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고투가 번역되는 장, “인터내셔날”

- 윤여일(수유너머R)

1.

수유너머 위클리의 편집진은 매주 금요일 아침 10시 반에 모여 편집회의를 합니다. 그 풍경을 얼마 전 [편집자의 말]에서 고추장이 묘사해주셨죠. 편집진들은 한 자리에 모여 고정코너의 글들을 검토하고, ‘동시대 반시대’를 기획하고, 특집을 정합니다. 이후 3, 4회분의 기획을 잡고 필자들을 섭외합니다. 회의 분위기는 어수선합니다. 샛길로 빠지는 일도 잦아 회의는 너끈히 두 시간을 넘기곤 합니다.

가장 시간과 공을 들이는 것 중 하나는 카피를 정하는 일입니다. 매번 만만치 않습니다. 애초 기획한 취지와 수합된 글들의 내용을 종합해 카피를 뽑습니다. 너무 함축적이지 않게, 지나치게 설명조도 아니게, 핵심은 드러나지만 식상하지 않게 카피를 뽑으려다보면 온갖 말들의 만찬이 펼쳐집니다. 이것저것 꺼내놓고 갑론을박하다가 지칠 무렵 아슬아슬하게 하나가 남으면 건져냅니다. 물론 “이거 어때” “바로 그거네” 하며 금방 정해질 때도 있긴 합니다. 그런 때가 많으면 좋을 텐데요.

2.

이번호도 애를 먹었습니다. ‘프리타노조’와 ‘청년유니온’의 만남을 메인글로 정해 놓고, 그것을 어떤 카피로 포장해야 좋을지 머리를 맞대봤지만 좀처럼 그럴듯한 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떤 것은 장황하고, 어떤 것은 뻔하고, 어떤 것은 너무 길어 토의는 지지부진해졌습니다. 스카이프 너머로 고추장이 “인터내셔널”이 어떻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인터내셔널”만으로는 쓸쓸하니 다른 표현들을 가져와 이리저리 붙여보며 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인터내셔널” 앞에 형용사를 두든 “인터내셔널”을 수식어로 삼아 뒤에 다른 표현을 가져다 놓든 거추장스러웠습니다. 결국 단출하게 “인터내셔널”로 정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 말이 형용사이자 명사이자 동사적 뉘앙스마저 품고 있어 구태여 다른 표현을 덧붙이는 게 어색했나 봅니다.

이번호는 “인터내셔널”로 가지만, 수유너머 위클리는 조만간 “인터내셔날 2”를 특집으로 내놓으리라 예감합니다. 수유너머 위클리의 인터내셔널도 형용사적이며 명사적이며 또 동사적일 테니까요.

3.

프리타노조의 후세 에리코 씨, 와나타베 도부타카 씨와 청년유니온의 김영경 씨가 대화를 주고받는 자리에 동석했습니다. 후마니타스 출판사의 북카페였습니다. 합정역에서 모인 후 그곳이 대화에 적합하겠다 싶어 찾았는데,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북카페라서 너무 소란스러우면 안 되는 모양인데, 세 분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합정역으로 향하면서는 초면인 세 분이 만나 이야기가 섞이려면 무엇을 화제를 꺼내야하나 고민했습니다. 기우였습니다. 대화를 이어가기 위한 화제가 필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세 분은 만나서 대화를 해야 했던 분들이었습니다. 저는 “일본의 격차사회론과 한국의 공정사회론, 이런 걸 화제로 꺼내볼까” 혼자서 궁리도 했었지만, 부러 문제를 지어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콕 찌르면 꿀물이 새어나오듯 서로의 고민은 흘러나오고 뒤섞여 곧 공동의 화음을 이루었습니다. 그것은 서로의 활동에 공통점이 많았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차이가 발견되면 이야기는 깊어졌습니다. 현실적 조건이 다르니 표면에서는 오히려 차이가 두드러졌습니다. 하지만 그 밑바닥으로 교감이 이루어졌습니다.

4.

그 자리에 “인터내셔널”이 있다면 그것은 서로 다른 조건에서의 고민과 고투가 서로에게 번역되는 장을 가리키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인터내셔널은 형용사이며 명사이며 동사적입니다. 서로 다른 사회에서 어떤 사안(명사)은 다른 양상(형용사)과 동향(동사)을 보입니다. 비정규직의 문제라 하더라도 한국과 일본의 활동가가 자기사회에서 짊어질 무게는 다르며, 무게를 짊어지는 맥락도 다릅니다.

저는 그래서 국경을 넘어선 혹은 “인터내셔널”한 연대에서 섣부른 입장의 합일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저는 고민의 연대를 생각합니다. 서로 처한 조건이 다르다는 번역불가능한 지점에서 출발해 고민과 고투를 번역해내는 연대를 생각합니다. 만나고, 서로 고투의 내실을 나눠 갖고, 서로를 매개삼아 자신이 끌어안던 문제를 다시 검토하고, 자신의 현장으로 돌아와 실천하고, 그렇게 어려운 한 걸음을 떼고 있는 서로를 응시하는 것. 그것이 진정 “인터내셔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기록이 올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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