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가장 낮은 영혼까지 감싸는, 가장 아름다운 햇살

- 달맞이

『코끼리 아줌마의 햇살 도서관』김혜연 글, 최현묵 그림, 비룡소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책이 참 귀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터라 새 책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친척집에 다녀온 엄마 보따리에서 책이 나오면, 횡재를 한 것처럼 즐겁고 좋았다. 낙서가 되어 있건, 겉표지가 빛이 바랬던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책은 내겐 무엇보다 귀한 선물이요, 신천지로 들어가는 비밀의 열쇠였다. 어디 그뿐인가! 책은 갖가지 지식과 정보의 원천이요, 진리의 상징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진리의 상징인 책들이 넘쳐나는 도서관이야말로, 앎에 목마른, 앎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는 곳이다.
『코끼리 아줌마의 햇살도서관』은 작은 동네에 들어선 도서관에 얽힌 이야기다. 도서관을 들랑날랑하는 사람들을 그린 이야기 다섯 편이 담겨 있다. 작가는 마음속에 응달을 품고 사는 다섯 주인공을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도서관으로 불러들인다. 말더듬이 엄마를 둔 덕에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여섯 살 진주, 작은 키와 몸집 때문에 자신감이 없는 정호,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싶지만 큰 덩치 때문에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코끼리 사서 아줌마, 무관심한 식구들 때문에 고독 속에 숨고 싶어 하는 수정이, 사람들 놀림 때문에 딸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서는 좀처럼 말을 하지 않는 명혜 씨. 각기 다른 인물들은 책을 매개로 자신감을 획득해 가고, 자신들의 속내를 풀어내며,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친구가 되어간다. 작가는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도서관이 지식의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과 소통하고 마음을 나누는 공간이기도 하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준다.

주변인들의 천국, 햇살 도서관

속도의 시대, 이미지의 시대에 책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김영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갖고 있는 두려움, 내면의 충동을 이해하면서 더 높은 자아를 고양시키는 것이 호메로스 시대부터 변치 않는 독서의 기능”이라고 이야기한다. 김영하의 말대로라면『코끼리 아줌마의 햇살도서관』에 담긴 다섯 이야기들은 독서의 기능을 아주 잘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햇살을 모아놓으면 친구가 생길 거야」의 주인공 진주는 아빠 없이 엄마와 둘이 산다. 진주는 말을 더듬는 엄마의 대변인 노릇을 할 만큼 똑 떨어지는 여섯 살이지만, 친구가 없다. 친구들이 벙어리 엄마를 두었다고 놀리는데다가, 친구들 앞에서는 말을 더듬게 될까 봐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을 더듬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진주는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욕망을 정직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저녁이 되어야 놀이터에 나와 혼자 그네를 타거나 미끄럼틀을 탄다.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싶지만 마음뿐이다. 작가는 진주가 거의 시간을 보내는 미용실을 ‘한낮에도 전등을 켜지 않을 정도로 어두컴컴한 곳’으로 설정해, 진주가 처한 상황과 진주의 고립된 심리를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그런 진주에게 도서관은 구원의 공간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들과 다정한 사서 아줌마와 계단 난간에서 같이 미끄럼틀을 탈 수 있는 남자 친구를 만난 ‘천국’과 같은 곳이다. 햇살 도서관은 진주를 옥죄고 있던 ‘말더듬이 딸’이라는 규정에서 진주를 해방시켜 주고, 친구를 만나고 싶다는 진주의 은폐된 소망을 충족시켜 준다.
「새벽 2시, 혼자만의 방에서」의 주인공 수정이에게도 도서관은 안식과 구원의 공간이다. 언니와 같이 방을 쓰는 수정이는 언니 혼자 책상을 쓰는 게 불만이지만, 어려운 형편을 알기에 차마 부모님께 불평을 털어놓지 못한다. 수정이는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식구들이 야속하고 지긋지긋하다. 그래서 집을 벗어나고 싶을 때마다 도서관으로 간다. 도서관은 기꺼이 수정이의 피난처가 되어준다. 도서관이 수정이에겐 현실에서 가지지 못한 방이요, 수정이가 꿈꾸는 안락한 미래의 집인 셈이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자신에게 무관심한 식구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늦게까지 열람실에서 시간을 보내던 수정이는 열람실에 갇히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혼자라는 해방감은 무서움으로, 부모님에 대한 서운함은 미안함으로 바뀐다.

‘……너무 조용해. 조용한 거 원했는데, 이런 건 아니야. 나는 그냥, 언니가 가끔 책상만 양보해 주었으면 했다고. 이건 무서운 거지, 고독한 게 아니잖아. 이런 걸 고독한 거라고 하지는 않을 걸.’(134쪽)

“아빠는, 아빠는 정말 걱정 많이 할 텐데……. 지금 운전하고 있을까? 엄마가 전화했으면 아마 곧바로 집에 와서 울고 있을지 몰라. 아빠 아빠, 미안해.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렇게 되어 버렸어.”(133쪽)

새벽에 도서관으로 달려온 식구들을 보는 순간, 맺혔던 수정이 마음은 사르르 녹는다. 자신을 걱정하느라 빨개진 식구들의 눈을 보는 순간, 수정이는 “도서관에서 몇 시간의 그것이 고독이었다면, 이제는 고독해지고 싶지 않다. 절대(139쪽)”라면서 고독에 대한 생각을 기꺼이 바꾼다. 도서관이 수정이에게 거울의 기능을 한 것이다. 도서관에 갇혔던 그날 밤 수정이는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보고,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내가 이 경기장에서 최고다」에 나오는 정호는 도서관을 드나들면서 축구선수로서의 자존감을 획득해 가며,「엄마의 꿈은 수다쟁이」에 나오는 진주 엄마 명혜 씨는 책을 통해 말더듬을 조금씩 극복해 간다. 코끼리 사서 아줌마와 친구가 되어 수다쟁이가 되고 싶다는 꿈도 이룬다. 진숙 씨를 만나 그동안 가슴 속에 쌓아 두었던, 돌덩이처럼 자신을 누르던 아픈 사연을 털어놓음으로써 비로소 자신을 치유한 것이다.

“…….마, 말을 하고 나니까 기분이 좋아요. 여기, 이 가슴속에 갇혀 있던 말들을 꺼내 놓으니까 시원하고, 세상이 밝아 보이는 것 같아요.”(170쪽)

작가는 이렇듯 세상의 중심부에서 비껴나 있던 사람들이 서서히 책을 통해 묵은 상처를 치유하고, 자존감을 얻고, 자신을 성찰하며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참다운 삶이야말로 진짜 참다운 앎

그러나 이 동화가 정말 아름다운 것은, ‘햇살도서관’에 얽힌 사연 때문이다. 햇살도서관은 이금례라는 할머니가 40년 동안 김밥을 팔아서 번 돈으로 세운 도서관이다. 처녀 적에 선생님이 되고 싶었으나 꿈을 이루지 못했던 할머니는 김밥을 팔아 모든 돈으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도서관까지 만들었다. 코끼리 사서 진숙 씨도 김밥 할머니의 도움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사서의 꿈을 갖게 되었다. 할머니에게 받은 은혜를 갚는 길은, 도서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한 진주 씨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 나간다. 진주 씨는 결국 진주와 정호를 책과 친해지고 해 주었고, 노상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소설가에게 미소를 되찾아 주었으며, 명혜 씨에게 수다를 되찾아 주었다.
책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책은 단순한 진리의 창고가 아니다. 장자는 도(道)를 깨달은 심성에서 나는 빛을 ‘以明’이라고 했다. ‘明’은 햇빛이 세상 만물을 비추듯 세상 모든 것을 아는 경지를 말한다. 분별적 지식이나 의식에서 벗어나 일체가 확연히 트이고 열려 아무 장애가 없는 마음의 경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마음이 섬광처럼 비추는 상태가 바로 明이다. 明이야말로 참다운 앎의 경지인 셈이다. 장자는 이 明의 경지에 들면 삶과 죽음을 초월하게 되며, 만물과 소통이 가능해 진다고 말한다. 또한 앞에서 끌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들을 북돋는 존재가 된다고 한다.
이금례 할머니야말로 明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이 아닐까? ‘이금례 도서관’은 우리가 추구하는 앎의 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삽화가 아닐까? 간신히 한글만 배워 까막눈을 면한 이금례 할머니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을 북돋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 가장 참다운 앎을 체득했다는 이 역설이야말로 이 동화가 주는 내밀한 교훈일지도 모르겠다. 이금례 할머니야 말로 니체가 말했듯이 학문(지혜)란 “태양처럼 누구에게나 비쳐야 함을. 희미한 광선일지라도 가장 낮은 영혼에까지 침투해 들어갈 수 있어야 함”을 알고 실천한 사람이니까.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