에서 보여준 행동을 지적하고 향후 진로에 이런저런 훈수를 두는 글들은 넘쳐나고 있으니 여기서 더 말을 보태지 않으려 한다. 내가 주목한 것은 김해을 선거에서 야권 단일후보가 패배한 원인에 대한 분석 중에서 `단일화 과정이 감동을 주지 못했다’는 내용이 여러 매체에 반복적으로 등장한 다는 점이다.

민주당과 국참당이 단일화 방식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는 모양새가 유권자에게 식상함을 던져줬다는 분석은 분명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고민을 차단하는 얘기이기도 하다. 혹여 이런 식의 분석과 평가에 기반해서 야권 선거전략가들이 `더 감동적인 단일화 방식’을 설계하는 쪽으로 솔루션을 찾으려 할까봐 걱정이다. 정말로 지적돼야 할 것은 야권이 2002년 대선 이후 후보 단일화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4.27 재보선 선거운동이 한참일 때 페이스북에 기계적이고 상투적인 단일화의 미몽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취지의 짧은 글을 올렸더니 야당에서 활동하는 한 후배가 한국 정치의 현실에서 단일화는 불가피하지 않느냐는 반박성 답글을 올렸다. 그 후배의 답글에 대한 답변은 김해을 재보선 결과가 대신해줬다고 생각한다.

1999년부터 2008년까지 정치부 기자로 일한 덕에 나는 21세기 들어 한국정치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인 2002년 대선의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 과정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볼 기회를 가졌다.후보 단일화에 합의하기까지 양 진영의 길고도 팽팽했던 신경전과 주요 관계자들의 심리상태의 변화를 옆에서 봤고, 그해 11월24일 자정 강남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에서 단일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는 현장에서 취재했다. 또 정몽준 측이 대선 전날 밤 단일화를 파기했을 때 민주당사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사람들의 복잡미묘한 표정들도 관찰했다. 그렇게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한 후 `감동의 드라마’에 중독된 야권은 주요 선거에서 기회만 되면 단일화 카드를 들고 나왔다. 몇 번은 성공했고, 또 몇 번은 그렇지 못했다.

단일화는 유권자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압박하는 선거전술이다.상당한 심리적 스트레스를 부과하는 일이므로 반복적으로 이런 전술을 구사하는 것은 유권자에게 피로감을 준다. 더 큰 문제는 단일화를 선거의 주요 전술로 활용하게 되면 정책과 공약이 전면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는 점이다. 마치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유권자를 단일화라는 프레임에 가두는 것은 주권자를 올바르게 대접하는 방식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같은 맥락에서 최근 서점가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책 `진보집권플랜’에 대해서도 거론하고자 한다.이 책은 김대중과 노무현 집권 시기에 대한 반성과 함께 진보세력이 집권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내용에 대해 시비를 걸고 싶은 생각은 없다.다만, 진보집권플랜보다는 `진보국정플랜’이 먼저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너무 한가한 얘기일까?

집권은 탁월한 개인이 하는 게 아니라 세력이 하는 것이고, 유권자는 그 세력이 가진 국정운영 방향과 비전에 표를 던진다.겉보기엔 선거 과정의 여러 사건과 격정에 판세가 흔들리고 승패가 갈리는 것 같지만, 결국은 더 구체적이고 믿음직한 청사진을 가진 쪽이 이긴다. 21세기 정치에서 정책은 시민 네트워크와 소통이 만들어낸다. 특정 정당의 정책연구소나 뛰어난 정책 능력을 가진 몇몇 사람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퇴임할 때까지 놀라운 지지율을 유지한 브라질의 룰라 전 대통령은 빈곤 퇴치 프로그램인 포메제로, 빈곤층에 대한 교육과 생계 지원을 연계시킨 볼사 파밀리아 등 사회정책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룰라의 힘은 각종 시민단체의 진보적인 주장과 제안들을 수용해 거친 표면을 다듬고, 반대편에 서있는 기득권층과도 조율함으로써 정책화해내는 틀을 만든 데서 나왔다. 이 틀이 바로 룰라가 추진한 개혁의 무기고가 됐다. 이를 통해 룰라 전 대통령은 여성인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을 통해 정권을 재창출했을 뿐만 아니라 2014년과 2018년 대선에서도 집권 노동자당(PT)이 승리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4.27 재보선과 `진보집권플랜’이 인기를 끄는 현상을 바라보면서 집권 조급증을 버리고 뭘 할 것인지부터 먼저 정리해야 한다는 잔소리를 하고 싶어졌다.물론 이 잔소리는 야권 뿐만 아니라 유력한 대선주자를 확보하고 있다는 이유로 자칫 정책개발에 나태해지기 쉬운 집권여당 한나라당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진보든 보수든 집권을 위해 정책 개발에 매진하면 이득을 보는 건은 우리 국민이다.세종대왕 재위 기간 조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던 집현전에는 성삼문이나 신숙주 같은 학자도 있었지만,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6가지 이유를 개발해내기 위해 집요하게 연구했던 최만리도 있었다.

응답 2개

  1. cman말하길

    좋은 말씀입니다. 제 걱정은 집권을 위한 소프트웨어보다 하드웨어 빌리러 다니느라 대부분 시간을 허비할 것 같습니다. 지금 어느 곳에선가 훌륭한 정책을 만들고 있다면 부끄러워마시고 발표해 주기 바랍니다. 이 글쓰신 분 말고 야당관계자들 말입니다!

    • 맹찬형말하길

      머리 좋은 분들이 정치공학적 사고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습니다. 룰라가 national council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잘 보면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