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사람이 있다. 그러나 사람이 없다.

- 풍경지기 박혜숙


『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창비

지난 겨울, 가족과 제주도 여행을 갔을 때였다. 중산간지역에 내리는 눈을 맞으며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박물관에 갔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 모습을 재현해 놓아서 지난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코흘리개 시절에 보던 풍경이 즐비했다. 자갈탄을 피우는 난로 위에 올려진 양철도시락이 산처럼 쌓여있던 교실, 꼬마들에게 디즈니랜드와 같은 환상을 심어주던 문방구(우리에게 문구점은 없었다. 문방구만 있었다. 자장면은 없고 짜장면만 있는 것처럼.), 어디선가 쥐가 나타나 질주할 것 같던 영화관. 어른들은 그곳에서 향수를 느끼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뭔가 비어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뭘까?
그래, 그것이었다.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곳은 모든 숨결이 거세되어 버린 공간이었다. 양철도시락을 건네주시던, 지친 어머니에게 미술 준비물을 살 돈을 달라고 끝내 말하지 못한 아이의 망설임은 담겨있지 않았다. 문방구 앞에서 주머니 속 동전을 아무리 세어도 눈앞에 놓인 과자를 살 수 없던 꼬마의 아픔은 담겨있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 발표가 나던 날, 불합격 확인을 한 후 펑펑 울기 위해 영화관에서 슬픈 사랑 영화를 보던 재수생의 눈물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김애란의 소설은 생생한 숨결이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굳이 그녀의 작품을 박물관에 비유하는 이유는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이 작가의 작품은 읽힐 것이며 미래의 그때, 그들에게 이 작품이 2000년대를 살아간 우리 삶이 그대로 복원된 박물관 역할을 하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놀라웠다. 특히 「나는 편의점에 간다」와 「노크하지 않는 집」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세밀한 감정까지도 까발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우리가 뭔가를 사기 위해서 가야하는 곳은 ‘시장’이나 ‘구멍가게’가 아니라 ‘마트’와 ‘편의점’이다. 똑같은 새우깡을 사더라도 ‘편의점’에서 파는 새우깡이 ‘구멍가게’에서 파는 새우깡보다 더 맛있는 과자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새우깡은 다르지 않다. 다만 다른 것은 고객을 바라보는 주인의 눈빛, 주인을 바라보는 고객의 눈빛이다. 아니, 눈빛이라 이야기할 수도 없다. 서로 눈을 바라보지도 않는다. 계산대의 금액만을 서로 응시할 뿐이다. 그러니 그곳에 사람은 없다. 판매자와 소비자, 제품만이 있을 뿐이다. 편의점에서의 소비자가 일상생활을 꾸려나가는 공간도 역시 그러하다.
예전 임용고시 준비를 하기 위해 서울에서 잠시 공부를 하던 시절에 저렴한 1인실 독서실에서 생활했다. 크지도 않은 공간에 칸막이를 해놓아 숨 쉴 틈도 없던 그곳. 칸막이를 없애는 상상을 해봤다. 칸막이가 없어지자 사람들이 팔을 뻗을 자리도 없이 빽빽하게 누워있다. 단칸방에 온 가족이 자는 모습과 무엇이 다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칸막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견고한 성이 된다. 소리만이 오고간다. 한옥은 소리가 넘나드는 투명한 공간이라 한다. 그래서 아들이 밤새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소리를 뒷간 다녀오는 아버지가 듣고 아들의 고민을 마음에 담는다. 하지만 독서실의 칸막이를 통해 들리는 소리는 소통이 아니라 단절을 완성시켜주는 존재가 된다. ‘옆방 사람이 화장실에 가는구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옆방 사람이 음악을 듣는구나. 이어폰을 끼는데도 이렇게 소리가 들리게 하면 어떻게 해. 내일 주인아저씨에게 항의를 해야겠어.’ 이 독서실의 칸막이가 확장된 공간이 온 도시를 삼켜버린 아파트이다. 이렇게 칸막이 속에 갇혀버린 개인들이 ‘노크하지 않는 집’에서 살아간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를 통해 20대를 ‘투명인간’에서 ‘인간’으로 복원시켰던 엄기호 선생은 『오늘의 교육』(교육공동체 벗)에 실은 「학생들과 무슨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 – 고백에서 증언으로의 전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고백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무엇일까? 증언이다. 학생들을 증언자로 생각한다는 것은 그들을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동반자로 인정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더 이상 그들에게 내면의 고백이 아니라 그들이 시대와 사회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물어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그 자체로 사회적 발언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중략)
그러나 증언으로써의 글쓰기는 그리 녹녹한 작업이 아니다. 무엇보다 증언으로서의 글쓰기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우리 사회의 권력이 작동하는 공간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하며, 그 권력에 의해 자신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말할 수 있는 ‘용기’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실에 대한 용기는 용기를 가지고 세상에 맞서야한다는 그런 류의 말이 아니다. 세상을 향해 짱돌을 던지는 사람들만이 사회에 대해서 말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에 대해 증언한다는 것은 권력에 맞서야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권력에 내가 얼마나 철저하게 무력할 수 밖에 없었는가를 드러내는 것, 그것이 더 강한 ‘진실에 대한 용기’이다.

엄기호 선생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김애란은 이 시대를 ‘고백’이 아니라 ‘증언’하는 작가이다. 그녀는 이 시대에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철저히 홀로, 무력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증언한다. 그 증언은 개인의 깊고 깊은 심연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넓고 넓은 세상을 향하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앞으로 이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그렇다고 가만히 무력함에 빠져있어야만 하겠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그 물음을 2000년대 박물관 속에 소중하게 담아낸다.

갑자기 두려워진다.
‘나는 학교에 간다’가 ‘나는 편의점에 간다’와 같은 기의를 가진 기표가 되지 않을까? ‘노크하지 않은 교실’이 ‘노크하지 않는 집’과 같은 기의를 가진 기표가 되지 않을까? 그곳에서 교사와 학생이 서로 눈을 바라보지 않고 성적표의 숫자만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지만 사람이 없는 공간으로 화해버리지나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이 시대를 증언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을 향해서.

응답 1개

  1. 말하길

    밤새 고민하는 아들의 속내를 뒷간 다녀오는 아버지가 알게 된다는 대목이 퐉 와닿네요.ㅎㅎ 잘 지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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