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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찌꺼기와 사유의 가능성

- 유정아(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벤야민은 초현실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 운동’이니, ‘시적 운동’이니 하는 피상적인 것들이 아니라고 말했다. 초현실주의는 단순히 꿈의 재현을 외치거나 상상의 유토피아를 향해가는 낭만주의가 아니라는 말이다. 브르통이 2차 초현실주의 선언문에서 초현실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라고 말한 문구를 들어보면 살벌하기 그지없다. ‘손에 총을 들고 나가 대중을 향해 맹목적으로 쏘아대는 것!!!’

물론 이 충격적인 문구는 상상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1989년 중국의 아방가르드를 알리는 전시 오프닝에서는 실제로 총이 발사되었다. 물론 그 예술가는 경찰에 끌려가 철창신세를 졌다. 그러나 대중과 사회가 보여주는 한심한 작태들에 총을 쏘아대고 싶은 심정은 비단 은유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매우 위험한 발언이다. 그러니 알아서 새겨 들으시길!) 그것은 문명의 발전을 주도하는 실용적, 합리적, 논리적인 틀 속에서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현존재를 급진적으로 비판하고 자유를 쟁취하려는 언술이다. 이를 위한 해방의 수단으로 초현실주의는 어떤 다른 현실적인 논리와 폭력적인 행위를 선동하기보다는 극단적인 예술적 상상력을 내세웠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이 극단적인 예술적 상상력이 매우 구체적인 현실의 경험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다. 초현실주의를 옹호했던 벤야민의 논리를 들어보면, 초현실주의만큼 ‘현실과 경험’의 측면을 강조한 예술도 없다.

“이들 무리의 글에서는 문학이 아니라 다른 것, 즉 선언문, 구호, 도큐먼트, 허풍, 위조가 중시되었다. 문학이 전혀 중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식한 자는 이 운동에서는 이론이나 환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경험과 현실에 대한 강조는 일차적으로 ‘창작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전통적인 표상을 거부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창작을 거부했다면 초현실주의는 대신 무엇을 받아들인 것일까? 창작에 대한 거부와 경험의 강조는 사물을 구원하는 미학적 방식, 즉 다다와 초현실주의가 자주 강조하는 ‘우연히 발견된 오브제’, 낡은 것, 사라진 것을 재구성해 보여주는 미학적 방식과 연결된다.

이렇게 예술가의 절대적인 의식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는, 사물 자체를 우연히 경험하는 방식은 두 가지 양상으로 전개된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아이러니한 의미를 추구하는 차원에서 레디메이드 같은 방식처럼 공장에서 생산된 대량 생산물(상표 같은 글자)을 예술 공간 속으로 끌어들이는 경우이다.
다다이스트였던 슈비터즈(Kurt Schwitters, 1887~1948)의 주재료는 쓰레기였다. 상업을 의미하는 단어 ‘commerz’의 끝부분 철자를 딴 merz는 슈비터즈 작업의 근간이 되는 미학이다. 1920년의 글에서 그는 “메르츠는 예술 개념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시각세계”로, “선택된 다양한 재료들 간에 조화를 추구함으로써 유화만으로 제작하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1919년부터 슈비터즈는 생활주변으로부터 얻은 상자, 줄, 나무조각, 그리고 삽화, 우표, 전차표, 상표 등 여러 종류의 인쇄물을 모아 화면에 붙이는 작업을 했다. 이런 재료들은 매일같이 막대한 양으로 생산되어 평범한 도시인들에 의해 소비되면 곧바로 쓰레기가 되어 버려지는 것들이다. 슈비터즈는 보잘 것 없는 산업쓰레기들을 순수미술 작품에 도입함으로써 현대 산업사회의 일상의 리얼리티를 이야기하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추상회화에 버금가는 독특한 시정이 담긴 조형성을 구현했다.

쓰레기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종종 페스트푸드점에서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콜라와 햄버거를 보고 있으면 나는 거대한 쓰레기 더미가 연상된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패스트푸드점을 떠올리면 쓰레기 냄새가 난다.) 그들이 즐겁게 혹은 아무 생각없이 그 자신만큼이나 개념없는 친구들과 모여앉아 쓸데없는 이야기로 몇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그들 앞에는 몹시 부담스러운 일회용 콜라컵이며 조잡하기 그지 없는 아이스크림 담는 플라스틱 용기들, 장난감처럼 조야하게 만들어놓은 일회용 포크와 나이프들이 쌓여간다. 저것들은 몇 분 지나지 않아 쓰레기로 쌓여갈 것이다. 저런 쓰레기들이 한 매장에서 나오고, 강남구에서 나오고, 서울 전체에서 나오고, 한국에서, 아시아에서, 전 세계에서 쏟아져 나온다. 그것도 365일 동안 매일.

슈비터즈가 모은 우표나 전차표, 상표 등 잡다한 인쇄물들이 붙여진 <메르츠 19>나, 상업광고로부터 직접 차압해 온 사진이나 삽화를 이용한 같은 작품에서는 대량 생산과 소비, 대중적 교통수단, 그리고 광고가 범람하는 현대 산업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의 콜라주 속에 붙여진 평범한 인쇄물들은 전체적인 화면구성의 차원에서 다양한 윤곽선과 활자의 어우러짐을 통해 섬세하고 감미로운 순수 조형미를 창출한다는 사실이다. 쓰레기가 쓰레기로 남지 않고 조형미로 탈바꿈 할 수 있었던 것은 슈비터즈가 조형적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서 인쇄물의 윤곽선 부분이 의도적으로 잘리도록 배열하거나 여러 조각의 인쇄물을 덧붙이는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하면서, 평범한 대량인쇄물을 ‘그림 자체를 위한 비물질화된 재료’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량생산된 재료를 통해 현대 산업사회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면서도, 그 구체적인 물질을 시정 넘치는 순수회화의 조형언어로 승화시켰던 슈비터즈의 메르츠 콜라주는 한 마디로 삶으로부터 유리되지 않는 순수예술의 구현이었다.

이 예술가가 더 대단했던 것은, 쓰레기 예술을 더 밀고 나가 아예 자신이 살던 집 자체를 쓰레기더미로 채워놓았다는 것이다. 그걸 일명 ‘쓰레기 집(merzbau)’이라고 부른다. 그는 자신의 집을 방문하는 친구들에게 오는 길에 주운 일상적 오브제들을 가져다 줄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렇게 모인 쓰레기들은 점차 거대한 메르츠 기둥merzbau column을 형성했다.

사물 자체를 우연히 경험하는 또 다른 방식은 삶의 현실에서 그 본래적 기능을 상실한 채 점차 소외되는 사물을 끌어들이는 경우이다. 물론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현실에서 끌어들인 다양한 파편 조각을 서로 결합시키는 과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그 경험적 파편 조각들이 합성되는 순간 그 조각들은 마치 영화에서 그렇듯이 현실의 모사 혹은 반영에서 벗어나 인위적인 그러나 ‘재구성된 현실’로서의 ‘그 무엇’이 된다.

이 이질적인 만남을 우리는 호앙 미로(Joan Miró i Ferrà 1893 – 1983)의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출신인 호앙 미로는 1차 세계대전 장시 파리의 전위적 아이디어들을 접하면서 초현실주의에 매료되어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루이 아라공과 친분을 나누게 되었다. 미로는 초현실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초현실주의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초현실주의자들은 회화를 목적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회화가 그 자체로 존속하는가에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회화가 제대로 성장할 싹을 심고 있는지, 다른 것을 돋아나게 할 씨앗을 뿌리고 있는지에 관심을 보인다.”

가령 1924년의 유화 <마담 K의 초상>에서는 삼각자도 보이고, 문어대가리도 보이고, 오징어도 보이고, 안테나처럼 생긴 기이한 물체들도 보인다. 이 분열된 여성 이미지는 해체인가, 조합인가? ‘여성’이라 표상되는 외양과 크기는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여성의 존재감을 강조하는 세부들이 선택되었다. 옅은 갈색의 단색조인데, 유채와 목탄으로 기하학적인 혹은 곡선을 이루는 선들이 보이며, 머리, 가슴, 심장, 척추 등을 암시한다. 이들은 우주 위를 부유하다가 어느 순간 잠시잠깐 처녀자리와 같은 성좌를 이루고는 곧 분열되어 흐르는 성좌처럼 구성되어 있다.

호앙 미로 또한 여느 초현실작가들처럼 우연적인 조합, 발견된 오브제 들에 관심을 보였는데, 새롭게 탈바꿈하고픈 주변의 자연물이나 인공물을 이용했다. 부서진 주전자, 오래된 식물뿌리, 셀룰로이드 인형의 팔다리, 막대기, 전구, 깃털 등을 사용했다. 이 가운데 매력적인 작품으로 <스페인 댄서>(1928)가 있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옷핀과 깃털, 코르크 마개를 통해 우아하면서 열정적인, 우리에게는 카르멘으로 기억될 스페인의 무용수를 보여주고 있다. 화려하고 정열적인 라틴 음악과 박수와 갈채 소리, 그 속에서 격렬하게 몸을 뒤흔들며 그 화려한 몸의 놀림을 보여주는 댄서의 모습이 우리의 행복한 상상력을 자극하지 않는가!

최근 보았던 사진작가 구본창의 전시(국제갤러리 2011. 3. 24- 4. 30)는 초현실주의를 떠올리게 했다. 물론 그의 전시에 등장한 오브제들은 전혀 ‘초’현실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작가가 어린시절부터 수집해 온 사물이었으니까.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시간속에서 퇴화된 축적물로서의 ‘쓰레기’가 아니던가! 사실 그 어린시절의 수집품들이 이루는 풍경은 자본주의적으로 사고할 때 이미 효용성을 잃은 사물들이다. 혹은 남들에게는 고물상에도 가져다주기 귀찮은 가치없는 폐품일 뿐이다. 어린시절 갖고 놀던 조그만 목마, 한 귀퉁이가 낡아 떨어진 거울, 어린시절 어머니가 사주셨던 더 이상 멜로디가 흘러나오지 않는 작은 선물상자.

구본창은 컬렉션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나이인 6살때부터 자신의 관심을 끈 물건들을 하나씩 간직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 지금까지 그의 시선을 끄는 모든 물건들과 이미지들은 그의 곁에 머물며 삶의 여정을 함께 해 왔다. 수백개의 크고 작은 소소한 물건들이 산재해 있는 그의 작업실은 르네상스 시대의 호기심의 방을 방불케 한다. 구본창의 컬렉션은 귀중하고 값어치 있는 소위 명품 혹은 진품 컬렉션이 아니다. 구본창 그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그래서 시간과 함께 사라질 수 밖에 없는 매우 사적이고 평범한 운명들의 모임인 것이다. 구본창은 바로 이 사소한 삶에서 귀중한 가치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 <전시노트 중에서>

단언컨대 구본창이 모은 이 오브제들이나, 그가 남긴 사진들은 사진가 구본창 그 자신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니까. 그래야만 예술이니까. 그러나 이것은 ‘회고’의 대상이 아니다. 혹은 삼청동에 위치한 세련된 갤러리 안에서 부르주아 사모님들의 한낱 추억거리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 사소한 풀 한 포기도 소중하다는 손발 오글거리는 소녀 감성을 말하고자 함은 더더욱 아니다.

이미 쓰레기가 되어버린 그 사물들 속에는 이성과 합리성의 망으로 걸러지지 않은 그 무엇이 남겨져 있다. 그걸 사물 속에 감추어진 ‘비밀’이라고 해두자. 통제와 억압을 작동시키는 자본주의적 현실에서는 일상과 비밀이 근본적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그래서 무언가 신비스러운 것, 이성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미신이라는 영역으로 쫓겨나 버렸지만, 사실 비밀과 일상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지금 우리 사회가 만들어 놓은 인위적 구분에 불과하다. 초현실주의와 벤야민은 그런 구분에 대해 근본적으로 불신한다.

벤야민이라면 여기에서 ‘혁명성’을 발견하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과거에 존재했던 것에 대한 역사적인 시선을 정치적인 시선으로 바꾸라’고 말했을 것이다. ‘과거에 지나간 것이 현재에 빛을 비추거나, 현재가 과거에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이미 흘러간 것이 지금과 만나 섬광처럼 성좌구조를 이루는 무엇!’ 그것이 예술이다.

* 참고문헌
최문규, “범속한 각성, 이미지공간/몸공간” (연대 심포지움 자료) / 오진경, “다다와 초현실주의미술에 나타나는 평범함의 정치학”

응답 4개

  1. Anonymous말하길

    한 집단에서 예술로 취급받는 것들이 다른 집단에서 쓰레기 취급받는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 글에서 대중을 묘사하는 표현들과 비천한 대중들이 그네 선각자들을 묘사하는 표현들과 닮아있다는 게 참 웃기네요. (물론 단어를 바꾸면 더 그럴싸하겠지만.)

  2. 시민케이말하길

    올여름 강좌는 그렇담, 찌꺼기에이은 숨막히는 유희의 제 2 부 ?
    하핫! 쌤! 잼나게 읽었어요.

  3. hermes말하길

    하핫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플은 정말 시러욧! 호옥시 궁금하시면 수유너머 N으로 놀러오세요. 미녀강사 항시 대기중입니다. 여름에 초현실주의 강좌도 열린다는 것! 잊지마세요. ㅋㅋㅋ

  4. 그림 속의 공자말하길

    초현실주의의 구체성과 낡은 것, 흘러간 것의 재구성이 맞닿는다! 무척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한편 ‘흘러간 것이 지금과 만난다.’ 라는 대목에서는 특히 이것이 오브제로 표현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무수한 오독 가능성으로 인해 그것이 과거의 회귀가 아닌 지금 여기를 위한 새로운 사유로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해봐야 알 수 있으려나요?) 아무쪼록 재밌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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