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에 새긴 이야기

[3호] 시중(時中), 때에 따라 중(中)에 처하기

- 향산 고윤숙(香山 高允淑) (수유너머 길 / 청구금석문연구소 연구원)

시중(時中), 때에 따라 중(中)에 처하기

<시중(時中)> 香山刻

仲尼曰 君子 中庸 小人 反中庸.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反)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중니 가라사대, 군자는 중용이요, 소인은 중용의 반대가 되느니라. 군자의 중용은 군자로서 때로 중함이요, 소인의 중용에 반함은 소인으로서 기탄함이 없음이니라. – <중용(中庸)>

道는 路와 같다 하였다. 모든 사람과 물건이 각각 그 성품의 타고난 마땅한 바가 있어, 언제나 사물의 사이에 각각 마땅히 행하여야 할 길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중용(中庸)>에서는 ‘성품을 좇는 도’라 하였다.

시대마다, 처한 위치에 따라 사람과 모든 사물이 타고난 바를 해석하는 척도가 달랐다. 특히 고대인의 척도에서 보는 마땅히 해야 할 바는 기독교적인, 혹은 헬레니즘 시대 이후의 그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고대 희랍인(그리스인)들에 있어서의 선악(善惡)에 대한 판별을 그 중의 한 예로 들 수 있다. 그들에게 선에는 선, 악에는 악으로 갚을 힘을 갖고 있고, 실제로 복수할 수도 있으며, 따라서 감사하는 마음도 갖고 있고 복수심도 강한 사람을 선하다고 칭한다. 무력하여 복수할 수도 없는 사람은 불량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멀고 먼 옛날 어느 시기에는 선악은 고상함과 천박함, 주인과 노예와 마찬가지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척도에 따라 그들은 적(敵)을 악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보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메로스에게는 트로이인과 희랍인 모두가 선인이었다. 트로이의 성을 향해 돌격하는 희랍인들을 성벽 위에서 지켜보는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는 며느리 헬레네에게 이렇게 묻는다.(<일리아스> 3권)

… 프리아모스는 큰 소리로 헬레네를 불렀다.
“이리 오너라, 귀여운 아가야, 내 앞에 앉아서
네 전 남편과 친척들과 친구들을 보도록 해라.
-나는 너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다만 아카이아 인들의
이 피눈물 나는 전쟁을 내게 보내 준 신들을 원망할 뿐이다.-
자, 저 거대한 전사의 이름을 말해 주지 않겠느냐.
저기 저 훌륭하고 큰 아카이아 인 말이다.
그보다 머리 하나쯤 더 큰 자들도 없지는 않으나,
저토록 잘 생기고 위엄 있는 사나이는 아직 내 눈으로
보지 못했구나. 그는 진실로 왕자(王者)의 풍모로다.”(3권 161-170행)

적진에서 만난 클라우코스에게 디오메데스는 묻는다.(<일리아스> 6권)

이때 히폴로코스의 아들 글라우코스와 튀데우스의 아들이
서로 싸우기를 열망하며 양군의 한가운데로 달려나갔다.
그들이 마주 달려와 서로 거리가 가까워 졌을 때
먼저 함성이 큰 디오메데스가 상대방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용감한 자여,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들 중에 그대는 대체 누구인가?
남자의 명예를 높여 주는 싸움터에서 내 일찍이 그대를 본 적이 없노라.
하나 지금 그림자가 긴 내 창을 기다리는 것을 보니
대담성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들을 크게 능가하는 것 같구료.
하지만 내 힘에 맞서는 자식들의 부모들은 모두 불행하도다.”(6권 121-127행)

시대의 가치 척도에 따라 얼마나 다른 ‘道’가 있는지, 어떤 척도를 좇는가에 따라 때에 따라 행해야 할 ‘시중(時中)’의 구체적인 내용과 형식이 달라지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라이오스 살해가 왜 ‘죄’가 될 수 없는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클뤼타임네스트라의 아가멤논 살해, 오레스테스의 클뤼타임네스트라 살해, 메데이아의 친 자식 살해 등을 지금의 윤리적 잣대와는 다른 시각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척도에서는 경멸을 받을 만 한 자가 악인으로 간주된다. 공동 감정을 지닌 선인 공동체에서 선은 유전되며, 악인이 그런 훌륭한 토양에서 생성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인 가운데 한 사람이 선인의 체면을 깎는 어떤 행위를 하면, 사람들은 핑계거리를 생각해낸다. 예를 들면, 신이 그 선인을 현혹과 망상으로 몰아쳤다고 말함으로써 신에게 책임을 돌리고 마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는 고대의 서사시와 비극에서 수없이 많은 예를 들 수 있다. 오이디푸스의 친부살해는 아폴론의 신탁에서 비롯되었고, 오레스테스의 친모살해는 아폴론의 강력한 제안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신에게 그 문제의 시발점을 돌렸을 정도로, 고대의 희랍인들에게 마땅히 따라야 할 ‘道’는 자신을 노예와 같은 삶과는 분명하게 구별 짓는 ‘주인 되기’ 즉, 고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잠시도 떠나지 말아야 할 것이었다. 고귀한 존재가 행해야 할 덕목에는 동서양 어디에서나 다를 바 없이, ‘편벽되지 아니한 것’이다. 그 어떤 힘에 편벽되게 의지하여, 자신의 희노애락(喜怒愛樂)의 상태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하는 것은 군자의 덕목이 아닌 것이다. 감정의 변화는 사물에 대한 사사로운 욕망의 크기에 따라 변하는 것이기에 주위의 사람과 사물과의 관계에 대한 조화를 유지할 수 없다. 즉 지나치거나 부족함이 있어서 한결같음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고대 희랍인의 척도에 따르자면 편벽된 자(소인)는 ‘악인’인 것이다. 사물에 대하여 지나친 욕심을 부리고 꺼릴 것 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때에 따라, 때에 맞게 사람과 사물을 응대할 수 있으려면, 이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척도에 대해 그것이 누구의 명령인지를 우선 질문해야 한다. 그 해답을 얻는 과정에서 비로소 나 자신의, 우리의 공동 감정에 기초한 ‘시중(時中)’에 거할 수 있을 것이다.

篆刻 돋보기

인장은 고대로부터 ‘믿음의 표시’로 사용되었고, 지금도 그러한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인장은 사용자에 따라서 관인과 사인(私印)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관인은 지금까지도 정부기관의 각 부처 등과 기업에서 사용하고 있다. 아래에는 왼쪽으로부터 두 개의 후한인(後漢印)과 진남북조인(晉南北朝印)이다.

관인 <삭방장인(朔方長印)> <軍假侯印(군가후인)> <廣武將軍章(광무장군장)>

사인은 개인의 인감으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인감은 출생 신고, 혼인 신고, 사망 신고를 비롯하여 은행예금의 입출금과 재산권 행사 등에 널리 쓰인다. 아래의 작품들에서 각 작가의 사인들을 찾아보시기 바란다. 이름은 ‘음각(陰刻)’으로, 호는 ‘양각(陽刻)’으로 새기었다.

* 클릭하면 그림이 확대됩니다.

<만폭동(萬瀑洞) - 겸제 정선(謙齊 鄭敾)>

<표암선생담채화단첩(豹菴先生淡彩花丹帖 중에서 ‘꽃과 나비’ -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신죽함로(新竹含露) -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찍는 순서는 이름을 위에, 호를 아래에 찍는다. 글씨나 그림 작품을 볼 때, 주로 작품의 구도나 색채 등에 집중하기 마련인데, 앞으로는 각 작가의 낙관을 주의 깊게 살펴보시길 바란다. 작가의 호와 이름 밑에서 이름과 호가 새겨진 낙관을 발견하는 것이 ‘아는 만큼 볼 수 있는’ 재미중의 하나이다.

– 향산 고윤숙(香山 高允淑) (수유너머 길 / 청구금석문연구소 연구원)

응답 4개

  1. 고추장말하길

    니체의 그리스 비극에 대한 해설로 제격입니다 ^^ 하지만 ‘때에 맞게 처한다’는 말이, 왠지 스토아 사람들이 말했던 ‘네 자신이 되어라’는 말(그러고보니 니체도 이런 말을 했죠^^), 사건을 감당할 만한 사람, 사건에 맞는 사람이 되어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여튼, 고윤숙 샘의 전각을 보노라면 여러 지혜를 감춘, 고대의 상형문자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 香山말하길

      저의 고민의 지점을 바로 알아차리셨습니다.
      올 해는 위클리 수유너머와 함께 이 문제를 붙들고 열심히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와중에, 물론 공부란 바로 그런 절실한 지점에서 발견한 질문을 붙드는 것이기에,
      다시 니체의 저작들을, 비극과 서사시를, 그리고 푸코와 고대 서양 철학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추장님의 응답이 참으로 반갑습니다.

  2. 쿠카라차말하길

    “적은 악하지 않다. 왜냐하면 보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는 구절이 와 닿네요. ‘적’에 대한, 그리고 ‘보복’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것 같아요. 위대한 적, 위대한 보복! 좋은 글귀, 좋은 문자, 좋은 그림, 잘 보고 있습니다.

    • 香山말하길

      항상 감사드립니다. 항시 일관되게 강도있게 생각하고 몸을 움직인다는 것이
      매우 힘겹긴 하지만, 그래서 정신이 맑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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