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한 포기 풀이 자라나는 소리도 들을 줄 아는 사람

- 김대경

내가 몸담고 있는 권장도서목록연구모임에서 청소년을 위한 좋은 책을 고르는 일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학교도서관이나 지역도서관에 가면 청소년 관련 도서가 꽂혀 있는 서가 앞을 서성거리는 일이 잦다. 최근에 독서이력제니 입학사정관제니 하면서 청소년 독서에 대한 관심(하긴 독서가 중요하다고 소리 높이지 않은 시대는 없었건만 갈수록 독서 흥미도나 독서량이 줄어드는 건 왜일까?)이 무척 높아진 탓일까. 청소년이 읽을 만한 책들이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골라 읽고 싶은 책을 찾기란 여간 어렵지가 않다. 교과 공부와 관련한 지식을 단편적으로 짜깁기한 책들이 많고, 위인의 일대기를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거나, 오늘날 세계를 주름잡는 유명인의 성공담을 늘어놓은 책들이 부지기수다. 책을 고르는 일을 십여 년 해 오면서, 같은 내용을 다루더라도 좀더 독자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유도하고, 보다 깊이 있는 독서를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책들이 여전히 아쉬운 이유는 무엇일까? 왜 수많은 책들이 나오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목마를까? 그것은 출판사나 필자가 그 책에 쏟아 붓는 애정과 삶에 대한 진정성이 부족해서 오는 것은 아닌가 하고 조심스럽게 질문해 본다. 최근에 갑작스레 이슈로 등장한 사건이 있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 주제를 다룬 책들이 출간된다. 책도 유행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인지, 유통기한이 못 먹게 되는 우유처럼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고 나면 창고에 쌓여 먼지만 맞을 운명에 놓이는 책들이 무척 많은 것 같다. 그것은 종이의 재료로 쓰이는 나무에도 미안한 일이고, 여러모로 그와 관련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독자들에게도 못할 짓일 터이다. 그렇기에 오랜 시간의 묵은 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받는 고전이 더욱 빛을 발하는가 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책을 오랫동안 읽었던 사람들일수록 고전의 매력에 빠졌다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에, 권정생 선생님의 <우리들의 하느님>이라는 책을 만났다. 나는 이 작가의 이름 뒤에는 꼭 선생님이라는 칭호를 붙여 부르고 싶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선생님으로 남아 있고,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 한 오랫동안 그는 선생님으로 남을 것 같기 때문이다. 좋은 책이라 일컫기에 마땅한 책, 세상에서 사라지는 나무에게 전혀 미안하지 않은 책이라고 말한다면 권정생 선생님은 화를 내실까? <강아지똥>, <몽실언니>의 작가로만 알고 있었던 나에게 이 책과의 만남은 살아생전 그 분을 한번도 못 뵌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회한을 남겼다. 어린이들을 위한 좋은 책을 쓴 동화작가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보면서 그는 가난과 소외 속에 살면서도 세상에 대해, 인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남기신 분이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 책에 대해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 대목을 만날지도 모르겠다. 왜냐 하면 이 책은 작가와 비슷한 고민거리를 안고 있는 이들에게만 그 진정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정말 적절한 시기에 그의 책을 만난 셈이다. 요즘 들어 내가 주로 생각하고 있는 문제인 종교와 삶의 문제, 교육과 가난의 문제에 대해 권정생 선생님은 깊이 있는 대답을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혼자서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마치 그와 옆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크게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부분을 짚어가면서 글을 쓰려고 한다. 종교와 삶의 문제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자면, 나는 몇 년 전부터 특정 종교인들과 매주 성경책을 함께 읽어오고 있다. 나는 정식으로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진 않지만, 이 세상에 일어난 많은 문제들이 인간만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는, 고통과 번민의 연속이기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인간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가 무척 궁금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종교인들의 삶은 예수가 말하는 삶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고, 길을 걷다가 특정 종교인이나 교회 및 사찰을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독실한 기독교인인 권정생 선생님은 몇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가난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 가난한 자 곁에서 함께 가난해지는 것뿐이다. 예수님이 만약 화려한 옷을 입고 고급주택에 살며 고급승용차에 경호원을 데리고 나타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몇백만원씩 나눠주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가 능수능란한 부흥사도 아니고 자선가도 아니고 혁명가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라 가장 소박한 한 인간으로 우리 곁에서 33년 동안 고락을 함께 해준 삶 때문인 것이다. (41쪽)

만약 예수가 이 세상에서 참되게 살지 못하고 참되게 죽지 못했다면, 그의 동정녀 탄생이나 죽은 뒤 사흘 만에 부활한 것도 지금 하느님 오른편에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는 것도, 모두가 값어치 없는 일이다. 예수는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이 세상에서 살았다. 언제 어디서 살았든 간에 다만 살았다는 것, 그가 짧은 일생을 사람답게 살았다는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예수가 필요한 것이다. (48쪽)

교육과 가난의 문제에 대해서도 권정생 선생님은 내게 교사로서 학부모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었다. 얼마 전 친구와 가방 가게에 들렀다가 무심결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들 녀석 학교 담임 선생님과 상담을 하러 가게 되었는데(생각해 보니 교사가 아니라 학부모의 입장에서 담임 선생님을 개별적으로 만나 면담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땅히 들고 갈 가방이 없어서 그냥 작은 천가방을 들고 갔었다는 얘기를 했다. 그 말을 들은 가게 주인이 학교에 담임을 만나러 갈 때 가지고 가는 가방이 따로 있다며 몇 개의 가방을 꺼내 보여 주었는데, 수십 만원을 호가하는 가격을 듣고 깜짝 놀랐다. 깜짝 놀라는 나를 보고, 내 친구가 놀랐고, 진짜 명품 가방은 백만 원이 넘는다며, 교사들이 많이 사러 온다는 가게 주인의 말을 듣고 더더욱 깜짝 놀랐다. 그런 좋은(?) 가방을 들고 학교에 가려면 옷차림도 정장을 갖춰 입어야 한다는 말에 나는 손을 내두르고 말았다. 난 한번도 학부모가 면담을 하러 올 때 무슨 옷을 입었는지, 무슨 가방을 들었는지 주의깊게 본 기억이 없다. 내가 너무 상식 밖의 삶을 사는 것인가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차라리 그걸 살 돈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구해주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좀 나아졌다. 또 며칠 전에는 시험을 망쳤다며 울먹이는 아들 녀석과 밖에서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는데, “자녀의 중간고사 성적에 만족하십니까?”라는 문구를 보고, 마음이 흔들렸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해야겠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전부 전교 1등, 자사고나 특목고를 가야한다면, 그리고 모두들 똑같이 그런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통과 스트레스를 감내하며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 권정생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하느님께 감사하고, 대학입시에 수석 합격했다고 감사하고,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감사하고, 취직되었다고, 병 고쳤다고, 외국산 전기밥통을 선물로 받았다고 감사하고, 승진되었다고 감사하고, 시집 잘 갔다고 감사하고, 이런 감사는 모두가 이기적인 감사다. 내가 금메달을 따면 못 따는 사람이 있고, 내가 수석을 하면 꼴찌한 사람이 있고, 내가 당첨되면 떨어진 사람이 있고, 내가 잘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못되는 것을 생각하면 어찌 기뻐할 수 있겠는가. 그런 감사를 하느님은 절대 기뻐하지도 바라지도 않으신다. 왜 나만이 앞서야 되는지 좀 생각해보기 바란다. 나는 나중에 커서 훌륭한 의사가 되어 불쌍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겠다는 어린이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기특한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그것도 이기적인 욕심이란 생각이다. 그런 어린이는 자신들만 훌륭한 의사가 되고 다른 사람은 모두 불쌍한 환자가 되라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52쪽)

이렇게 세상이 뒤죽박죽이 되다 보니 이젠 착하게 살아서는 안되고 힘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절대가치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교육은 힘을 가르치고 힘만이 최상의 평가 기준이 되었습니다. 착하게 살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얻기 위해 공부하는 학생들은 선악의 분별을 모르는 힘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일등을 해야만 돈과 권력을 잡고 행복해진다는 논리는 이 사회 구석구석마다 스며들었습니다. …… 더불어 산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나만이 잘 살자는 이기심은 극을 치닫고 있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돌려줘야 하는 것이 바로 더불어 살아가는 평등의 원칙이며 그게 평화로 이어지는 자연의 질서입니다. 구태여 돈을 잔뜩 벌어 남을 구제한다는 마음보다 내가 좀더 가난하게 덜 차지하기만 해도 그게 바로 이웃을 위하는 일인 것입니다. …… 나는 교육은 가르치기보다 보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머리로만 가르치고 머리로만 배우는 교육은 돈받고 돈주고 맞바꾸는 물건이지 교육은 아닙니다. (79쪽)

마르크스는 “혁명가는 한 포기 풀이 자라나는 소리도 들을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권정생 선생님은 진정한 혁명가이다. 이 책의 말미에 실려 있는 이계삼 선생님의 글을 보면서, 그리고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밑줄 그은 부분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게 된다. 권정생 선생님을 곁에 모셨던 조영옥 선생님의 다음 말씀이 쟁쟁하다.

마지막 순간에 정호경 신부님께 쓰신 그 떨리는 글은 저희들로서도 충격이에요. 그래도 우리들은 선생님 곁에 살면서 조금은 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도 어쩔 수 없이 남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까지 제 삶에서 부끄러움이란 광주사태였거든요. 바로 얼마 떨어진 곳에서 그렇게 사람이 죽었는데 나는 희희낙락 즐기고 있었다는 게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어요. 그래서 한동안은 광주 사람만 보면 죄스럽고, 전라도 사람 앞에만 가면 기가 죽고, 그랬는데… 이번에 선생님 마지막 남긴 글 보면서도 우리가 그동안 곶감 빼먹듯이 선생님 만나 위로받고 우리한테 득 될 말씀만 듣고, 우리 떠나보내고 선생님은 늘 혼자 아프시고, 그래서 초상집에서 며칠간 일하면서도 그것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서, 얼마나 아프셨을까 생각하니, 자꾸 눈물이 나고, 하느님이 너무 가혹하단 생각도 들고… (304쪽)

권정생 선생님은 많은 이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선물과 가르침을 남기고 떠나셨다. 이제는 살아남은 우리들의 몫이 남았다. 나 역시 조영옥 선생님의 말씀처럼 내 마음에 위로가 되고 득이 되는 말만 곶감 빼 먹듯이 듣기만 하면서 살게 되지나 않을지, 새삼 두려워진다.

응답 2개

  1. 기룸말하길

    저도 갓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믿음보다 머리가 앞서느지라 만만치 않은 일이나, 소원이 있으니까요.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 cman말하길

    꼭 읽고 싶습니다. 정신이 번쩍 드는 말씀 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읽고 생각해 볼 것이 많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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