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무한독전

<집은 인권이다> 2010, 주거권운동네트워크, 이후

- 화통

“여기서 친구들이랑 고기도 구워 먹을 수 있겠죠?” ‘러브 하우스’를 소개하는 마냥 부동산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한 톤 올라갔다. 수선스럽게 창문을 열었다. 치렁치렁 매달린 그녀 귀의 귀고리가 같이 움직였다. ‘맙소사’란 탄식이 절로 났다. “친구들과 MT 온 기분으로 고기 구워먹을 수 있는 베란다”는 옆방과 같이 쓰는 공간이었다. 창문을 잠그지 않는 이상, 그와 나는 이웃사촌 이상이 될 수 있었다. 무서웠다.

다시 5평 남짓한 집안을 내다봤다. 다른 건 몰라도, MT 온 기분은 그 집안 어디서든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꼬질꼬질한 싱크대와 공간 구성이 어째 MT 때 마다 들렀던 경기도 모처의 펜션을 닮아 보였다. 전세 4000만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연신 집 자랑을 하는 붉은 립스틱 바른 아주머니의 입을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건 ‘집 사수 전쟁’의 서막에 불과했다.

2010년 내 나이 스물여섯, 자취(‘자취’라고 말할 때마다 이유모를 거부감이 든다. 누군가와 결혼을 하거나 같이 살지 않는 이상, 나는 평생 ‘자취’하는 삶을 살게 될 터. 이 단어는 독립한 ‘비혼’ 혹은 ‘미혼’은 불완전하다는 뜻을 포함하는 것 같다. 내가 민감한 걸까?)를 시작했다. 집구하기가 이렇게 힘들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고향을 떠나 서울 생활을 시작한지 6년 째였지만, 기숙사 생활․하숙 등을 하며 집값 문제와는 멀게 살았다.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몸 누일 공간 하나 마련하기 힘든 현실에 억울하기까지 했다.

여차저차해서 집은 구했다만, 그때의 충격은 ‘전세 0000만원/ 월세 00만원’과 같은 전단지를 볼 때마다 떠오른다. 또 다른 젊은 영혼들이 애끓고 있겠지, 하는 생각도 함께 든다. 그래서 이 책을 들었다. <집은 인권이다(이후, 주거권운동네트워크 엮음)>. ‘그래, 주거는 권리지. 그것도 기본권.’ 집 문제로 골머리 앓을 때, 절반은 세상 탓 나머지 절반은 자기 탓 하고 말던 내게 ‘집은 인권’이라는 발상은 획기적인 사고전환이었다.

이 책은 임대차보호법을 몰랐던 누군가에게 실용서이며

(법에 따르면, 1항에는 ‘…차임 또는 보증금(이하 ‘차임 등’이라 한다)의 증액 청구는 약정한 차임 등의 20분의 1의 금액을 초가하지 못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2항에는 ‘제 1항의 규정에 의한 증액 청구는 임대차 계약 또는 약정한 차임 등의 증액이 있은 후 1년 이내에는 이를 못한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임대인의 계약 해지 요구에 대항할 수 있는 임차인의 계약 갱신 우선 청구권 등이 보장되지 않아 많은 세입자들이 2년마다 이사를 다녀야 하는 이유가 된다 : <집은 인권이다>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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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누군가에게는 찌질 했던 삶의 기록이고

(박민규의 소설 「갑을 고시원 체류기」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결국 나는 소리가 나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 어느 순간인가 저절로 그런 능력이 몸에 배게 된 것이다. 발뒤꿈치를 들고 걷는 게 생활화되었고, 코를 푸는 게 아니라 눌러서 조용히 짜는 습관이 생겼으며, 가스를 배출할 땐 옆으로 돌아누운 다음 손으로 둔부의 한쪽을 힘껏 잡아당겨, 거의 소리를 내지 않는 기술을 터득하게 되었다.” 고시원에 살게 된 외로운 도시 청년의 이야기다. 글을 읽는 분 중에도 고시원에 살아 본 적이 있는 분이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박민규의 묘사에 백배 공감이 갈 것이다. : <집은 인권이다> 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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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누군가에는 투쟁으로 첫 발을 내딛는 사연이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유명했던 난곡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지 1년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난곡이 가난한 동네가 아니라고 한다. 달동네가 없어졌다고 가난도 없어진 걸까? 재개발 전에 난곡에 살던 집주인 가운데 새 아파트에 들어간 사람은 9퍼센트가 채 되지 않는다. 세입자 중 일부는 임대 아파트에 들어갔지만, 다섯 가운데 하나는 결국 임대료에 밀려 나오고 말았다. 그나마 천만 원이 넘는 임대 보증금을 구하지 못한 대부분의 세입자들은 인근 지하방이나 옥탑에 월세를 살았다 : <집은 인권이다> 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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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 내리는 여름에 곰팡이 피는 집안에 있으면 “기분까지 눅눅해진다”라는 낯모르는 이야기에 이십대 전반전을 보냈던 반 지하 내 하숙집이 떠올랐고, 독립을 위해 분투하는 장애인 언니 사연에는 마음으로 응원을 보냈으며, “어디 사냐”라는 질문 하나 만으로 계급을 알 수 있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쓴 입맛을 다셨다.

이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좋은 집을 살 수 있게 아등바등 살며 알뜰하게 저축하기는 매력도 없고 현실성도 없어 보인다. 집값에 매여 하우스 푸어가 되었다는 그들의 사연을 보자면 답답할 뿐이다. 깨어 있는 시간 대개 빈 공간이라, 그 집의 주인이 나일까 먼지일까 TV일까 의문스러운데 꼭 집을 가져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동시에 집이 없으면 평생 가난뱅이로 살지도 모른다는 언론과 어르신들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누가 심은 공포일까.

그래서 빈집 사례가 눈에 띄었다. 빈집은 집을 순환시켜 누구나 손님인 공간을 표방한다. 소유의 개념을 넘어섰다는 점에서 구미가 당긴다. 그러나 빈집은 “팬티만 입은 채 돌아다닐 수 없다”라는 거주자의 불만(물론, 속옷만 입고 집에서 지내겠다는 건 아니다. 그 이면의 집이 주는 ‘자유’와 ‘편안함’에 대한 고민을 공감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가벼이 넘길 수 없다. 답을 내려주는 책이 아니기에, 공감과 지지와 함께 고민도 한아름 안고 책장을 덮는다. 시골로 떠나는 게 답일까? 도시에서도 집을 소유하지 않고 살아갈 방법은 없을까?

응답 1개

  1. cman말하길

    한국에서 집, 학력, 외모, 성적 등은 모두 왜곡되어 우리를 서로 힘들고 고단하게 하는 것들로 변질되어 저를 옥죄네요. 반드시 집을 소유하지 않아도 살아가는 날을 상상합니다. 별로 어려워 보이지도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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