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무한독전

생활, 첫번째- 우리의 졸업을 애도하며

- 주세운

카이스트에서 연이어 4명이 죽었다. 징벌적 등록금이다 뭐다하며 살벌한 경쟁시스템의 폐해를 시끄럽게 지적하던 언론들은 여느 때처럼 금세 입을 다물었다. 워낙 커다란 사건사고가 많기도 하지만, 대학생을 비롯한 청년들의 자살은 이제 어느정도는 흔한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대학졸업생이 취업실패를 비관하여 자살했다는 사건은 아예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지, 몇 단어의 자막기사가 전부였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명사들이 스스로 죽음을 택했던가. 유명한 ,정치인이나 기업가 혹은 연예인도 아닌 아무개의 선택을 기억하기엔 우리는 너무나 다사나난한 세상을 살고 있었다.

한데 이상하게도 그 한 줄짜리 기사를 본 후, 나는 자꾸만 이름도 모르는 이의 죽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인터넷을 검색했지만 그와 관련된 한 개의 기사도 찾지 못했다. 단지 어느 카페의 글을 통해, 그이가 아무 연고도 없는 지방의 여관방에서 삶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따라 듣고 싶었던 ‘브로콜리 너마저’의 <졸업>이라는 노래가, 마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송곡처럼 들려왔다. “팔려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글픈 작별의 인사들을 나누네 (…)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널 잊지 않을게.”

그이가 나와 같은 학교 출신이어서 그런 걸까. 얼굴은 모르지만, 북적거리는 캠퍼스의 어딘가에서 나와 스쳤을지도 모르는 이.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철학자 김영민은 어디선가 배우 장자연의 자살에 대해 “실질적으로 타살”이라고 했다. 매력적인 연예인을 꿈꾸었을 뿐인 장씨가 연예기획사와 사회권력층의 먹이사슬에 걸려들어 죽음을 택했을 때, 자살은 그녀의 의지라기보다는 불의의 사고에 가까웠다. “자살형식을 빌린 사회적 타살은, 고귀한 죽음의 주체처럼 그 욕망이 자신을 향한 게 아니다. 그는 침묵하는 이웃들을 향해 절망적으로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장자연처럼 그이의 죽음도 일종의 부치지 못한 편지는 아니었을까. 형식은 자살이지만 내용은 그게 아닌…

아니. 취업실패 때문이라지만 실제로는 말 못할 개인사가 있을 수도 있고 직접적인 선택의 원인은 전혀 뜻하지 않은데 있을 수 있다. 이름도 자세한 사연도 모르는 누군가의 죽음에 내가 너무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건 아닐까. 그럼에도, 연고도 없는 지방의 여관방을 찾아가던 그이의 마지막이, 그 외로움이 자꾸만 떠올랐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그이의 죽음도 그 선택의 직접적인 원인도 아니었다.

나는 그이의 죽음을 통해 실은 나를 되돌아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학을 졸업하고 쫓기듯 군대에 와서는 한동안 잊고 있었다. 그이의 죽음이 상징하는 불안과 외로움, 결코 나만의 것만은 아닐 그 정서를 나도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어느 때보다 열정과 꿈이 권장되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더 불안하고 우울했다.

물론 어느 시대나 청춘은 항상 불안정한 존재였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느끼는 불안은 이전 세대와는 원초적으로 다른 듯 했다. 신자유주의시대, 비정규-저임금 노동시장의 굴레에 놓인 우리에게 누군가는 “88만원세대”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아쉬웠다. 우리가 경험하는 삶에는 경제적 정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신자유주의와 주체성

그래서일까. 약간의 의무감으로 예전에 읽었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서동진 씀, 이하 자유의 의지)를 다시 펼쳤다. 군대에 오기 전 마지막으로 읽었던 책 중 하나였다. 다시 읽어도 여전히 쉽지 않았다. 교양서가 아닌 박사학위 논문으로 쓰여진 책이라 일상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 용어들도 많고 문체 자체도 그리 친절하다고 말할 순 없는 책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다시 한 번 이 책을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내가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느꼈던 “이건 내 얘기잖아.”라는 전율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자유의 의지>가 세대론을 다루는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이 나의 그리고 우리세대의 이야기로 읽혔던 것은 이 책이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통칭 신자유주의시대라 불리는 현재를 그려내기 때문이다. “새로운 자본주의는 어떤 사람을 빚어내는가” 이런 의문 속에서 출발한 책은 신자유주의를 어떤 경제나 정치적 질서가 아닌 사회에서 행위 하는 인간의 변화로서, 책의 표현으로는 새로운 “주체성”의 출현으로 이해해보자고 제안한다.

“나는 한국 자본주의가 지난 20년간 시도했던 장기적 구조조정의 과정은 또한 주체성의 구조조정 과정이었으며, 한국 자본주의를 재편하는 과정은 또한 자본주의적 주체성을 재편하는 과정이었음을 보여주려 했다. (…) 이는 아마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계보학적 분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372쪽)

자기계발서로 가득 찬 서점가, 무수히 존재하는 스터디 모임들, 학내 활동 대신 공모전이나 인턴십에 몰두하는 대학 문화 등은 이미 우리에겐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나 책은 자기계발, 자기계발의 문화가 아닌 ‘자기계발하는 주체성’을 말한다. 그것은 저자가 말하는 자기계발이 일상에서 자기계발 상품을 소비하는 특정 개인들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에게 ‘자기계발하는 주체’란 일터, 학교, 지역사회 등의 다양한 사회적 삶에서 자기를 능동적으로 돌보고 계발하는, 우리 신자유주의 시대의 표준적이고 보편적인 인간형을 가리킨다.

“자기계발이라는 것은 전문화된 지식, 상품, 테크닉으로 구성된 자기계발 산업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자아를 빚어내는 새로운 이상이 됐고, 신자유주의적으로 사회가 전환된 이후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거의 모든 곳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18쪽)

자기계발하는 주체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아를 빚어내는 새로운 이상”이 되었다. 그것은 지난 20여년 간 다양한 경로와 과정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 교육 분야에서는 신교육체제라는 개혁 하에 ‘자기주도’적 학습자라는 이름으로, 일터에서는 격동하는 지식기반경제에 걸맞게 자신을 경영하는 지식근로자라는 인재상으로,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인적자원개발정책에서 말하는 역량 있고 자기 삶을 책임질 줄 아는 시민상 등으로 변주되고 접합되어왔다. 그러므로 각각의 영역에서 주체를 수식하는 자기계발, 자기주도, 자기책임, 자기경영 등등의 다양하지만 본질상 동일한 수식어들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두를 묶어내는 “자기를 향상시키고 자기를 돌보는” 주체성의 출현이다.

자기계발- 자율과 책임의 윤리

그렇다면 자기를 향상시키고 돌보는 혹은 자기계발하는 주체성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이상적 자아상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고 그것은 또 무수한 인간 주체들의 행위가 모여 만들어지는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을까.

그것은 우선 나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창조한다. 자기계발의 ‘자기’란 기존의 학생, 직장인, 주부 등 “사회적 정체성으로 규정되는 나와는 다른, 나 자신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상상하는 나”이다. 이러한 나, ‘자기’를 자기계발하는 주체는 분석하고 진단하며 해독하는데 몰두한다. 즉 자기를 문제화하고 끊임없이 점검하는데 자기계발하는 주체성의 첫 번째 특징이 있다. 그러니 몸값과 경력개발을 위한 세속적인 자기계발만 자기계발이라 할 수는 없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진정한 자유를 발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의 성찰적 질문을 던지는 행위 또한 자기계발이라는 용어가 붙지 않았지만 자기계발하는 주체성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다. 무엇보다 나에게 끊임없이 집중하고 성장이든 경험이든 상상적인 자기와의 관계를 통해 내 속한 사회적 삶을 해석하고 행위하는 인간형이야말로 자기계발하는 주체라 할 수 있다.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상상적 자아를 중심으로 사회적 삶을 재구성한다면, ‘자기’의 성장이라는 서사, 자아실현이라는 서사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떨까. 그것은 사회 현실의 다양한 측면을 리더십의 문제, 개인 혹은 단체의 역량 문제로 바꾼다. 사회에 대한 고민보다는 창의적인 인재가 되고 싶다는 열망, 세상을 바꾸는 리더에 대한 꿈이 먼저인 세상이다.

또한 사회적 정체성과는 다른 나, ‘나/자기’라는 자아는 그것이 기업의 CEO이든 비정규직 환경미화원이든 일단은 평등한 관계를 허락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은 자아의 역량 문제로 환원되고, 현실에 존재하는 비대칭적인 권력관계는 사상된다. 한 회사의 CEO와 말단노동자가 현실에서 상호대립되는 부분이 있을지라도 자기실현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서로가 자신의 가치를 최대화하길 원하는 동지적 관계이기에 힘이 있는 이는 리더십이 있는 이로, 힘이 없는 이는 리더십을 배워야 하는 이가 된다.

마지막으로 자유롭게 너의 삶을 관리하고 향상시키라는 자기계발의 유혹 속에는 타인의 고통이나 실패에는 신경 끄라는 협박이 포함되어 있다. 자기계발하는 주체성에 포함된 윤리가 있다면 바로 이런 자율과 책임의 윤리라 할 수 있겠다. 타인의 삶에 연민 이상의 과도한 개입은 허락되지 않는다. 각자의 삶이란 각자가 책임져야만 한다는 명령, 여기에 사회정의는커녕 참다운 관계를 위한 자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디션적인 삶

자기계발하는 주체성, 자율과 책임의 윤리가 내면화된 우리에게 세상은 일종의 끊임없는 오디션이다. 우리 서로는 각자의 꿈과 희망을 위해 분투하는 관계로 그려진다. 오디션 참가자들 사이에는 적대도 없지만 우정도 없다. 참가자들끼리는 그저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릴 뿐이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삶/관계는 모두 각자의 성장을 위한 배경이자 드라마로 정리된다. 서로의 도전을 응원할 수는 있지만 탈락자를 위한 개입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TV 오디션과는 오디션적인 삶 사이의 간극에 있다. TV 오디션 참가자의 탈락은 카메라 상에서 따뜻한 위로로 처리될 수 있지만, 끊임없는 오디션적인 삶에 참가하는 나 혹은 너의 탈락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낙오일 뿐이다. 거기서 누군가는 더 큰 열정과 노력을 쥐어짜내며 재도전 하겠지만 또 누군가는 이 피로한 과정을 그만 끝내길 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오디션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졸업’ 또한 그저 한 오디션의 마무리이자 다른 좀 더 본격적인 오디션의 시작이다. 우리가 그 틈새에 쌓았던 참가자들 사이의 우정도 다음 오디션을 위해선 거둬야하는 추억이 된다. 어쩌면 내가 이름 모를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서 보았던 것도 오디션적인 삶의 한 참가자로서 단지 행복하라는 인사를 나누며 헤어져야 했던 졸업 전의 친구들과 그 속에 존재했던 다른 삶의 소멸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자유의 의지>를 다시 읽었지만 나에게 남은 것은 질문뿐이다. ‘나’에게 속박되지 않는 자유란, ‘나’만의 것이 아닌 책임이란 무엇일까. 한없이 개별화되어 버린 우리들을 묶어내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무엇보다 주체란 어떻게 변하는가.

응답 3개

  1. 스컹크말하길

    오디션에 참가할 수밖에 없다면 그걸 통과하면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는가에 대한 문제. 그 부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모두 한두가지 오디션에 수천, 수만명이 몰리니까요.

  2. 여선말하길

    잘봤습니다~^^

  3. 졸업생말하길

    어느 순간 ‘죽음’에 둔감해진 내 자신을 돌아보게되었습니다. ‘나’ 만을 주목하며 살았때도 떠오릅니다. 그렇다고 저는 사실 타인을 외치며 종교적으로 살고 싶지는 않고, 다만 세상과 타인과 관계를 잘 맺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도 좀 보고 여러 사람들도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드네요.

    이전에 보다가 너무 어렵게 쓰여 손을 놓았던 책인데 글로 잘 써주셔서 감사히 잘 봤습니다. 다만 자기의 삶을 관리하고 향상시키려는 노력이 문제일지, 그 노력이 타인이나 가족을 제외한 다른 것에는 적대감을 갖게 하는 것들이 문제일지는 좀 더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저 역시 오디션적인 삶 말고 자기를 운용하면서도 타자와 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기에 질문을 붙여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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